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임 당한 어린 양
계 5:11-14, 부활절 셋째 주일, 2016년 4월10일
11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12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13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14 네 생물이 이르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
오늘 설교 본문인 제3 독서는 요한계시록 5:11-14절입니다. 이상한 단어들이 나옵니다. 보좌, 생물들, 천사의 음성,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 등등입니다. 이런 단어들이 가리키는 존재들이 하늘에 모여 있는 걸 보았다고 합니다. 현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광경들입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이런 이상한 단어와 순자와 광경들이 많이 나옵니다. 5장1절 이하에서 예를 몇 개 더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들린 두루마리, 일곱 인, 보좌와 네 생물, 그 사이의 한 어린 양, 일곱 뿔, 일곱 눈, 거문고와 금 대접 등등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 두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하나는 성경은 정말 신비로운 세계를 말하는 거라는 생각이고, 다른 하나는 성경은 우리의 현실과는 아무 상관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은 현실 역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극단적인 상징 언어를 많이 사용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시기는 1세기 말, 그러니까 기원후 90년 어간입니다. 당시는 로마 제국이 지중 연안의 지역을 지배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특히 도미티안 황제(81-96년)는 여러 식민지에서 황제숭배를 강요하기 시작했습니다. 황제숭배는 로마 제국의 통치 이념이었습니다. 피식민지 나라를 황제숭배라는 이념으로 묶으려고 했습니다. 당시 로마 제국 안에 있던 여러 종교는 이런 황제숭배와 적절한 선에서 타협했지만 유대교와 기독교만은 적극적으로 투쟁했습니다. 왜냐하면 황제숭배가 하나님 신앙과 대립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구약시대에 바알숭배와 투쟁한 예언자들의 태도와 비슷합니다. 황제숭배가 초기 기독교의 중심지인 소아시아 지역에서 때로는 노골적으로, 때로는 암시적으로 강요되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황제숭배를 서약하지 않거나 관공서에 설치된 황제 상에 절하지 않는 사람은 공무원이 될 수 없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 기독교인들이 순교도 당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생존의 위협을 감수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어려움에 빠진 기독교인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요한계시록이 기록되었습니다. 이런 글이 교회 밖에 알려지면 어려움이 더 커질 거를 염려해서 비밀스러운 단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간첩의 암호문과 같습니다. 암호문을 이해하려면 암호를 풀어야 하는 것처럼 오늘 설교 본문인 계 5:11-14절도 역시 풀어야 합니다.
영광과 찬송
비록 상징적인 표현이 많이 나온다고 해도 본문이 전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는 대략 알 수 있습니다. 하늘에 많은 이들이 모여서 찬송을 부르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마치 성가대의 찬양과 같습니다. 그것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한번은 11, 12절입니다. 보좌를 둘러싼 많은 이들이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다른 한번은 13, 24절입니다. 하늘과 땅과 지하와 바다 가운데 있는 모든 피조물들이 다음과 같이 외쳤다고 합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어린 양에게 영광과 찬송을 돌리라는 합창이자 외침입니다. 영광과 찬송이 무엇을 가리킬까요? 우리도 매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드린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에 따라서 이런 예배를 통해서 특별한 영적인 감동을 받는 사람도 있지만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감동을 받는다고 해서 그것이 다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린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형식적으로는 하나님을 예배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일단 우리는 영광과 찬송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살펴보는 게 좋습니다.
우선 정답을 말씀드리면, 영광과 찬송은 지극한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는 삶의 태도입니다. 지극한 마음은 그 어떤 사사로운 게 들어가지 않는 순전한 마음입니다. 이게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도 사사로운 게 자주 들어갑니다. 제가 고등학교 시절 신앙생활을 할 때 이야기입니다. 교회 대항 배구시합이 정기적으로 열렸습니다. 그때 모여서 기도하고 연습도 하고 시합에도 참가합니다. 이기게 해달라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런 건 웃고 지나가면 되는 일이지만, 정말 심각한 경우도 많습니다. 교회에서 다툼이 벌어지면 신자들의 생각이 복잡해집니다. 심지어는 서로 패를 나눠서 한쪽은 본당에서 예배를 드리고, 다른 한쪽은 교육관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서로를 향해서 적개심을 품으면서 영광과 찬송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주장합니다. 정상적인 예배를 드리면서도 집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딴 생각으로 빠져듭니다. 예배만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사사로운 것에 너무 치우칩니다. 매 순간 이해타산에 예민해집니다. 영광과 찬송과는 거리가 멉니다. 왜 우리는 사사로운 관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요?
가장 핵심적인 대답은 하나님 경험이 없거나 크게 부족하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아무리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려고 해봐야 잘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경험은 누미노제, 즉 거룩한 두려움으로 나타납니다. 모세는 호렙산에서 불붙은 떨기나무 현상으로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신을 벗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사야는 성전에서 천사들의 노랫소리 현상으로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자기의 입술이 부정하다는 고백을 했습니다. 어거스틴,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마틴 루터, 칼 바르트 같은 사람들도 다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절대적인 존재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인간의 말도 필요 없는 절대에 대한 경험입니다.
이런 경험이 어떤 건지를 저는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설명하겠습니다.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밤하늘입니다. 일부러라도 밤하늘을 자주 보십시오. 저는 어렸을 때 늘 밤하늘을 보고 살았습니다. 은하수를 보면서 아득한 느낌에 빠졌던 어렸을 때의 그런 장면이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다행스럽게 저는 요즘도 매일 밤하늘을 볼 수 있는 마을에서 살고 있습니다. 육십 대 중반이 된 지금도 밤하늘을 볼 때마다 아득한 어떤 것을 경험합니다. 다른 하나는 꽃입니다. 특히 봄꽃을 보십시오. 매화, 벚꽃, 복숭아꽃, 앵두나무꽃, 그리고 개나리 등이 우리 집 마당에서 순서에 따라서 꽃을 피웠습니다. 그러려니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니겠지만 선입견을 버리고 보면 신비롭기 그지없습니다. 저는 지구를 처음 방문한 외계인의 눈으로 이런 꽃을 보곤 합니다. 도대체 딱딱한 나무줄기 안에서 지난겨울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렇게 화사한 꽃망울과 꽃잎들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는지, 그걸 생각할 때마다 아득한 어떤 것을 느낍니다. 인간이 처리할 수 없는 절대적인 능력과 비밀을 만날 때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절대적인 능력과 세계 비밀로서의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의 하나는 자기에 대한 관심이 점점 줄어든다는 겁니다. 궁극적으로 자기 소멸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 연민과 번민과 걱정에 빠지게 하는 모든 사사로운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우리의 걱정이라는 것이 대개는 자신에 관한 것들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돈과 건강에 관한 것들입니다. 체면과 명예에 관한 것들입니다. 만약 한 시간 후에 지구의 중력이 해체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지금까지 우리가 신경을 쓰던 모든 것들이 무의미해질 겁니다. 누가 더 예쁜지, 누가 더 돈을 잘 버는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이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는 영적 경지를 가리켜서 성경은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린 양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절대적인 존재로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향해서 기꺼이 영광을 찬송을 바쳤습니다. 그런 신앙이 오늘 본문에는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이라는 암호에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어린 양으로 표현한 것은 물론 문학적인 메타포입니다. 어린 양은 고대 이스라엘의 제사의식과 연결됩니다. 어린 양을 제물로 바침으로써 죄가 용서받는다는 의미입니다. 특히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이라는 표현은 유월절 의식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이 올 때마다 집에서 어린 양을 잡았습니다. 그것은 출애굽 당시에 행해진 종교 의식을 반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출애굽 당시에 유대인들은 양을 잡아 그 양의 피를 대문 기둥에 발랐습니다. 그 피 흔적으로 죽음의 천사가 유대인 집을 지나치고, 그 흔적이 없는 이집트인들 집만 들어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유월절 양의 피는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합니다.
본문에서 어린 양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의 죽음이 인류 구원의 길이라는 겁니다. 이게 말이 될까요? 예수님이 인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사실을 들어서 그런가 보다 하지만 실감이 가지 않을 겁니다. 노골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은 삼십대 초반의 나이로 로마제국에서 볼 때 반역자에게 선고될 수 있는 십자가형으로 죽었습니다. 이 사건이 어떻게 인류 구원과 직접 관계된다는 겁니까? 요한계시록 기자가 무엇을 근거로 예수 그리스도가 어린 양이라고 말한 것일까요? 그 깊이를 알지 못한 채 무조건 예수를 죽임당한 어린 양이라고 주장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희화화 하는 겁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처음부터 예수님의 죽음을 인류 구원의 길이라고 믿은 게 아닙니다.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그야말로 모든 사람들이 피하고 싶은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런 죽음이 임박했다고 말씀하실 때 옆에서 뜯어 말렸습니다. 의로웠던 사람,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던 사람, 나사렛 목수의 아들 예수님이 십자가형으로 죽다는 사실을 제자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형이 실제로 집행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뭔가 뜻있는 일을 하려고 출가도 마다하지 않았던 제자들은 모두 낙심하여 자기 일터로 돌아갔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도 세례 요한의 그것과 함께 역사에 잠간 등장했다가 세상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놀라운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를 생생하게 살아있는 실체로 만나는 경험을 시작했습니다. 분명히 죽어 무덤에 묻혔던 바로 그 예수를 자신들과 함께 하는 생명의 실체로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이런 경험이 무엇인지를 깊이 숙고했습니다. 그리움과 한에 사무쳐 꿈을 꾼 것일까요? 헛것을 본 것일까요? 집단적 무의식의 발현일까요? 제자들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이라고, 즉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시킨 것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것 외에는 자신들의 경험을 설명할 길이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험한 후에야 비로소 십자가 사건이 이해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인류 구원을 위해서 제물로 바쳐진 어린 양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도 죽임 당한 어린 양에게 영광과 찬송을 돌린다고 노래했습니다.
의와 생명으로!
어린 양이라는 암호가 가리키는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그를 믿는 자는 죄와 죽음의 운명으로부터 의와 생명의 운명으로 옮겨졌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죄와 죽음의 운명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쓰지만 그게 안 됩니다. 애를 쓰면 쓸수록 두 가지 극단에 떨어질 뿐입니다. 하나는 자기 욕망에 무조건 매달린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절망의 늪에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현대인의 삶은 욕망과 절망을 그 특징으로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정치인들도 그걸 자극합니다. 기업인들도 대중들의 욕망과 절망을 이용합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욕망과 절망 사이를 오가면서 살아갑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흡족하지가 않습니다. 의와 생명과는 거리가 먼 삶입니다. 성경은 전혀 새로운 길을 제시합니다.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와 죽음에서 벗어나 의와 생명을 얻는다고 말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런 성경의 가르침을 옳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도 그런 믿음으로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영광과 찬송을 돌리고 있습니다.
죄와 죽음에서 의와 생명으로 삶의 중심이 옮겨졌다고 하는데도 자신은 여전히 욕망과 절망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한 거 같아서 속으로 걱정이 되나요? 믿음이 있는 건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여기에 계실 겁니다. 다음을 기억하십시오. 의와 생명은, 즉 구원은 은총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은총은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선물을 받아보셨나요? 속된 표현으로 ‘돼지 앞의 진주’라는 말이 있습니다. 선물을 몰라보면 선물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의와 생명은 그걸 누릴 수 있는 사람에게만 실제로 주어집니다. 여러분이 의와 생명을 알아보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면 의와 생명이 여러분과 아무 상관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들을 뒤 있는 사람’이라는 단서를 붙이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의와 생명을 선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걸 단순히 머리로 아는 데에 머물지 않고 실제로 의와 생명을 삶의 중심으로 삼고 살아갑니다. 그건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의와 생명이 최고의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의는 이 세상에서 무엇을 성취해야 한다는 부담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며, 생명은 죽음, 즉 자기 소멸이라는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이게 실제로 가능할까요? 여러분이 정말 사랑하고 존경하고 영혼의 일치를 느끼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아내나 남편일 수도 있고, 자식이나 부모일 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있습니다. 그가 불치병에 걸렸습니다. 그 사람이 숨을 거둘 때까지 옆에 붙어서 간호할 수만 있다면 여러분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겁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아야 한다는 부담감을, 착하다는 말을 들어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끼지 않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즉 죽임을 당한 어린 양으로 경험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와 동일한 운명에 떨어지는 걸 가장 큰 기쁨으로 여깁니다. 그 운명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그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사는 겁니다. 이 사실을 말로만이 아니라 존재 전체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자기 안과 밖에서 주어지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이런 신앙 경험에 근거해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사람은 죽임을 당한 어린 양에게 영광과 찬송을 돌린다고 외쳤습니다. 저는 설교자로서 여러분에게 이런 경험이 일어나기를 바라며, 날이 갈수록 이런 경험이 더 깊어지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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