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삶, 하나님
(눅 20:27-40), 11월7일, 성령강림절 후 24째 주일
형사취수혼
복음서가 보도하고 있는 예수님의 공생애는 겨우 2-3년 밖에 되지 않지만 그동안에 예수님에게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치병, 축귀, 선포, 가르침 등입니다. 그중의 하나가 진리 논쟁입니다. 바리새인들과의 율법 논쟁은 공생애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는 마지막 순간에도 ‘진리가 무엇이냐?’하는 논쟁을 벌일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이 논쟁에서 이기고 싶어선 그런 것은 물론 아닙니다. 진리가 훼손되는 경우에 시시비비를 따질 수밖에 없었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 사두개인이 등장합니다. 사두개파에 속한 사람입니다. 이들은 부활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들과 대립관계에 있으면서 예수님과의 충돌이 더 잦았던 바리새파 사람들은 부활을 인정했습니다. 사두개인은 예수님에게 부활에 관한 질문을 했습니다. 진리를 알기 위한 순수한 질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입장을 곤란하게 하려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는 일단 신 25:5절에 있는 내용을 꺼내들었습니다. 소위 형사취수혼(兄死娶嫂婚 Levirate)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독특한 제도입니다. 그것이 실제로 유대 사회에서 얼마나 분명하게 실행되었는지는 정확한 정보가 없습니다. 부분적으로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요. 한 여자가 결혼해서 살다가 아이를 낳지 않은 상태에서 남편이 죽으면 다른 남자와 재혼하지 말고 남편의 형제들과 결혼하는 제도입니다. 사두개인은 모세의 법을 근거로 아주 특별한 경우를 예로 들었습니다. 일곱 형제가 모두 모두 한 여자와 부부로 살다가 죽었고, 여자도 죽었습니다. 부활 때에 이 여자가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인지를 물었습니다. 이런 경우는 실제로는 벌어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부활이 없다는 주장을 하고 싶어서 이렇게 짓궂은 질문을 한 것입니다. 절대적인 하나님 나라를 세상의 기준으로 끌어내려 질문한 것입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런 차원의 질문은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비슷하게 나옵니다. 여러분이 주변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을 겁니다. 하늘나라에 가면 상급의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금면류관을 쓰고, 어떤 사람은 개털모자를 쓴다는 겁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을 위해 충성을 많이 한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좋은 집에 거하게 되고, 인색했던 사람은 초라한 집에 거한다고 합니다. 이런 선정적인 주장을 실제로 믿는 사람들이 있을까요? 아마 있을 겁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믿어지지 않아도 믿고 싶을 겁니다. 죽어서 뭔가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굳이 살아 있을 때 신앙생활을 진지하게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겠지요. 우리에게서 신앙생활이 일종의 주식투자나 보험가입처럼 간주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일곱 명의 남자와 살았던 여자가 부활 후에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 하는 사두개인의 질문과 하늘나라에서 보상에 차이가 있다는 주장은 똑같이 무의미한 이야기입니다. 하늘나라를 세상의 삶이 단순히 연장되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새로운 존재로의 변화
어리석은 질문이었지만 예수님은 사두개인에게 정확하게 대답하십니다. 부활의 세계, 즉 하늘나라에는 장가가거나 시집가는 일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눅 20:36) 결혼하고 자식을 낳는 일은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인간 삶의 중심입니다. 우리의 모든 일들은 그것을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돈을 버는 목적도 좋은 사람과 결혼해서 낳은 자식을 잘 키우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런 방식으로 생명을 경험하고 삽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는 그런 삶이 작동되지 않습니다. 남녀의 성 구별도 없어지겠지요. 이건 최소한의 논리로 생각해도 옳은 이야기입니다. 하늘나라에 가서 내 아내, 내 남편, 내 자식, 내 부모의 관계가 연속된다면 곤란한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런 나라는 절대적인 나라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늘나라에서 우리는 모두 천사와 동등하게 됩니다. 천사에게 형이 있고, 동생이 있는 게 아닙니다. 목사가 있고, 평신도가 따로 나뉘지 않습니다. 대통령이 따로 있고, 노숙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모두가 새로운 존재(new Being)로 변화됩니다. 그런 존재로 변화되는 것이 바로 부활의 자녀가 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삶을 재미없다고 생각할 겁니다. 다른 사람보다 잘난 것을, 또는 자식이 잘난 것을 자랑도 하고, 경쟁에서 이기는 맛도 봐야 살맛이 난다고 말입니다. 돈 버는 재미가 없이는 견뎌내기 힘들지도 모릅니다. 가족끼리만 통하는 진한 감정 없이 영원하게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겠지요. 학생들도 친구보다 시험점수도 높게 받고 친구보다 더 좋은 대학교에 들어가는 기분을 포기하고 싶지 않겠지요. 그런 삶의 에너지가 문명발전의 토대가 되었다는 사실을 마르쿠제는 <문명과 에로스>에서 설파했습니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이 작동되는 이치입니다.
지난 10월7일 스웨덴 한림원은 페루 출신 소설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74세)를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해서 발표했습니다. 우리나라의 고은 시인도 지난 수년 동안 강력한 후보로 알려졌었는데, 이번에도 고배를 마셨습니다. 아마 번역 문제가 가장 큰 걸림돌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일본은 이번에도 두 명이 화학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노벨상 시즌이 올 때마다 후보에 올라간 이들만이 아니라 그들 나라의 국민들이 모두 큰 기대를 품고 발표 순간을 기다립니다. 이런 것이 우리의 문명을 끌어가는 에너지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런 선의의 경쟁마저 없는, 천사들이 모인 것과 같은 세상을 우리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영화 한편을 소개해도 되겠지요? 1998년도에 집사람과 함께 <시티 오브 엔젤스>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원래는 <베를린의 천사들>이라는 제목으로 만들어진 영화를 리매이크 한 영화라고 합니다. 천사 남자와 여의사 사이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남자천사인 세스 역할을 한 배우는 니콜라스 케이지이고, 여의사 메기 역할을 한 배우는 맥 라이언입니다. 세스는 천사의 능력을 포기하고 보통 사람이 되어 메기와 여행을 떠납니다. 메기가 사고로 죽습니다. 세스는 비록 사랑하는 여자가 죽어서 혼자 남게 되었지만 사람으로 살게 된 것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모든 삶이 천사의 능력보다 더 좋다는 말을 합니다. 감독이 말하고 싶은 것이 바로 그것이겠지요. 기쁨과 슬픔을 포함한 인간의 모든 애절하고 달콤한 삶이 다 귀한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하늘나라에는 장가와 시집이 없고 모두 천사와 같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 세상의 구체적인 삶을 평가절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삶과 저 세상의 삶을 같은 차원에서 비교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철이 들기 전의 어린아이의 삶과 어른의 삶을 단순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어린아이는 어린아이의 삶이 있고 어른은 어른의 삶이 있습니다. 어른이 되면 소꿉놀이를 더 이상 하지 않고 군것질을 즐기지도 않습니다. 어른과 아이는 서로 다르게 삶을 경험합니다. 아이들이 어른들의 삶을 보고 재미없을 거라고 생각하면 어리석은 일입니다. 어른들의 삶도 따지고 보면 가지각색입니다. 형태만 달랐지 기본적으로는 아이들의 소꿉놀이에 매여 있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들의 눈에 수도원 생활은 재미가 없을 겁니다. 노력한 것만큼 보상이 주어지는 원리가 아니라 순전히 기도와 노동만으로 살아가는 것이 맹탕처럼 보일 겁니다.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거기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세속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들의 삶을 우리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늘나라에서는 결혼을 하지 않고 마치 천사와 같다는 말은 그곳에서의 삶이 지금 여기서의 삶과 질적으로 차원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형사취수혼을 근거로 일곱 명의 남자와 결혼한 여자의 운명에 대한 사두개인의 질문이 왜 잘못인지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의 생명 형식으로 저 세상의 생명까지 재단한 것입니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왜 어른들은 소꿉놀이를 하지 않느냐고 따지는 것과 같습니다.
죽음도 삶이다
사두개인의 질문은 형사취수혼 자체가 아니라 부활이 없다는 사실을 내세우려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이런 의도를 피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사두개인들과 마찬가지로 모세의 권위로 대답하셨습니다. 가시나무 떨기 전승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가리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출 3:6)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여전히 하나님 안에서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말이 안 돼 보입니다. 이미 오래 전에 죽은 사람들인데, 살아 있다니요. 도대체 죽었다는 것은 무엇이고, 살았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눅 20:38절이 이런 사태를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여기에 두 문장이 나옵니다. 똑같은 뜻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이라는 문장입니다. 하나님께 연결되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이미 세상에서 죽었는데 여전히 살아있다면 그가 부활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여기서 관건은 우리가 하나님과 어떻게 연결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 대답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과 연결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런 사람은 비록 세상에서 죽더라도 살아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모든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독특한 표현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살아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얻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생명 자체입니다. 생명의 근원입니다. 생명의 출처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죽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기만 하면 그가 어떤 실존에 처하든지 살아있습니다. 그것이 부활생명입니다.
지금까지의 설명을 상투적인 것으로 듣기 쉽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부활생명을 얻는다는 가르침이라고 말입니다. 너무 자주 들었기 때문에 별 다른 감동으로 와 닿지도 않습니다. 정말 그런가요? 그렇다면 안타까운 일입니다. 다시 그 말씀에 마음을 열어보십시오.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가요? 이 말씀이 놀랍게 와 닿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여전히 사두개인들의 생각에 머물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두개인들에게는 장가가고 시집가는 것이 살아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삶의 내용이 없으면 죽은 것이었습니다. 나름으로 일리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죽음은 모든 생명과의 단절입니다. 이건 상식입니다. 우리의 실존입니다. 아무도 여기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다시 하나님에게 모든 사람이 살았다는 말씀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에게는 죽음도 삶입니다.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생명입니다. 다시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이 사실이 여전히 놀랍지 않습니까? 이 놀라운 사실에 영혼이 공명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부활의 자녀들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실을 깨달아 믿고 사는 사람들은 이제 세계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됩니다. 기존의 틀에 묶이지 않습니다. 사람이 좀더 편리하게 살기 위해서 자연을 무리하게 파손하지 않습니다. 장가가고 시집가는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단정하지 않습니다. 혼자 사는 사람들을 별종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동성애자들을 죄인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경쟁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을 소외시키지 않습니다. 가난한 나라를 우습게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하늘나라의 시각으로 살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제가 지금 말로는 이렇게 설교하지만 이런 영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보고 살아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순식간에 이 세상이 말하는 죽음과 삶의 틀에 길들여집니다. 신앙의 길에서 시행착오가 반복됩니다. 그럴 때마다 다시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의 길을 가십시오.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것이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분 안에서 우리의 죽음도 역시 생명입니다.
0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