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살전 4:13-18, 창조절 열번째 주일, 2014년 11월9일
13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4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18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오늘 제2 독서인 살전 4:13-18절에는 이상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우리의 일상과 거리가 너무 멀어 보이는 것들입니다. 특별히 16절과 17절이 낯섭니다. 주께서 하늘로부터 강림하신다고 합니다. 그 순간에 호령과 나팔소리가 들리고, 죽은 사람들이 살아나서 살아 있던 사람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져서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된다고 합니다. 마치 공상과학소설에나 나올만한 이야기들입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 기독교인들을 정신 나갔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합니다. 기독교인들 중에는 예수님이 재림할 때 자신들이 실제로 공중 부양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었으니까요. 1992년 다미선교회 사건을 기억하시지요? 그 집단에 속해 있던 기독교인들은 휴거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일정한 날짜에 예수님이 재림하고, 자신들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공중으로 들림 받는다고 주장했습니다. 바울이 오늘 본문에 명시적으로 그 사실을 기록하고 있으니 휴거가 아무런 근거 없는 주장이라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실체적 진실이 무엇인지 이해하려면 일단 바울이 왜 이런 이야기를 여기에 썼는지에 대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신자들이 처한 특별한 상황이 행간에 들어있습니다.
재림의 지연
본문 시작인 13b절에서 바울은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쓴 다음에 본문이 끝나는 18절에서 ‘이런 말로 서로 위로하라.’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뭔가 슬퍼할만한 일이, 그리고 위로받을만한 일이 생겼다는 뜻입니다. 그 사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살아있을 때 예수님이 재림할 것이라고 실제로 믿었습니다. 이에 대한 직간접적인 흔적이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요 21:15-25절은 부활 후의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으로 사도의 직분을 맡긴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고난도 당하리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자 그는 옆에 있던 요한을 가리키면서 이 사람은 어떻게 될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거기 있던 사람들은 이 말씀을 요한이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죽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행 2:43-47절에 따르면 예루살렘 교회 신자들은 원시 공산주의 형태로 살았습니다. 재산과 소유를 다 팔아 필요에 따라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함께 모여 기도하면서 공동체 생활을 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행 4:32-35절에도 반복해서 나옵니다. 행 5장에는 부동산을 팔아서 일부를 감춰두고 나머지만 사도들 앞에 가져왔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돌연사 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에 대한 이야기도 나옵니다. 예수님이 곧 재림하고 세상이 끝난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약간 차이가 있다고 해도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재림하기도 전에 교인들이 죽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는지가 궁금했습니다. 여기서 핵심 문제는 재림의 지연입니다. 이로 인해서 많은 것들이 혼란스러워졌습니다. 재림 지연 문제가 오늘 우리에게는 그다지 심각하지 않지만 당시에는 절절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처한 상황을 잠간 돌아보십시오. 그들이 추종하던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하나님 나라 운동의 실패입니다. 당시에는 아무도 십자가에 달린 자를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이를 믿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경험에 근거해서 십자가 사건을 오히려 구원의 길이라고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부활을 사람들에게 이해시키기 힘들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것은 신문 기자가 현장을 확인하고 육하원칙에 따라서 보도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통해서 부활이 증명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재림에 자신들의 운명을 걸어둔 것입니다. 초기 기독교를 재림공동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재림을 기다리면서 함께 지내던 교우들이 죽기 시작했고, 예수님의 재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신자들의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먼저 죽은 교인들과 가족들은 부활 생명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고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울은 이들을 위해서 오늘 본문을 기록했습니다. 슬퍼하지 말아야 할 이유, 그리고 위로받아야 할 근거가 무엇인지를 여기서 설명한 것입니다. 바울의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금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당한 슬픔은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재림이 일어나기 전에 사람들이 죽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죽음을 슬퍼하는 이유는 그들을 다시 못 만난다는 데에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죽었다고 말하지 않고 예수 안에서 잔다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는 자들을, 즉 실제로는 죽은 자들을 예수님의 재림 때에 데리고 오기 때문에 죽은 사람이나 살아있는 사람이나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했습니다. 15절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바울의 이런 설명이 논리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죽은 사람과 살아있는 사람 사이에는 분명히 건널 수 없는 심연이 가로놓여 있습니다. 사실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5백 년 전에 죽은 사람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전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시속 300킬로미터 속도로 달리는 KTX 기차와 시속 1천 킬로미터 속도로 날아가는 국제선 비행기를 그들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들보다 우리는 더 건강하게, 더 풍요롭게, 더 오래 삽니다. 그래서 그들보다 우리가 크게 앞서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건 사실적인 이야기입니다. 아무도 이걸 부정할 수 없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도 이런 방식으로 삶을 경험했기 때문에 같은 교인들과 가족들의 죽음, 그리고 재림 지연으로 인해서 슬퍼하고 낙심했습니다. 그게 이상한 것도 아닙니다.
묵시적 안목
바울은 이 문제를 당시의 특별한 글쓰기 방식으로 부연해서 설명합니다. 그것이 설교 앞부분에서 잠간 언급한 16, 17절에 나오는 휴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묘사된 것은 특이한 현상이니까 그 내용을 간추려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주의 호령, 천사장의 소리, 하나님의 나팔소리가 나고,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들이 먼저 일어나며, 살아남은 자들이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올라가고, 공중에서 재림의 주를 영접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을 것입니다. 종말과 휴거에 대한 묵시문학적 묘사입니다. 이런 휴거 장면을 그림으로 그린 화가들도 있습니다.
바울이 주의 재림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묵시문학의 글쓰기 형식을 빌려온 이유는 세계와 생명과 그것의 완성에 대한 새로운 안목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열거된 묵시적 현상들이 가리키는 것은 마지막 때 세상이 완전하게 변한다는 사실입니다. 일시적으로 모양이 바뀌는 게 아니라 아예 근본이 바뀌는 겁니다. 본문에 나오는 구름과 하늘이라는 표현을 생각해보십시오. 성서시대 사람들에게 구름과 하늘은 하나님의 생명이 은폐된 곳을 가리킵니다. 생명의 비밀이 숨어 있는 곳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주기도나 예수님이 ‘하늘에 오르셨다.’는 사도신경도 다 이것을 가리킵니다. 즉 하늘은 단순히 우주 공간의 어느 한 곳을 가리키는 아니라 생명의 신비, 그 비밀을 가리킵니다. 그 신비와 비밀이 지금은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것이 완전히 드러나는 순간을 가리켜 재림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구름으로 끌려올라가고 공중에서 주를 영접한다는 것은 우리와 세상의 모든 비밀이 완전히 노출된다는 뜻입니다. 그 순간이 되면 우리가 지금 경험하는 모든 것들은 다 변합니다. 지금 우리 앞에서 벌어지는 차별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억울한 일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무죄한 이들의 불행도 없습니다. 지금과는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아주 사실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죽음이 가장 좋은 예입니다. 죽으면 우리는 더 이상 이 세상의 논리에 지배당하지 않습니다. 부자로 살았던 사람의 몸이나 가난하게 살았던 사람의 몸이나 아무런 차별 없이 모두 재와 먼지가 될 뿐입니다. 지식인으로 살았던 사람이나 육체노동자로 살았던 사람도 구별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인기를 끌었던 사람이나 무명의 촌부나 차이가 없습니다. 90살 이상 장수한 사람의 몸도 원소로 해체되고, 한창 젊었을 때 돌연사한 사람의 몸도 원소로 해체됩니다. 거기서는 전혀 다른 힘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심판하고 통치할 것입니다.
전혀 다른 힘이 무엇일까요? 그게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묵시문학 사상가들은 그를 인자(人子)라고 생각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그 인자가 바로 예수님이라고 믿었습니다. 인자이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당하셨지만 부활 승천하셨고, 때가 되면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겁니다. 그 심판은 생명의 완성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재림, 즉 주님의 강림이야말로 우리가 완전히 변화되어 구원받는 순간입니다. 우리는 그 순간을 기다리면서 삽니다. 그런 기다림만이 우리가 감당하기 힘든 이 세상의 모든 불행과 불안과 좌절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초기 기독교는 재림공동체로서 이 사실에 자신들의 모든 걸 걸었습니다.
깨어 있으라
오늘 제 3독서는 마 25:1-13절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가 나옵니다. 천국이 결혼 잔치와 같다는 비유입니다. 유대인들의 고대 결혼 풍속에 따르면 신랑은 신부를 데리러 신부 집에 갔다가 밤중에 자기 집으로 돌아온다고 합니다. 신랑이 돌아올 때 동네 처녀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맞이하여 춤과 노래를 곁들이며 잔치를 베풉니다. 여기 열 명의 처녀들이 신랑 집에 모였습니다. 그중의 다섯 명은 등불을 밝힐 기름을 준비했지만 다른 다섯 명은 어떻게 되겠지 하고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신랑이 예상 외로 늦게 왔습니다. 처녀들은 졸다가 신랑이 온다는 소리를 듣고 급히 일어나서 등불을 밝혔습니다.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다섯 명의 처녀들은 등불을 밝히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다른 다섯 명에게 기름을 빌려달라고 했습니다. 그건 바른 해결책이 아니었습니다. 기름을 나누면 기름을 준비한 처녀들까지도 등불을 밝힐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어리석은 처녀들은 기름을 구하러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돌아왔지만 이미 결혼 잔치집의 문은 닫히고 말았습니다. 닫힌 문은 아무리 사정해도 다시 열 수가 없었습니다. 이 비유를 정리하면서 예수님은 마 25:1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이 비유와 비슷한 이야기가 오늘 설교 본문에 이어지는 살전 5:1-11절에도 나옵니다.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6절) 이런 이야기가 말하려는 것은 분명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세상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시간에 영적인 주파수를 맞추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에 삶의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손에 잡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된 성경구절을 읽거나 설교를 들어도 마음의 설렘이 없습니다. 다른 부분에서는 진정성을 갖고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들도 이런 이야기에는 시큰둥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초기 기독교에서도 있었고,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를 계속되었고, 지금도 역시 그렇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재림의 재연으로 인해서 신앙적인 혼란을 경험했다는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일상의 시간 경험에 길들여졌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미 죽은 사람이나 살아있는 사람이나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그 이야기가 가리키는 시간의 비밀을 느끼지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이를 깨닫고 믿게 할 능력이 없습니다. 세상의 비밀을, 하나님 통치의 비밀을 깨달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이런 은총을 간구해보십시오.
예수님의 재림에 자신의 인생을 걸어두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일상의 엄청난 무게를 쉽게 벗어날 수는 없다는 사실이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사람들과 갈등을 겪고, 돈 문제로 유치하게 행동할 때도 있고, 허무의 심연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의 삶은 예수님의 재림을 모르는 사람들의 삶보다 더 위태롭습니다. 더 불안할 수도 있습니다. 재림의 빛을 느끼지만 실제 삶의 무게를 피할 수 없다는 딜레마를 견뎌야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서로 위로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여기서 ‘이러한 말’은 주님의 재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런 말로 서로 위로하라는 것은 그런 이웃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런 이들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혼자서는 일상의 과잉이라는 이 현실을 뚫고 나가기 어렵습니다. 세상을 보십시오. 대부분이 돈, 출세, 스펙, 자식, 사업, 또는 어떤 이들의 스캔들, 간혹 감동적인 휴먼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뿐입니다. 이런 것에 재미를 붙이면 더 이상 다른 이야기는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아무리 인격적이고 고상하고 재미있게 산다고 하더라도 근본적으로는 거기서 거기입니다.
어떤 교우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자신은 세상살이가 재미없다고 말입니다. 인생살이가 허무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해서 빈둥대면서 사는 사람도 아닙니다. 세상일의 근본적인 상대성과 한계성을 안다는 뜻입니다. 이런 깨우침은 신앙의 토대입니다. 젊은이들이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세상에 대한 과도한 열정에 파묻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그런 열정을 인생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렇게만 살아도 충분한 분들은 그렇게 살면 됩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2천 년 전 출발부터 전혀 다른 관심으로 살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것을 놓치면 기독교 영성으로부터 멀어집니다.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우리는 생명이 완성될 주의 강림에 영혼의 촉수를 민감하게 맞추고 살아가는 사람들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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