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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죽임과 살림 (행 5:27-32)

죽임과 살림

사도행전 5:27-32, 부활절 제2주, 4월7일

 

27 그들을 끌어다가 공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물어 28 이르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29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30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31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32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기독교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예수님이 직접 창설하지 않은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없이 기독교도 없습니다. 그 중간에 다리 역할을 한 사람들이 사도들입니다. 사도들의 예수 경험이 기독교의 초석입니다. 그 사도들의 예수 경험이 교회 공동체의 삶에서 자리를 잡았고, 그것이 교회 안에서 문서로 기록되었습니다. 여러 문서들 중에서 오랜 시간 검증을 거쳐 권위를 인정받은 것이 신약성서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이 포함된 사도행전도 그중의 하나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사도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경험했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재판받는 사도들

사도행전 5:17절에 따르면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이 마음에 시기가 가득해서 사도들을 체포해 옥에 가두었다고 합니다. 그들이 사도들을 시기한 이유는 사도들로 인해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주의 사자가 한밤중에 나타나서 옥에 갇힌 사도들을 구출해냈다고 합니다. 본문이 가리키는 주의 사자는 아마 사도들에게 호감을 보이던 관료나 그 지역에서 나름대로 힘을 행사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겠지요. 감옥에서 나온 사도들은 피신하지 않고 다시 성전으로 가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우여곡절 끝에 예루살렘 종교지도자들은 정식으로 공회를 소집했습니다. 공회는 당시 유대사회의 최고 법정이었습니다. 종교재판을 연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사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다그쳤습니다.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행 5:28) 여기서 ‘이 이름’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의 피’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입니다. 대제사장의 이 질술은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의 곤혹스러운 입장을 대변합니다.


공회 의원들은 유대교와 유대인들을 명실상부 대표하는 사람들입니다. 지성인들이고 경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도 사리분별의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라서 예수가 무고하게 십자가에 처형당했다는 사실을 이심전심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일에 자신들이 연루된 겁니다. 상황이 난처하게 되었습니다. 그 전후 사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유대교 지도자들이 처음부터 예수님을 적대적으로 대하진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회당 출입도 초창기에는 자유로웠습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율법과 성전을 비판하면서부터 벌어졌습니다. 사람들의 병을 고친다거나 귀신을 쫓아내거나 종교적 교훈을 가르치는 것은 어느 정도 용납할 수 있었지만 율법과 성전 비판만은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결국 예수님을 종교재판에 회부했습니다. 어떤 죄목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증거도 없었습니다. 다만 헛소문만 나돌았습니다. 말꼬리를 잡아 신성 모독죄를 선고했습니다. 당시는 로마가 유대를 통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종교적인 죄목으로 사람을 죽일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사회소요죄로 예수님을 로마 법정에 고발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신성모독과 사회소요라는 죄목으로 십자가 처형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은 사이비 교주도 아니고 사회 혁명가도 아니었습니다. 종교권력과 정치권력을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선지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직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습니다. 유대 공회를 예수를 마녀 사냥 하듯 무고하게 죽였습니다. 예수를 제거하면 모든 일이 조용해질 것으로 예상했지만, 유대교 지도자들의 예상은 빗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를 믿으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사도들입니다. 사도들을 감옥에 넣기도 했지만, 사도들은 계속해서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를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공회 의원들은 사도들이 작심하고 예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자신들에게 돌리려고 음모를 꾸미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종교재판을 다시 열고 지금 그 책임을 묻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공회에서 대답합니다. 이 대답은 베드로나 사도들에게만이 아니라 초기 기독교 전체에 해당됩니다. 이 대답에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신앙이 담겨 있습니다.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행 5:30). 예수의 십자가 처형에 대한 책임을 왜 자신들에게 돌리려고 하느냐, 괘씸하다고 공격하는 공회 의원들에게, 요즘 어투로 ‘돌직구’를 날린 겁니다. 당신들이 예수를 죽인 거 맞지 않느냐, 하고 말입니다. 이런 말을 듣고 공회 의원들의 마음이 뜨끔했을까? 각자가 다를 것이며, 속으로는 그랬을 겁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대다수가 크게 화를 냈습니다. 사도들을 제거하려고까지 했습니다(행 5:33). 다행히 가말리엘이라는 율법 선생이 중간에 나서서 사도들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살리시는 하나님

교회 공동체는 지금 사도들이 전하는 그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사람이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 사건이 그것입니다. 사람은 죽이고, 하나님은 살리셨습니다. 이런 표현을 상투적인 것으로 듣지 마십시오. 죽임은 바로 형제를 살해한 가인에서 볼 수 있듯이 인류의 역사입니다. 오늘 우리가 어떻게 죽임의 역사와 죽임의 문화에 휩싸여 있는지는 긴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명백합니다. 21세기 최고 문명의 시대에도 전쟁이 그치지 않습니다. 한반도에도 지금 전쟁이 기운이 감돌고 있습니다. 북한과 미국이 힘겨루기를 하고 있습니다. 만에 하나, 국지전이라 하더라도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면 대한민국이 가장 큰 손해를 보는 겁니다. 북한이야 원래 못사는 나라이니 망해도 그럭저럭 버틸 수 있겠지만 우리는 수출로 잘살게 된 나라이니 전쟁이 나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갑니다. 남의 나라에 전쟁이 터져야 돈을 버는 기업들도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미국의 군수산업체겠지요. 이 상황을 남한 정부가 지혜롭게, 그리고 적극적으로 풀어가야 합니다.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소위 선진국이라는 나라에서도 크고 작은 폭력과 살인은 그치지 않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도 폭력적으로 나타나는 것들은 모든 사람들이 그 문제의 심각성을 알기 때문에 오히려 덜 위험합니다. 실제로 위험한 것은 선의의 악입니다. 합법적인 악입니다. 그런 것들은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회과학적인 문제라서 제가 자세하게 언급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 증상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총체적으로 경쟁 만능의 구조로 빠져들었습니다. 기업들은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 비정규직을 이용합니다. 대학도 취업률을 높여 정부 지원을 많이 받아내기 위해서 거짓 자료를 만듭니다. 병원도 영리를 목적으로 사람의 목숨을 수단으로 다룹니다. 과잉진료가 일상이 되었습니다. 개개인이 모두 악하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게 아닙니다. 사회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피리소리에 홀려 어린아이들이 모두 산속으로 끌려갔다는 동화에 나오는 것처럼 모두 우리는 직간접으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의 십자가 처형에 연루된 예루살렘 사람들과 같은 길을 가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을 생각하면 우리의 삶은 정말 절망적입니다.


보십시오. 사도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달았다는 사실에 대한 책임을 물으려는 게 아닙니다. 십자가 처형은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가 없는 인류의 숙명입니다. 서로 노력하면 조금 좋아질 수는 있으나 근본적인 해결책은 없습니다. 사도들은 죽임의 역사보다 살림의 역사에 주목합니다. 유대의 종교권력과 로마의 정치권력이, 그리고 거기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수많은 사람들이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사실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보라는 외침입니다. 그것으로 인류 역사는 궁극적으로 죽임에서 살림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이 엄청난 사실이 가슴에 와 닿지 않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또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당장 학점을 따고 스펙을 쌓아야 하고, 취업과 결혼과 사업이 발등의 불이고,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예수 부활이라니, 남의 말처럼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솔직한 생각입니다. 그러나 더 솔직하게 말해볼까요? 여러분들이 인생에서 성취해야 할 바쁜 일이 다 끝났다고 합시다. 기를 쓰고 노력해서 많은 걸 성취했다고 합시다. 대한민국에서 1% 안에 드는 사람이 되었다고 합시다. 그 다음은 뭡니까? 전쟁에 나서기 전에 지혜를 얻기 위해서 디오게네스는 찾아온 알렉산더 대왕에게 디오게네스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세계를 정복한 다음에 뭘 원합니까? 알렉산더의 대답입니다. 평화롭게 인생을 즐기지요. 다시 디오게네스의 대답입니다. 세계를 정복하기 위해 그렇게 수고하지 않아도 지금 얼마든지 평화롭게 인생을 즐길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크고 작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지 세계를 정복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 다음은 무엇입니까? 행복하게 살고 싶은 거지요? 이미 행복한 삶이 여기에 있는데 왜 다른 일로 수고를 하십니까? 그 행복한 삶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살리셨다는 사실을 아는 데서 시작됩니다. 사도들에게는 그것이 너무나 확실한 것이기에 종교재판을 받으면서도 입을 다물 수가 없었습니다.

 

부활과 죄 사함

오늘 본문은 친절하게도 예수 부활의 의미를 본문 31절에서 좀더 풀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이 문장을 줄이면, 부활의 주님으로 인해서 죄 사함을 얻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죄 사함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탕자의 비유>가 이를 적절하게 설명해줍니다. 집 나갔던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와서 다시 아들로 인정받았습니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죄 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여기서 죄는 단순히 윤리 도덕적인 차원이 아니라 훨씬 근원적인 차원입니다. 탕자의 잘못은 부도덕하게 살았다는 데에 있는 게 아니라 아버지의 집을 떠났다는 데에 있습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단절입니다. 즉 생명과의 단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세월과 더불어서 늙고 죽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죽음의 존재론적 능력을 분쇄했습니다. 우리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로워졌습니다. 이것이 곧 죄 사함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으로 우리는 생명의 세계로 들어갔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우리에게 생명을 줄 뿐만 아니라 거짓 생명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게 합니다. 그런 분별력이 바로 회개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지 못하는 것에 매달리던 삶으로부터 돌아서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사도는 회개와 죄 사함을 함께 언급했습니다. 여기서 거짓 생명이 무엇일까요? 그것을 알아야 회개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더 나가서 무엇이 참된 생명이고 거짓 생명입니까? 그걸 구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게 드러나는 게 아니기도 하고, 그게 우리 삶에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만 보면 비슷해 보입니다. 이는 성령과 악령에게 나타나는 능력이 비슷한 것과 같습니다. 영분별이 은사인 것처럼, 참된 생명과 거짓 생명을 분별하는 것도 기본적으로는 은사입니다.


거짓 생명은 추하게 보이는 게 아니라 오히려 멋지고 세련되어 보입니다. 뭔가 있어 보입니다. 지금 공회에서 종교재판을 받고 있는 사도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율법이 그것입니다. 율법은 정말 생명을 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의 부활 이전까지만 옳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태양이 나오기 전의 손전등에 불과합니다. 예수 부활 이후에 그것은 빛을 잃었습니다. 그 한계가 여실하게 드러났습니다. 율법의 한계에 대해서는 바울이 로마서에서 정확하게 지적했습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할 뿐이지 죄를 극복하게 하지는 못한다고 말입니다. 사람이 율법을 완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이기심에서,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걸 해결해보려는 노력으로는 사람이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런 노력을 많이 할수록 자기에 대해 점점 더 절망하거나, 거꾸로 교만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 부활에서 생명을 경험한 사도들의 후예들입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이 그 부활의 증인들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부활 공동체입니다. 예수 부활이 사람과 세상을 참되게 살린다는 사실을 믿고 희망하고 전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여러분 자신에게 질문해보십시오. 실제로 그 사실을 믿고 있습니까? 우리 교회는 부활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을 확보하려고 영적인 수고를 아끼지 않고 있습니까? 예수의 부활 생명이 여러분 개인과 우리 교회 전체를 점점 충만하게 채워간다고 느끼십니까? 하나님께서 부활의 예수를 통해서 이 세상을 어떻게 살리셨는지, 그리고 지금도 살리시는 눈여겨보십시오. 거기에 전념하십시오.

사도행전 5:2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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