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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죄의 본질 (창 2:15-17, 3:1-7)

죄의 본질

2:15-17, 3:1-7, 사순절 첫째 주일, 201735

 

2: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3:1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2:4절 이하에 에덴동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낙원처럼 멋진 곳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에덴동산 중앙에 두 그루의 특별한 나무가 나옵니다. 하나는 생명나무이고, 다른 하나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입니다.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한량처럼 놀고먹는 게 아닙니다. 2:15절에 따르면 아담은 거기서 노동을 해야 하고, 동산지기 역할을 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이상한 명령을 내리십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2:17).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여러분들은 다 압니다. 아담과 여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아서 결국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했습니다. 그 과정이 창 3장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뱀이 등장합니다.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서 가장 간교한 짐승이었다고 합니다. 간교하다는 말은 좋게 들리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쁜 뜻도 아닙니다. 영리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송하면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 하라.’(10:16)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뱀은 영리하기에 질문도 사람 심리를 잘 이용해서 합니다. 아담을 찾지 않고 먼저 여자를 찾았습니다. 우리가 보통 하와로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여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은 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 말씀을 하실 때 여자는 아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여자는 이 문제를 상대적으로 덜 심각하게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뱀은 여자에게 이렇게 말을 건넵니다. 은근한 질문입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질문 자체만 보면 흠잡을 데가 없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문장입니다. 하나님은 원래 모든 열매를 먹으라고 말씀하셨지 먹지 말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먹지 말라고 한 건 한 가지 나무의 열매뿐입니다. 적극적으로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뱀은 비틀어서 부정적인 것으로 바꿨습니다.

여자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뱀에게 쓸데없는 거를 왜 묻냐, 할 일 없으면 가서 낮잠이 자라.’ 했으면 좋았을 텐데 진지한 반응을 보입니다. 우선 뱀의 발언을 교정했습니다. 동산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지만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이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했다는 겁니다. 여자의 표현도 과장입니다. 하나님은 먹지 말라고만 하셨지 만지지도 말라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여자는 자신이 그 말씀을 잘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만지지도 말라.’는 말을 덧붙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자 이제 뱀은 여자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을 합니다.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소극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적극적인 것입니다. 소극적인 것은 하나님이 금지한 과일은 먹어도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적극적인 것은 그걸 먹으면 오히려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주 그럴듯하게 들리는 말입니다.

선악을 알게 된다.’는 말에서 안다.’는 단어는 단순히 지적인 인식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경험과 능력까지 포함합니다. 구약학자 폰 라트(von Rad)는 이 단어를 가리켜 자신에게 유익한 것과 해로운 것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능력은 우리 모두가 원하는 것입니다. 특히 계몽주의 이후 자율적이고 자주적이고 자립적이고 지성적인 현대인들은 인간의 이런 능력을 최고의 가치로 여깁니다.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스스로 자기 운명을 개척하고 결정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건 오히려 의지박약으로 치부합니다. 오늘의 교육은 이걸 추구합니다. 자기중심적인 현대인들의 욕망은 이미 오랜 전에 여자를 유혹하는 뱀의 말에서 그대로 표현되었습니다.

뱀의 유혹은 직접적이지 않았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따서 준다거나 따먹으라고 강요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과일은 먹어도 죽지는 않을 것이며, 오히려 눈이 밝아진다는 사실만 확인해주었습니다. 뱀의 말이 완전히 거짓말은 아닙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일을 먹은 아담과 여자가 당장 죽지는 않았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다음에 노동과 산고의 고통을 감수해야만 했고, 살만큼 산 다음에 흙으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눈이 밝아진 것도 사실입니다. 다만 그로 인해서 어떤 운명이 기다릴지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뱀은 자리를 떴습니다. 여자 혼자 남았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창세기 기자는 그 장면을 6절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공동번역으로 읽겠습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쳐다보니 과연 먹음직하고 보기에 탐스러울 뿐더러 사람을 영리하게 해 줄 것 같아서, 그 열매를 따 먹고 같이 사는 남편에게도 따 주었다. 남편도 받아먹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본 여자의 마음이 세 가지로 묘사되었습니다. 첫째는 먹음직하고, 둘째는 보기에 탐스럽고, 셋째는 영리하게 해 줄 것 같았다고 합니다. 그 나무는 영혼을 사로잡을 만한 것입니다. 구원을 얻을만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오늘날 문명의 힘을 우리는 그렇게 경험합니다. 경제성장은 우리의 영혼을 사로잡습니다. 도시의 빌딩은 더 크고 화려하게 건축되고, 의학의 발전으로 인간의 수명은 크게 늘어납니다. 인공지능이 현실화되는 세상을 사람들은 매혹적으로 받아들일 겁니다. 무인운전도 가능하고, 인공로봇이 가정 살림도 다 맡아줍니다. 모든 사람들이 옛날 왕이 누렸던 풍족한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미 그런 시대를 살고 있긴 합니다. 가장 간단한 빨래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세탁기가 나오기 전만 하더라도 일일이 손으로 빨아야 했습니다. 겨울철에는 개울에 나가 얼음을 깨서 빨래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 당시에 비하면 지금 우리는 과학 덕분으로 왕과 귀족처럼 살고 있고, 앞으로 그 속도는 더 빨라질 것입니다. 먹음직하고 보기에 탐스럽고 영리하게 해 줄 거와 같은 나무는 우리의 영원한 로망입니다.

 

눈이 밝아지다

3:7절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은 아담과 여자의 눈이 밝아졌다고 설명합니다. 그것은 뱀의 말로 인해서 이미 예상된 일이었습니다. 아담과 여자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이어서 벌어졌습니다. 창세기 기자는 아무런 감정 이입도 없이, 가치 판단도 없이 무미건조하게 그 사실을 묘사합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아담과 여자는 눈이 밝아진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로 인해서 자기들이 벗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무 잎으로 벗은 몸을 가렸습니다. 벗었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3:8절 이하에 하나님이 아담과 여자를 찾아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여자는 하나님의 낯을 피해서 나무 사이에 숨었고, ‘네가 어디 있느냐?’ 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그는 자기들이 벗었음으로 두려워서 숨었다고 고백합니다.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아담과 여자의 내면을 지배하기 시작한 겁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먹지 말라 한 나무 열매를 먹었냐고 하나님이 묻자 아담은 핑계를 댑니다. 하나님이 주신 여자가 주어서 먹었으니 결국 하나님 책임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여자에게 왜 이런 일을 했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여자는 뱀에게 책임을 미룹니다. 하나님은 뱀에게는 왜 그랬냐 하고 묻지 않았습니다. 죄의 근원을 다른 데로 돌리지 않고 사람에게서 찾는다는 뜻입니다. 부끄러움과 두려움과 핑계가 이전에는 없었는데, 아담과 여자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뒤에 생겼습니다. 인간의 전 존재에 심각한 분열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 분열은 오늘에도 두 가지 차원에서 명백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개인 차원입니다. 사람에게는 채워지지 않는 삶의 심연이 있습니다. 그걸 막연하게 느끼는 사람이 있고, 아주 실질적으로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느끼는 사람은 일상의 삶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어서 출가 수도승의 길을 갑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막연하게 느끼기 때문에 그냥 일상을 살아갑니다. 일상에 몰두함으로써 그 심연의 불안과 분열로부터 벗어난 것 같은 착각을 합니다. 그러다가 불현 듯이 그 심연의 불안으로 빠져들어 공허감에 사로잡힙니다. 이런 문제는 삶의 조건이 아무리 좋아져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남이 부러워할만한 조건을 갖춘 사람들도 그 내면에서는 아담과 여자가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고 핑계를 댄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저는 어떤 한두 사람의 파렴치하고 몰염치한 생각과 행위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인간 영혼의 심연이 크게 뒤틀려 있어서 어떤 방식으로도 그걸 극복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여러분들이 실제로 그런지 아닌지 돌아보십시오.

다른 하나는 사회적인 차원입니다. 사회를 거대한 개인으로 비교해서 보십시오. 사회 내부에 삶의 충만감이 없습니다. 일치가 없습니다. 기업가와 노동자 사이에 일치가 이뤄지기는 불가능합니다. 요즘 탄핵정국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을 보면 도대체 같은 나라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인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사회 분열이 극에 달하고 있습니다. 국가와 국가 사이도 그렇습니다. 간혹 저는 외계인의 눈으로 지구에서 사는 사람들을 바라보곤 합니다. 외계인들에게는 인간이 국경을 만들어놓고 사는 게 이상하게 보일 겁니다. 남북분단은 더더욱 이상하게 보이겠지요. 사회적으로도, 국가적으로도 부끄러움과 두려움과 핑계가 숙명처럼 작동됩니다.

그렇지 않아도 짧은 인생이라서 우리는 정말 이렇게 살고 싶지 않습니다. 영혼의 충만함을 경험하고 싶습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사회적으로도 그렇습니다. 그렇게 살기 위해서라도 그 원인을 알아야 합니다. 그걸 우리는 선악과 이야기에서 읽었습니다. 뱀이 여자를 유혹할 때 한 말을 다시 기억해보십시오.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니, 정말 솔깃한 속삭임입니다. 직접적으로 표현하면 공주가 되고 싶다는 욕망, 왕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이 그것입니다. 티브이 광고는 우리의 이런 욕망을 자극합니다. 그것이 좌절될 때 사람은 절망합니다. 우울증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여러 가지 방식의 자기학대로 나타납니다. 더 심한 경우에는 그것이 폭력적으로 나타납니다. 아내와 아이들에게 폭력을 쓰는 남자들은 자기를 신으로 높이고 싶다는 욕망의 좌절을 약자들을 공격함으로써 보상받으려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바로 죄의 본질입니다. 그런 죄의 단초가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뱀의 유혹에 의해서 결국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즉 피조물로서의 주제를 파악하고 살아야 한다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아담과 이브의 불순종에 놓여 있습니다. 그 결과는 내면의 총체적 분열입니다. 생명 충만감의 결여입니다.

 

바벨론 제국주의

창세기의 창조와 선악과 타락 이야기는 바벨론 제국과 연결됩니다. 창세기 기자가 지금 진술하고 있는 선악과 사건은 단순히 인간은 다 죄인이라는 사실을 전한다기보다는 부단히 자기를 신격화하는 바벨론 제국을 향한 강력한 경고입니다. 그리고 제국을 흉내 내려는 유대 왕국을 향한 경고입니다. 고대 제국의 왕들은 다 자신들을 신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자신들에게 무한정의 힘이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거대한 건축물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11장에는 바벨탑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람들이 시날 평원에 높은 탑을 쌓았습니다. 고도의 건축기술이 필요했습니다. 벽돌을 일일이 쌓아 올려야했으니 노동력은 얼마나 많이 필요했으며, 돈은 얼마나 많이 필요했을지 상상이 갑니다. 바벨탑은 바벨론 문명을 상징적으로 가리키는 거대 건축물입니다.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바벨론 제국은 기원전 587년에 유대를 파멸시켰습니다. 예루살렘은 완전히 초토화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도 파괴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국론은 분열되었습니다. 바벨론 제국에는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과 문화의 힘이 있었습니다. 채찍과 당근으로 주변의 여러 작은 나라를 길들이려고 했습니다. 그들의 모든 것이 나쁜 건 아닙니다. 높은 수준의 교육과 문화와 철학과 예술을 자랑했습니다. 문제는 자신들이 옳다고 하는 것이 선이고, 그걸 반대하는 게 악이라고 규정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들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분별한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 것인지 아닌지를 자신들이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걸 주변에 강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죄입니다. 죄의 결과는 내면의 분리이며, 실낙원이고, 죽음입니다. 그걸 우리는 지난 인류 역사에서, 그리고 지금 이 현실에서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목도하고 있습니다.

바벨론 제국보다 더 강력한 제국이 지배하는 21세기 현대 역사 속에서 기독교인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삶을 성취하려는 모든 노력을 부정할 수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 여기 정치인이 있다고 합시다. 그는 지방의원이 되고, 국회의원이 되고 싶습니다. 더 나가서 대통령이 되고 싶습니다. 여기 젊은 벤처 기업가가 있다고 합시다. 그의 꿈은 애플의 창립자나 구글 창립자처럼 세계적인 기업가가 되는 겁니다. 이런 생각과 노력을 타락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자기 절대화입니다. 세계적인 기업가가 되고 최고 통치자가 되어도 자기가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자기를 낮추고 자기 분수를 차리는 사람이 있고, 더더욱 자기를 높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절대화가 정서적으로는 자기연민과 자기염려로 나타납니다. 이런 사람은 아담과 여자처럼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할 수밖에 없고, 결과적으로 내면의 분열을 피할 수 없습니다.

 

불순종이라는 죄의 지배 아래 놓인 인류 역사에서 하나님께 순종한 유일한 한 분이 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이르렀으니 회개하라고 선포한 예수는 십자가 죽음에 직면했습니다. 십자가 처형은 당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증거였습니다. 예수님 당신 자신도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결국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한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인류를 대표하는 아담의 불순종은 극복되었습니다(5:19). 예수의 순종으로 인해서 죄와 죽음이라는 인류의 운명은 극복되었습니다. 그를 믿는 사람은 죄와 죽음에서 해방될 것입니다.

창세기 2:15-17, 3:1-7
https://youtu.be/AorDbRt8Fic
https://youtu.be/epgTxjNKys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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