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 심연
딤전 1:12-17, 창조절 셋째 주일, 9월15일
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13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7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오늘의 제2독서로 읽은 딤전 1:12-17절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입니다. 이 편지는 일명 목회서신에 속합니다. 노년의 바울이 젊은 디모데에게 목회에 대한 가르침을 편지로 전한 겁니다. 당시 디모데가 목회하던 교회에 어떤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 문제는 그 교회만이 아니라 초기 기독교 전반에 관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단 출몰이 그것입니다. 이런 이단들로 인해서 초기 기독교가 크게 흔들리곤 했습니다. 이단의 정체가 눈에 확 드러나는 것도 아닙니다. 일단 근사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더 위험했습니다. 바울의 충고를 들어보십시오. 딤전 1:3, 4절입니다.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바울은 마게도냐로 가면서 디모데를 에베소에 머물러 있으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디모데가 에베소에서 할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에베소 교회에는 바울이 가르친 복음과 다른 것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신화에 몰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는 것입니다. 신화는 헬라 철학의 주요 관심사이고, 족보는 유대교의 주요 관심사입니다. 전자는 헬라철학의 한 분파인 영지주의를 가리키고, 후자는 유대교의 율법주의를 가리킵니다.
영지주의(gnosticism)는 영적인 지혜를 추구한다는 뜻입니다. 영적인 지혜라는 말은 기독교인의 입장에서도 매력적으로 들립니다. 겉으로만 보면 그렇지만 깊이 들어가면 아주 심각한 문제가 벌어집니다. 영적인 지혜를 앞세운 영지주의자들에게 인간의 육은 악하고 영만 깨끗합니다. 육체는 영혼을 가둔 감옥입니다. 육체라는 감옥으로부터 벗어나는 게 죽음이고, 따라서 죽음은 영혼의 해방입니다. 인간을 철저하게 영육이원론의 시각으로 보는 입장입니다. 기독교 영지주의자들은 이런 관점에서 예수의 육체까지 부정했습니다. 그게 소위 가현설(docetism)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사신 것은 우리와 똑같이 인간의 몸으로 사신 게 아니라 그림자로 나타난 것뿐이라는 겁니다. 유다 복음서는 영지주의에 크게 영향을 받은 복음서 중의 하나입니다. 이 복음서에 따르면 유다의 예수님의 구원 사역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했다는 것은 예수님이 육체의 감옥에서 영적으로 해방 받은 것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율법주의는 다시 유대교적 전통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무리 믿어도 실제의 삶에서는 아무런 변화도 없으니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이 오히려 좋다는 겁니다.
영지주의와 율법주의가 초기 기독교를 크게 위험에 빠지게 했다는 사실을 약간 의아하게 생각할 분들도 있을 겁니다. 믿음이 없어서 그런 것 같다고도 생각하겠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단의 주장은 다 그럴 듯하기에 저절로 빠져듭니다. 그런 요소들은 지금도 반복해서 나타납니다. 영지주의가 영적인 지혜를 추구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들은 기독교 신앙을 신학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아주 비밀스러운 내적 경험으로 깨달아지고 전수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지금도 그런 방식으로 신앙생활 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자신이 기도했더니 어떤 응답을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국교회에는 신학무용론이 팽배합니다. 이런 것은 영지주의적 요소들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헬라철학의 신화와 유대교의 족보에 몰두하는 신앙생활을 경계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런 것은 말싸움을 일으킬 뿐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입니다. 하나님의 경륜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가리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자신이 어떻게 기독교 비방자요 박해자였다가 복음 사역자가 되었는지에 대해서 간단하게 언급한 뒤에 하나님의 구원 경륜을 이렇게 말합니다. 15절입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의 내가 괴수니라.
이 구절을 이해하면 기독교 신앙의 중심을 이해하는 겁니다. 아주 초보적인 교리이지만 모든 교리의 기초입니다. 우리말 번역은 너무 은혜롭게 번역하려고 해서 오히려 실감이 오히려 떨어집니다. 마틴 루터의 번역을 비교해서 들어보십시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또는 복 받게 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는 것은 정말 참되며 값비싼 말씀입니다. 그 죄인들 중에서 제가 우두머리입니다.
이런 말씀을 읽을 때 사람들은 ‘그렇지, 내가 죄인이야, 예수를 믿어 내 죄가 씻기고 구원 받는 거야.’ 하고 생각합니다. 그게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그가 저 말을 정확하게 이해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우선 다음의 질문에 대답해보십시오. 본문이 말하는 죄인은 어떤 사람들을 가리킬까요? 무엇이 죄일까요? 거짓말, 폭행, 도둑질, 속임수, 불효 등등이라고 생각합니다. 또는 세상의 법을 위반하는 것을 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바람직하게 못한 행동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성서는 그런 정도의 수준에서 죄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죄의 결과입니다. 죄의 뿌리가 그대로 남아 있는 한 그 열매들은 그대로 나타납니다. 잔소리를 듣거나, 잘못한 것에 대한 불이익을 받으면 잠시 괜찮아지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은 잠시뿐입니다. 모든 게 원래의 상태로 돌아갑니다. 예를 들어 여기 백여 명의 사람들이 사막을 걸어서 횡단하고 있다고 합시다. 준비한 물이 다 떨어졌습니다. 모두 목말라 죽을 지경입니다. 우연하게 작은 샘물을 발견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마시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먼저 마시려고 싸울 겁니다. 거기서 폭력이 발생합니다. 자기 혼자 그 샘물을 발견했으면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않을 겁니다. 지금 우리가 세상을 사는 방식과 비슷합니다. 성서가 말하는 죄는 서로 싸우고 속이는 것 자체가 아니라 물이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바울은 죄인들 중에 자기가 우두머리라고 말합니다. 원래 바울은 철저하게 종교적이고 율법적이고 도덕적이고 인격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 누구보다도 더 열정적으로 율법을 준수한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죄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윤리적이고, 종교적이고, 인격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을 가리켜 죄인들 중의 우두머리라고 말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일까요? 바로 앞에서 예를 들어 언급한 물이 없는 상태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성서가 말하는 죄는 무엇일까요? 스스로에게 대답해보십시오.
생명과의 단절이 그 대답입니다. 물이 없으니 목말라 하는 것은 당연하고, 물을 마시려고 싸우는 것도 당연합니다. 생명과 단절되어 있으니 그걸 해결해보려고 온갖 노력을 다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율법 있는 사람들은 율법 안에서 죄를 범하고, 율법 없는 사람은 율법 없이 죄에 휩싸여 있다고 말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해서 생명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바울도 원래 그런 전통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율법을 열심히 지켜도 생명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율법 없는 사람들은 로마 사람들과 헬라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신화, 문화, 예술, 스포츠 등등의 삶에 매진하는 겁니다. 콜로세움에서 광기에 사로잡힌 격투사들의 싸움을 보고 절정의 희열을 느끼던 로마인들도 그것으로 생명의 충만감을 경험할 수는 없었습니다.
인간이 왜 그럴까요? 돈을 남이 부러워할 정도로 많이 벌거나,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거나, 마음에 쏙 드는 사람과 결혼하면 뭔가 근본적인 것이 해결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 기대가 있기 때문에 지금도 모두가 열심히 살지 않습니까? 그런 목표를 이루면 잠시 기쁨을 느끼기는 하지만 참된 만족을 얻지 못합니다.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죽음의 그림자만 오히려 더 짙어집니다. 그런 실존을 가리켜 성서는 죄라고 말합니다. 불교는 고(苦)라고 말하는 그것입니다.
죄인 중의 우두머리라는 바울의 고백을 다시 들어보십시오. 그 고백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부도덕하게 살았다는 게 아니라 생명과의 단절을 다른 사람보다 더 엄중하게 경험했다는 의미입니다. 기독교인들을 박해할 정도로 유대교 전통과 율법에 매진했지만 생명과는 점점 더 거리가 멀어졌습니다. 명성을 얻기 했지만 그것으로 생명을 얻지 못했습니다. 자기가 이룬 업적이 크고 강렬할수록 생명과의 단절은 더 깊어졌습니다. 그게 죄의 심연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심연을 별로 깊이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냥 막연하게 느낄 때가 많습니다. 조금 생각이 있는 사람들도 대개는 인생이 다 그런 거지, 나그네와 같이 허무한 거야, 하고 넘어갑니다.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 이유는 사이비 생명에 현혹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가짜 보석에 눈이 어두워 버리면 진품 보석이 없다는 사실을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거짓 선지자의 선동에 솔깃해 하던 고대 유대인들이 참 선지자의 설교에 귀를 닫아버린 것과 비슷합니다. 그 사이비 생명은 바울이 본문에서 경계하라고 이른 신화와 족보 이야기입니다. 오늘 이 시대가 강요하는 성공신화 이야기이며 세상적인 명예 이야기입니다. 자기 확대이고 자기 연민이자 자기 열광이기도 합니다. 그런 것에 마음이 분산되어 있으면 생명과의 단절이 무엇인지를 느낄 수 없습니다. 술에 취해 현실 감각을 잃는 것처럼 말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사람은 아무리 그 심연을 피해보려고 해도 피할 수 없습니다. 잠시 외면할 수는 있어도 계속 피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를 자극하는 것들이 세상에 아무리 많아도, 그래서 거기에 잠시 정신을 판다고 하더라도 죄의 심연, 즉 생명 상실이라는 실존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성서는 우리에게 그 사태를 직면하라고 요구합니다. 성서 이야기는 대부분은 그것에 대한 해명입니다. 그 심연을 경험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그의 거룩성을 경험한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 죄의 심연에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행하신 하나님의 구원 경륜을 알게 되었습니다. 거꾸로 말하는 더 정확합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경륜에서 죄의 심연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 경험으로 자신이 생명과 얼마나 깊이 단절되어 있는지를 알았고, 거기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죄인을 구원하려고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것이라는 사실을 과감하게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만 이런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서 기자들도 바로 이 한 가지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비롯한 신약에 포함된 모든 편지들도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고 말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서 그가 오셨다는 뜻입니다.
이런 진술이 과연 옳은 걸까요? 광신자들의 자기 암시나 독백에 불과한가요? 그것이 옳다면 그 근거는 무엇일까요? 여러분은 이에 대한 대답을 알고 계신가요? 이 자리에서 저는 직접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그 대답은 다른 설교에서 수없이 말씀드렸을 뿐만 아니라, 여러분이 여기에 문제의식이 있다면 성령께서 고유한 방식으로 그 대답을 알려주실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저는 직접 대답하기보다는 죄의 심연을 인식한 바울에게 주어진 신앙의 깊이를 설명하는 것으로 오늘 설교를 정리하겠습니다. 16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주님의 긍휼로 규정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참아주셨다고 본 것입니다. 이건 낭만적인 고백이 아닙니다. 죄의 심연이라는 자신의 영적 실존을 뚫어본 사람에게서만 가능한 인식이자 고백이며 결단입니다. 이 대목을 잘 보십시오. 사람들은 긍휼을 상투적으로 입에만 달고 삽니다. 생명과의 단절이 얼마나 준엄한 상태인지 느끼지도 못한 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행하신 생명 사건 앞에서 전율해보지도 못한 채, 그리고 자신의 값싼 죄책감에 빠진 채 긍휼을 입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인기 스타들 앞에서 환호성을 치는 오빠부대 소녀들의 감상주의와 같습니다. 바울이 경험한 긍휼의 영성은 자신의 운명 전체에 버금가는 무게입니다. 자신의 모든 종교적, 윤리적, 학문적 업적을 배설물로 여긴다는 말이(빌 3:8) 빈 말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 말을 한 뒤에 곧 이어서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바란다는 찬송의 후렴구를 언급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찬송은 죄의 심연으로부터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한 사람의 영혼에서 불리는 노래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런 경험은 루돌프 오토가 <Das Heilige>(거룩함)에서 짚은 누미노제, 즉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생명을 표피적 차원이 아니라 심연의 차원에서 대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경험입니다. 그 생명의 심연으로 들어가는 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에게 일어난 놀라운 사건을 주목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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