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날과 일상
살전 5:1-11, 창조절 열한째 주일, 2020년 11월15일
신약성경은 초기 기독교에서 생성된 여러 문서의 종합입니다. 전체가 27권입니다. 당연히 저자도 다르고 기록된 햇수도 다릅니다. 대체로 기원후 50년경에서부터 100년 어간에 기록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기록된 문서는 오늘 설교 본문이 포함된 데살로니가전서입니다. 최초의 문서이기에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초기 기독교의 가장 생생한 상황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상황 안으로 천천히 들어가겠습니다.
먼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몇 구절을 확인하겠습니다. 1:10절에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이라는 표현이 나오고, 2:19절에 “그가 강림하실 때”라는 표현이 다시 나옵니다. 3:13절에도 나옵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들의 키워드는 예수 재림입니다. 4장에서는 더 자세한 설명이 나옵니다. 예수 재림이 당시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그리고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신앙의 내용이었다는 뜻입니다. 예수 재림은 세상이 완전히 뒤바뀌는 사건입니다. 세상의 권력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가 실행됩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감옥에 갇혔던 성춘향 앞에 과거 급제한 이몽룡이 암행어사가 되어 나타나는 일입니다. 재림 신앙으로 기독교인들은 당시의 어려운 상황을 버텨낼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기독교인들이 죽어가는데 예수 재림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자신들이 살아서 예수 재림을 맞을 것이라는 신앙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이 문제를 오늘 설교 본문의 바로 앞 대목에서 설명했습니다. 살전 4:15절입니다.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이 구절에 두 종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하나는 살아있는 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자는 자들입니다. 자는 자들은 죽은 자를 가리킵니다. 살아있으나 죽으나 시간상으로 차이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건 말이 안 된다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에서는 이 둘 사이에 뛰어넘을 수 없는 차이가 있으니까요. 바울의 말을 이해하려면 시간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시간을 평면적이고 양적으로만 본다면 바울의 주장은 틀렸습니다. 그러나 시간을 입체적이고 질적으로 본다면 옳습니다. 주의 재림으로 발생하는 새로운 생명의 관점에서는 언제 죽었느냐, 하는 것은 무의미해지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여기 두 사람의 테니스 동호인이 있다고 합시다. 한 사람은 저처럼 평생, 그러니까 40년간 테니스를 배웠고, 다른 한 사람은 10년 전부터 배웠습니다. 시간의 차이가 분명합니다. 그러나 테니스 실력의 관점으로 보면 이런 시간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두 사람 모두 아마추어로서 최고 수준에 올랐다면 40년과 10년의 차이는 무의미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관점은 테니스 실력입니다. 죽은 자나 살아있는 자나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바울의 말은 예수 재림으로 인한 생명이 절대적이라는 사실을 전제하는 겁니다. 이 사실을 안다면 예수 재림의 지연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살전 4:18절에서 “이러한 말로 (예수 재림 지연을 걱정하지 말고) 서로 위로하라.”라고 권면했습니다.
이런 설명과 권면으로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궁금증이 모두 해결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 재림이 실제로 언제 일어나는지는 알고 싶었을 겁니다. 그 순간을 무작정 기다릴 수만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바울은 살전 5:1절 이하에서 도둑 이야기를 꺼냅니다. 그 이야기는 바울이 예수 말씀에서 빌린 것입니다. 마 24:36절 이하에 이를 주제로 하는 예수의 비유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때는 아무도 모르기에, 도둑이 언제 들어올지 모르는 것처럼 깨어서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 1절과 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들어보십시오.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둑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이런 말을 들으면 어딘가 불안해지는 분들이 있습니다. 세상 마지막이 갑자기 들이닥치면 자기 인생은 어떻게 되는 거지, 하는 생각에 사로잡히니까요. 기독교의 열광적인 종말론자들에게서 그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세상 마지막이 왔으니까 빨리 준비하라고, 자기들 모임에 오라고 위협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런 말을 종교적 망상이라고 무시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현대 지성인들이 주로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주의 날이 밤에 도둑같이 이른다는 바울의 말은 무슨 뜻이며, 그 말에는 과연 설득력이 있나요? 먼저 주의 날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생각하는 게 좋겠습니다.
여러분이 살아가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 언제였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각자 다를 겁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결혼했을 때, 아기를 낳았을 때, 원하는 집을 샀을 때, 멋진 여행을 다녀왔을 때 등등, 손에 꼽기도 힘들 정도입니다. 그런 행복한 순간이 계속되지는 않습니다. 우리 인생의 그 어디에도 삶의 완성이 없다는 뜻입니다. 위대한 인물이 되어도 여전히 어딘가 결핍된 삶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세상 전체를 놓고 본다면 이런 행복한 순간보다는 불행한 순간이 더 많은 것처럼 보입니다. 더 많지는 않아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는 됩니다. 인간의 잘못으로 인해서 불행한 일이 벌어지기도 하고, 천재지변으로 불행한 일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문명이 최고로 발전한 21세기에도 생명은 여전히 미완입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사회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완성되지 않은 삶을 살다 보니 철이 들지 않은 어린아이들처럼 하루도 싸우지 않고 지내는 날이 없습니다.
‘주의 날’은 생명 완성의 날입니다. 생명이 충만해지는 순간입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빵을 만들기 위한 밀가루의 발효가 완성되는 순간입니다. 발효가 되지 않거나 덜 된 밀가루로 빵을 만들면 어떻게 되는지 아실 겁니다. 그런데 생명 완성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우리는 아직 모릅니다. 비유적으로만 말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는 잔치 비유를 말합니다. 신랑이 올 때를 준비하는 젊은 춤꾼 여자들의 상황과도 같습니다. 주의 날이라는 사상은 구약에서부터 내려옵니다. 예를 들어 이사야는 ‘여호와의 날’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 날에 자고한 자는 굴복되며 교만한 자는 낮아지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실 것이요.”(사 2:17)라고 했습니다. 그에 앞서 사 2:4에서는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라고 합니다. 사 11:1절 이하에서는 더 풍성한 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묘사합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 ”
여러분은 주의 날, 또는 여호와의 날이라는 성경의 표현을 어떻게 받아들이십니까? 맞아, 저런 세상을 꿈꾸며 살아야지, 하는 느낌이 강렬합니까? 아니면 인생살이의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기에 바빠서, 또는 세상살이가 지금 너무 재미있어서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으시는지요. 기독교인이 된다는 말은 생명 완성을 삶의 궁극적인 목표로 삼는다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그런 전제가 없으면 굳이 기독교인이 될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서 생명 완성은 우리에게 익숙한 말로 ‘구원’입니다. 일상적인 말로 바꾸면 자유, 해방, 평화, 기쁨, 안식의 충만입니다. 그런 순간을 여러분은 갈망하지 않으십니까? 갈망하지 않는 분은 없을 겁니다. 자기가 치료하는 난치병 환자가 건강을 완전하게 회복하는 순간을 갈망하지 않는 의사가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바울은 주의 날이 도둑같이 온다고 말합니다. 도둑같이 온다는 사실만 생각하면, 앞에서 짚었듯이 두려운 일입니다. 준비할 여유가 없으니까요. 우리의 일상에서 그런 두려움은 어느 정도는 유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매일 아침 개인 승용차로 출근하는 사람은 언제 교통사고가 일어날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게 좋습니다. 그래야 조심하겠지요. 문제는 거기에 강박적으로 매달리는 것입니다. 이를 염려한 바울은 4절에서 반대로 이야기합니다. “그날이 도둑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라.”라고 했습니다. 도대체 무슨 말인가요? 주의 날은 도둑같이 이른다는 겁니까, 그렇지 않다는 겁니까? 죽음이 도둑같이 이른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다는 겁니까? 이 세상이 갑자기 끝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아니라는 말입니까?
어떤 이들에게는 주의 날이 도둑같이 이르는 게 아니라고 할 때의 그 어떤 이들은 어둠에 있지 않은 이들입니다. 이들은 물론 데살로니가 교인을 가리킵니다. 5절은 이렇습니다.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
도둑은 낮에 오지 않습니다. 따라서 낮처럼 살아가는 사람은 도둑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어둠에 속하지 않고 빛에 속한 사람으로 산다는 게 무엇인지가 여기서 중요합니다. 6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깨어 정신을 차리는 사람이 바로 낮과 빛에 속한 이들입니다. 여기서 깨어 정신을 차린다는 말은 예수 재림으로 일어나는 생명 완성을 일상의 중심으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앞에서 데살로니가 교우들이 당면한 어려움은 예수 재림의 지연으로 인해서 기독교 신앙이 흔들리는 사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들에게서 이제 예수 재림은 현실로 받아들여질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보다 이런 부분에서는 우리가 더 안이합니다. 그들은 예수 재림의 지연을 심각하게라도 생각했으나 오늘 우리는 그것에 대한 의식 자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은 점점 더 또렷해지고 조금이라도 손해를 볼까 조바심이 큰데, 예수 재림은 점점 더 막연해집니다. 반비례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 재림을 삶의 중심으로 삼는다는 말은 우리에게 무슨 의미인가요.
우선 생명 완성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뚫어봐야 합니다. 이게 눈에 저절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이를 보려면 일단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실질적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피조물은 창조주와의 결속에 따라서 운명이 결정됩니다. 자기 스스로는 자기 생명을 완성할 수 없습니다. 거꾸로 자기 자신이 자기 생명을 완성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태도를 성경은 죄라고 말합니다. 자기 삶을 자기가 완성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실제로 아는 사람은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정신 차리고 구원자를, 즉 창조주 하나님을 찾습니다. 여기 어느 집에 불이 났다고 합시다. 창문과 현관문이 다 불길에 휩싸였습니다. 자기 스스로는 밖으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밖에서 마이크 소리가 들립니다. 소방대원이 곧 안으로 들어갈 테니, 조금만 참고 기다리세요. 이 사람은 소방대원이 언제 어디로 들어올지 바짝 정신 차리고 살핍니다. 이런 설명이 여전히 멀리 느껴지십니까? 자신이 지금 불난 집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거나, 아예 불난 것을 모르고 잠들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가 피조물이고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사실 앞에 설 때마다 시간의 신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을 고백한 고대 성경 시대의 사람들도 저와 같이 시간의 신비 앞에서 한편으로는 두려워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즐거워했을 겁니다. 시간의 신비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지금은 언제입니까? 2020년 11월15일 주일입니다. 제가, 오늘은 2120년 11월15일이라고 말하면 여러분은 저를 미쳤다고 여기겠지요. 시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기에 그것 자체로 절대적인 게 아닙니다. 어제와 오늘이 분명하게 구분되고, 오늘과 내일이 분명하게 구분되는 게 아닙니다. 지금과 백 년 후는 한순간일 수 있습니다. 앞에서 바울은 주의 강림 앞에서는 먼저 죽어 잠자는 자나 아직 살아있는 자나 차이가 없다고 말했던 것과 같습니다. 만약 백 년이 한순간이라면 우리가 매달려서 사는 일상도 결국은 한순간에 속한다는 말이 됩니다. 한순간이니 무의미하다는 게 아니라 신비롭다는 뜻입니다.
창조주 하나님 안에서 현재와 미래가 한순간이라면 미래에 일어날 예수 재림이 이미 현재에 들어와 있다는 말이 됩니다. 우리의 일상에 예수 재림이, 즉 생명 완성이 이미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약간의 신학적인 사유에서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 즉 종말론적 생명 완성은 '아직 아님'(not yet)이지만 동시에 '이미'(already)라는 성격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 생명 안에서 미래와 현재는 하나라는 뜻입니다. 미래가 은폐의 방식으로 현재에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테니스 예를 들겠습니다. 아니 화가나 음악가의 예를 들까요? 정말 예술 정신으로 화가의 길을 가는 사람에게는 대가의 소질이 이미 초보자 시절에 은폐되어 있습니다. 저의 오늘은 이미 40년 전의 저에게 숨어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 사람이라면 오늘의 일상에 종말의 절대 생명이 은폐되어 있다는 사실을 느낄 것입니다.
오늘은 한국교회가 지키는 추수감사절입니다. 전업으로 농사짓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말을 끌어오지 않더라도 농사야말로 인간 삶에서 가장 핵심적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스마트폰이나 자동차는 없어도 되지만 농산물이 없다면 사람은 생명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저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경제적으로 잘사는 나라가 되기보다는 농사를 잘 짓는 나라가 되었으면 합니다. 우선 농산물의 자급자족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땅이 좁은 나라는 수출로 먹고살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경제적으로 잘살아야겠다는 생각만 접으면 우리나라 땅이 좁아도 자급자족은, 즉 일용할 양식은 충분히 됩니다. 문제는 삶을 경제 논리로만 생각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생명의 깊이가 손상되었습니다. 쌀만 해도 그렇습니다. 어떤 이들은 쌀을 시장에 가서 돈으로 사 올 수 있는 상품으로만 봅니다. 삶을 추상적으로 대하는 태도입니다. 그들에게는 모든 대상이 돈으로 교환되는 대상으로 떨어집니다. 더 나아가서 사람도 상품으로 대하겠지요. 여기 쌀을 전혀 다른 차원에서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벼농사 자체를 직면합니다. 거기서 벌어지는 온갖 조화로운 생명 현상에 황홀감을 느낍니다. 그는 창조 영성에 들어간 것입니다. 깨어서 정신을 차린 사람입니다.
우리가 다시 농경시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다른 소중한 일도 많습니다. 관건은 우리의 일상이 하나님의 절대 생명에 긴밀하게 연결되었다는 사실에 눈을 돌리는 것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거기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런 삶의 태도를 가리켜 재림 신앙, 즉 주의 날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주의 날이 오고 있습니다. 이미 문 앞에 당도했습니다. 졸지만 않는다면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겁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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