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3일 예배영상 https://www.youtube.com/live/5IhB3F6le1w?si=JGW1CB-pkDJBlh7_
▣ 들어가는 말
- 잔혹한 대지여, 왜 너는 열리지 않는가!
“아버지, 저희를 잡수시는 것이 우리에게 덜 고통스럽겠습니다. 이 비참한 육신을 입혀 주셨으니, 이제는 벗겨 주십시오. 나는 말을 잃었고, 말 대신 눈물이 대답했다. 그날과 다음날, 우리는 모두 잠잠했다. 아, 잔혹한 대지여, 왜 너는 열리지 않았는가!”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우골리노 백작의 말입니다. 배신자들이 처벌을 받는 9층 지옥에서 단테는 끔찍한 장면을 목격하지요. 한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의 머리를 뜯어 먹고 있습니다. 그가 바로 우골리노 백작입니다. 우골리노는 13세기 피사(Pisa)의 유력 귀족이자 정치가였습니다. 당시 피사는 내부 정치 투쟁과 겔프파(교황파)와 기벨린파(황제파)의 대립으로 혼란스러웠습니다. 우골리노는 정치적 음모와 배신을 통해 권력을 얻으려 했고, 피사의 주교 루제로와 동맹을 맺었다가 나중에는 배신당했습니다. 루제로는 우골리노를 반역자로 몰아 그와 그의 아들, 손자들을 피사의 ‘탑(기아의 탑)’에 감금했고, 이들은 결국 굶어 죽었습니다. 읽어드린 대사는 탑에 갇혀 굶주림에 죽어가는 자식들을 보며 우골리노 백작이 뱉은 말입니다. 이후 우골리노와 루제로 주교는 지옥에서 만나게 되고, 우골리노가 루제로의 머리를 뜯어 먹는 장면이 연출이 되는 것이지요.
- 천국과 지옥, 장소인가 상태인가?
언제 어떻게 지옥이라는 개념이 생겨났는지 잘 모르겠지만, 나쁜 놈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왜 이런 지옥의 개념이 등장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오랫동안 우리는 이러한 천국과 지옥의 개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슬픔도 고통도 눈물도 없는, 황금길이 깔린 천국.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이 타오르는 지옥. 이것이 우리가 들어왔던 천국과 지옥의 이미지이지요. 천국과 지옥을 생각할 때, 우리는 흔히 그것을 죽음 이후에 가게 되는 어떤 장소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천국과 지옥을 단순히 공간적 장소로 그리지 않습니다. 성경과 문학이 전하는 메시지를 깊이 살펴보면, 천국과 지옥은 단지 사후에 펼쳐지는 어떤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존재의 상태, 삶의 질을 가리키는 개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 말씀합니다. 예수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죽음 이후의 세계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시작되는 하나님의 통치, 다스림입니다. 따라서 지옥 역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될 때 우리 안에서 시작되는 영적 황폐함입니다.
단테는 『신곡』 지옥 편(Inferno)에서 지옥문에 이런 문구를 새겨 놓습니다. “여기 들어오는 자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 지옥의 핵심적 개념은 신의 부재, 즉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입니다. 하나님 없는 삶은 희망이 없는 삶이며, 깊은 절망의 어둠 속에 스스로 가두는 삶입니다. 지옥은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이 없는 상태, 삶에서 희망을 잃어버린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요. 도스토옙스키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대심문관’ 장면에서, 인간이 자유와 사랑 대신 안락함과 권위에 기대는 순간, 그 마음속에 이미 지옥 같은 속박이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도스토옙스키 또한 삶에서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것과 그것을 잃어버릴 때의 참담함을 꿰뚫어 보았던 것이지요. 오늘은 성경과 문학 등을 통해, 천국과 지옥이 무엇인지 살펴보려 합니다.
▣ 성경이 말하는 지옥
- 구약 : 스올
흥미로운 사실은 구약에는 사후의 형벌과 상급이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초점이 현재적 삶에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알고 있는 ‘지옥’이라는 표현은 구약성경에서 ‘스올’이라는 단어를 번역한 것인데, 죽으면 누구나 ‘스올’로 간다는 것이 고대 이스라엘의 사상이었습니다. 이 스올이라는 표현은 창세기 37장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야곱이 애통해하는 장면에 처음 등장합니다. “그의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이르되 ‘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하고.” 스올이 악인이 형벌을 받는 곳이라면, 야곱이 요셉을 만나기 위해 스올로 가겠다는 표현은 하지 않았을 테지요. 구약에서 ‘스올’은 의인과 악인 할 것 없이 모든 죽은 사람이 가는 곳입니다. 악인이 형벌을 받는 곳이라는 의미는 없습니다.
이 스올에 대한 이해가 달라진 데에는 번역의 문제가 있습니다. 구약의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처음 번역한 사람들은 스올을 ‘하데스’로 옮겼는데, 그리스 신화에서 하데스는 죽은 자들을 관장하는 신의 이름이자 그가 다스리는 저승 왕국을 의미합니다. 제우스가 올림포스의 왕좌를 차지한 뒤, 세 형제는 세계를 나누어 다스렸는데, 제우스는 하늘과 올림포스산, 포세이돈은 바다, 하데스는 지하 세계(죽음의 왕국)를 다스렸지요. 그래서 사도행전 2장 27절에 베드로가 시편 16편 10절을 인용하여 “이는 내 영혼을 음부(헬라어로 ‘하데스’)에 버리지 아니하시며”라고 말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여기서 “음부”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하데스”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인용한 시편에서는 “스올”이지요. 시편에는 부정적인 의미가 없었는데, 베드로는 이 구절을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 신화의 영향으로 원래 성경에는 없던 ‘스올’에 대한 부정적인 의미가 덧붙여지게 된 것입니다.
흠정역은 히브리어 단어 스올을 ‘지옥’으로 번역합니다. 히브리어 원어는 지옥 불이나 고통의 의미가 내포되지 않은, 말 그대로 그냥 스올입니다. 그래서 흠정역이나 거기에 의존한 역본들을 읽는 이들은 구약에서 ‘지옥’이라는 말을 흔히 발견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유대교 경전 타나크(구약)를 읽는 유대교인은 그런 의미를 발견할 수 없지요.
정리하면, 구약에서 지옥을 뜻하는 단어 ‘스올’(Sheol)’은 죽은 자들이 가는 음부 즉, 그늘진 곳입니다. 고통의 장소라기보다는 생명과 빛이 닿지 않는 그림자 세계를 가리킵니다. 악한 자들만 가는 곳이 아닌, 선인과 악인이 모두 가는, 하나님의 임재가 닿지 않는 어둠의 세계를 말합니다.
- 신약 : 게헨나
신약에서는 지옥에 해당하는 단어는 헬라어 ‘게헨나(Gehenna)’입니다. 게헨나는 예루살렘 성 외곽에 실제로 존재하는 장소입니다. 이곳은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도벳 사당을 건축하고 그들의 자녀들을 불에 살랐나니… 죽임의 골짜기라 말하리니 이는 도벳에 자리가 없을 만큼 매장했기 때문이니라”(렘 7:31-32) 모든 타락의 클라이맥스가 바로 힌놈의 골짜기입니다. 이곳은 도덕적 붕괴, 신앙의 타락,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곳이었던 것이지요. 이러한 끔찍한 부패와 타락, 우상 숭배 등을 개혁하기 위해 요시아 왕(BC 640–609)은 개혁을 단행합니다. 그 과정에서 이곳을 저주받은 땅으로 만들었고(왕하 23:10), 나중에는 유대인의 종말론적 심판 개념과 연결되어, ‘지옥’의 상징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지요. 예수 당시에는 불결하고 저주스러운 장소, 죽음과 심판을 상징하는 장소로 여겨지게 되었지요.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에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막 9:47~48)
예수는 그 힌놈의 아들 골짜기의 이미지를 빌려 하나님 없는 삶의 비극과 끝내 맞이할 파멸과 단절의 상징으로 사용합니다. 현대 신학자 틸리히, 몰트만 등은 이것을 관계적 파멸, 존재의 붕괴 상태로 이해합니다. ‘불도 꺼지지 않고, 구더기도 죽지 않는다’는 것은, 회개 없는 존재가 내적으로 계속 파괴되고, 소외되고, 상실되는 영적 상태를 말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단지 “죽은 후 지옥 간다”라는 선언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내가 죄와 타협할 때, 이미 내 안에서 하나님 나라가 소멸되고 있다는 경고로 이해됩니다. C.S. 루이스는 “지옥은 문이 안에서 잠긴 감옥”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기 뜻대로만 살기를 고집하는 인간이 결국 스스로 고립시킨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요.
▣ 지옥의 얼굴
- 여기에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단테는 『신곡』 지옥 편(Inferno)에서 지옥문에 이런 문구를 새깁니다.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단테는 지옥을 9개의 원으로 나누어, 각기 다른 죄가 어떻게 인간을 파괴하고 소외시키는지 그려냅니다. 단테에게 지옥은 단순히 벌을 받는 곳이 아니라, 자신의 죄와 욕망에 끝없이 묶여 있는 영혼의 상태입니다. 탐욕, 분노, 교만, 배신과 같은 죄가 인간을 스스로 지옥에 가두는 것입니다. 그는 지옥을 통해 자기 중심성에 갇힌 인간의 비극을 통찰합니다. 그에게 지옥은 미래에 받을 형벌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죄에 집착하며 스스로 만들어낸 현재의 상태를 상징합니다. 예를 들어, 끝없는 탐욕과 분노에 사로잡힌 자들은 그 죄의 본질을 그대로 반복하며 영원히 고통받습니다. 지옥은 하나님 없는 자기 집착의 반복입니다. 반면, 『신곡』 천국 편(Paradiso)에서 천국을 하나님의 사랑이 완벽하게 충만한 세계로 묘사하지요. “사랑이 태양과 다른 모든 별을 움직인다.” 즉, 천국은 사랑과 빛, 조화가 완성되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 인간은 자유를 감당하지 못한다!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는 유명한 대심문관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무신론자 이반이 신앙을 가진 동생 알료사에게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16세기 스페인에 이단 심문이 한창이던 시기에 예수가 인간 세상에 다시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그를 직감적으로 알아보지요. 예수로 인해 죽은 소녀가 살아나고 병이 낫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군중은 감격하고 눈물을 흘리지요. 이때, 대심문관이 등장하여 예수를 체포합니다. 그날 밤 감옥에서 예수와 대심문관의 대화가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너보다 인간을 더 잘 안다”라며 예수를 유혹했던 사탄의 세 가지 시험을 언급합니다. ‘돌로 떡을 만들라’는 것은 ‘인간은 자유보다는 빵을 원한다.’라는 것이며,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라는 것은 ‘인간은 자유보다 확신을 원한다.’라는 것이고, ‘경배하라’라는 것은 ‘인간은 자유보다 안정과 질서를 원한다.’라는 것이라고 재해석하지요. 그리고 “당신은 이 모든 인간의 요구를 거절하고 인간에게 자유를 주었으나, 우리는 그것을 도로 가져와서, 그 자유를 짊어지고 인간을 행복하게 해 주기로 했다.”라고 말합니다.
대심문관은 이어 말합니다. “인간은 자유를 감당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기적, 신비, 권위를 주었다. 인간은 기꺼이 양 떼처럼 따르고, 안심한다.” 대심문관은 예수가 인간에게 준 ‘자유’를 거부합니다. 그는 인간에게 자유가 너무 고통스럽다며, 안락함과 통제를 선택합니다. 그러나 이 선택은 결국 사랑 없는 권력의 지옥으로 이어지지요. 도스토옙스키는 말합니다. “사랑이 없는 자유는 지옥이며, 자유 없는 사랑은 허상이다.” 지옥은 자유와 사랑의 단절에서 시작됩니다. 인간이 자유와 사랑을 포기하고 안락함과 권위에 의지할 때, 스스로 지옥을 만든다고 본 것이지요. 사랑 없는 체제, 자유가 없는 종교는 지옥의 다른 얼굴입니다.
▣ 나가는 말
-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대심문관의 말에 예수는 끝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감옥에서 떠나기 전, 대심문관의 입술에 조용히 입을 맞추지요. 그 입맞춤은 말 없는 심판이며, 말 없는 사랑이며, 존재 자체의 침묵 속 응답입니다. 대심문관은 움찔하며, 문을 열고 예수를 놓아줍니다.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 없는 상태, 지옥의 가장 깊은 어둠을 경험하셨습니다(“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그러나 부활하심으로 지옥과 죽음의 힘을 무너뜨리고 천국의 문을 여신 것이지요. 예수의 삶, 예수의 길은 사랑과 용서의 길, 곧 천국으로 가는 길입니다. 천국은 단지 미래에 가는 곳이 아니라 예수와 동행하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삶의 변화입니다. 미움 속에 갇혀 있던 마음이 사랑으로 열릴 때, 우리는 천국을 살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이웃과 화해할 때, 우리의 삶은 하늘나라의 빛으로 물듭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이 세계에서 지옥의 어둠을 깨뜨린 사랑의 사건입니다. 예수의 삶과 죽음, 십자가와 부활이야말로 이 세계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 수 있음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이 세계의 어둠과 절망, 지옥의 힘이 비존재에 불과한 것임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 천국과 지옥은 장소가 아니라 상태다
성경이 말하는 천국과 지옥은 죽음 이후에 맞이하게 되는 특정한 장소나 시간이 아닙니다. 천국과 지옥은 하나님과의 관계이자 상태, 존재의 개념입니다. 지옥은 하나님 없는 삶의 상태입니다. 지옥은 의미와 희망을 잃어버린 삶이고, 존재를 잃어버리고 온통 비존재에 빠져 있는 상태입니다. 천국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관계 속에서 시작합니다. 단테가 말한 “모든 희망을 버리라”라는 지옥의 문구와 달리, 예수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마 11:28) 말씀하십니다. 예수 안에서 희망을 발견하십시오. 예수의 사랑과 용서는 천국을 지금 이곳의 현실로 만듭니다. 작은 용서와 화해가 천국의 문을 엽니다. 예수의 십자가가 지옥을 이겼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우리 삶 속에 있는 지옥의 힘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생명을 시작하게 합니다. 부활의 소망은 미래가 아니라 현재를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C.S. 루이스는 말합니다.
“천국의 문은 안에서 열리고, 지옥의 문은 안에서 잠긴다.”
우리가 마음의 문을 어떻게 열고, 닫는 지가 천국과 지옥을 가릅니다. 지금 이곳에서 천국을 사시길 기도합니다.
기도
“주님, 우리의 마음속에 지옥 같은 어둠이 자리 잡지 않게 하시고,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소서.
미움과 탐욕을 버리고 사랑과 용서의 천국을 살게 하시며,
세상 속에 천국의 빛을 비추는 존재로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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