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근원
잠 8:1-4, 22-31, 삼위일체 주일, 2019년 6월16일
1.지혜가 부르지 아니하느냐 명철이 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느냐 2.그가 길 가의 높은 곳과 네거리에 서며 3.성문 곁과 문 어귀와 여러 출입하는 문에서 불러 이르되 4.사람들아 내가 너희를 부르며 내가 인자들에게 소리를 높이노라
23.만세 전부터, 태초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받았나니 24.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25.산이 세워지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26.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 27.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을 해면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28.그가 위로 구름 하늘을 견고하게 하시며 바다의 샘들을 힘 있게 하시며 29.바다의 한계를 정하여 물이 명령을 거스르지 못하게 하시며 또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에 30.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31.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느니라.
‘저 사람은 지혜롭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혜롭다는 말은 단순히 지적인 능력이 뛰어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 세상은 머리 좋고 똑똑한 사람을 찾습니다. 그런 이들이 대접받습니다. 그런 사회 현상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똑똑한 사람들이 많아져서 이 세상이 좀 더 살기 좋아졌으면 합니다. 문제는 똑똑한 사람이라고 해서 지혜로운 삶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거꾸로 똑똑하지 않아도 지혜로운 사람이 있습니다. 지적인 능력이 뛰어나면서도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게 최상이겠지만 그런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겠지요. 일반적으로는 한 사람의 인격에 똑똑한 삶과 지혜로운 삶이, 즉 지성과 지혜가 겹쳐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지성적인 부분이 많고, 어떤 사람은 지혜로운 부분이 많습니다. 여러분은, 그리고 여러분의 자녀들은 지성이 뛰어나기를 바라십니까, 아니면 지성은 부족해도 지혜가 뛰어나기를 바라십니까?
고대 유대인들은 지혜가 인간 삶에서 가장 수준 높다고 생각했습니다. 지혜는 신적인 차원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먼저 생긴 것을 지혜라고 했습니다. 잠 8장은 지혜를 의인화해서 묘사했습니다. 잠 8:22-24절을 공동번역으로 읽겠습니다.
22.야훼께서 만물을 지으시려던 한처음에 모든 것에 앞서 나를 지으셨다.
23.땅이 생기기 전, 그 옛날에 나는 이미 모습을 갖추었다.
24.깊은 바다가 생기기 전에, 샘에서 물이 솟기도 전에 나는 이미 태어났다.
여기서 ‘나’는 사람이 아니라 지혜를 가리킵니다. 땅과 바다와 강물이 생기기 전에 존재한 것이 지혜라는 겁니다. 창세기 1장에 따르면 하나님은 빛을 가장 먼저 만드셨고, 다음으로는 하늘을 만드셨다고 하는데, 잠언은 지혜가 먼저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만물 이전에 지혜가 존재했다면 지혜는 피조물이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지혜를 ‘지으셨다.’라고 표현했지만, 지혜는 세상의 피조물과는 차원이 완전히 다릅니다. 30절 말씀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되….” 지혜는 단순히 지성적이거나 똑똑하게 살게 하는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능력 자체입니다.
이 세상보다 지혜가 먼저 존재했다는 잠언의 관점은 관념적이어서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먹고 살기 바쁜 세상에서는 귀를 기울이기 힘든 관점이라고 말입니다. 그건 오해입니다. 잠언을 비롯한 성경은 표현만 관념적이지 실제로는 구체적인 삶에 관해서 말합니다. 잠언을 기록한 사람은 인생살이에 애쓰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모두 애를 쓰지만 모든 인생살이가 행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요즘 우리가 사는 모습과 다를 게 없었습니다. 좁은 영역에서는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서 애쓰고, 넓은 영역에서는 좋은 사회와 나라와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 애씁니다. 애쓰는 과정에서 수많은 시행착오가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시행착오로 인해서 모든 노력의 결과는 물거품이 됩니다.
여기에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 세상에서 실행되는 생명의 메커니즘 자체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한 사람이 행복하면 다른 사람은 불행합니다. 축구시합에서 승리한 팀은 행복하지만 패한 팀은 불행합니다. 다른 하나는 인간 영혼이 이 세상에서 주어지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나라가 현재 세계 10위 내외의 경제 대국이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이르기 위해서 많은 이들이 애썼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현재 세계를 주름잡는 미국과 중국 사람들도 만족하지 못하는 건 똑같습니다. 바둑 용어에 장고 끝에 악수 둔다는 말이 있는데, 지금 우리나 잠언이 기록되던 당시 사람들이나 잘살아보려고 발버둥 치지만 사람들의 영혼이 공허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런 인생살이에서 최선은 지혜롭게 사는 것이라고 잠언은 말합니다. 지혜롭지 않으면 삶이 점점 더 훼손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대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모든 고대 문명권에 살던 사람들, 그리고 오늘도 알만한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압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지혜에 따라서 살기에 그 시대의 요구에 무조건 순응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사람에게 중요한지를,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게 행복한지를 깊이 있게 살필 줄 압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한 가지 특징은 공연한 경쟁과 싸움을 피한다는 사실입니다. 지혜롭지 못한 사람은 싸움을 즐깁니다. 그것의 극단은 격투기입니다. 자신의 몸을 무기로 만들어서 상대방을 완벽하게 압도하는 것으로 행복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우리의 일상 역시 이런 격투기처럼 작동될 때가 많습니다. 승리를 궁극의 목표로 잡고 삽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승리가 자신의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압니다. 싸움에서 이기면 그 순간만 짜릿할 뿐이지 행복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경험적으로 다 압니다. 그런데도 지혜롭게 살지 못합니다. 지혜롭지 않기에 행복하지도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지혜가 시원적인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잠언은 태초 이전에 지혜가 생겼다고 표현했습니다. 이에 해당하는 구절은 앞에서 읽었습니다. 이어지는 구절도 같은 내용을 말합니다. 25-26절 말씀을 보실까요?
산이 세워지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였을 때에라.
위 구절에 따르면 지혜는 사람이 훈련하거나 개발할 수 있는 지적인 능력이라기보다는 태초, 즉 빅뱅이 일어나기 전에 존재한 시원적 능력입니다. 여러분이 지혜롭다면 이 시원적인 능력을 얻은 것입니다. 창 1:2절에 따르면 우주가 창조되기 전에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은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했다고 합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잠언이 말하는 지혜는 하나님의 영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성령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성령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성령, 즉 하나님의 영이 아니면 지혜롭게 살지 못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많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의 영을, 즉 진리의 영, 생명의 영을 모르면서 어떻게 지혜롭게 살겠습니까? 똑똑하게 살 수는 있습니다. 착하게 살 수는 있습니다. 고상하고 교양 있게 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롭게는 살지 못합니다. 착하고 고상하고 교양 있는 삶을 최선으로 아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세상은 그렇게 가르치겠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혜로운 삶만이 사람을 참된 행복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저는 성경의 가르침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구약성경은 곳곳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바로 지혜의 근본이라고 말했습니다. 시 111:10절과 잠 9:10절과 욥 28:28절과 전 2:26절을 참조하십시오. 두 구절만 확인하겠습니다. 시 111:10a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잠 9:10절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말은 여호와의 행위에 집중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여호와가 하신 일이 묘사되었습니다. 창조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늘과 땅과 바다와 거기에 모여 사는 모든 생명체를 보십시오. 빛과 어둠을 보십시오. 중력을 느껴보십시오. 빗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십시오. 하나님의 창조 사건에 집중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는 말이 실감 날 겁니다. 우리의 짧은 인생살이에서 중요한 게 무엇인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게 지혜입니다.
바로 앞에서 지혜로운 사람에게 나타나는 특징의 하나가 공연한 싸움을 피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 즉 하나님의 창조 행위 앞에서 놀라워하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하늘과 땅과 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를 영혼의 깊이에서 느끼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다툴 생각을 아예 하지 않습니다. 그의 영혼에 생명의 환희가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지난날 가장 기뻤던 순간을 회상해보십시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 원하던 학교나 직장에 합격했을 때, 좋은 책을 읽고 감동하였을 때, 각자 다르기는 하겠지만 그런 순간이 분명히 있었을 겁니다. 가장 기쁜 순간에는 누구와도 다투지 않습니다. 다툴 마음이 아예 들지가 않습니다. 누군가와 다툰다는 것은 자기의 영혼이 공허하다는 증거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어떻게 싸우지 않고 사냐, 당신은 한 번도 싸우지 않았느냐, 하고 묻고 싶은 분들이 있을 겁니다. 사람들은 자주 싸웁니다. 싸움이 없는 세상은 이 현실에서 물론 가능하지 않습니다. 개인 사이에도 싸움이 벌어지고 국가 사이에도 싸움이 벌어집니다. 가장 가까운 부부들도 싸웁니다. 부부라도 습성과 가치관과 세계관이 다르기에 같이 지내기에 불편한 점은 많습니다, 이로 인해서 벌어지는 갈등은 감수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저는 테니스 시합에서 이기려고 ‘파이팅’할 때 외에는 다른 사람을 이기려고 싸워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는 싸운 적이 있었을지 몰라도 기억에 없습니다. 여러분도 저와 비슷하게 살아갈 겁니다.
저는 지금 쉽게 극복될 수 있는 작은 의견 차이가 아니라 상대방을 정복해서 승리가 결정되어야만 끝나는 이전투구식의 싸움을 말하는 중입니다. 21세기 오늘의 이 세상은 살벌한 싸움의 일상화를 그 특징으로 합니다. 많은 사람이 화가 난 듯이 살아갑니다. 세계 역사에서 프랑스 혁명, 러시아 혁명 등등의 혁명을 거쳤습니다. 일종의 싸움이라 할 혁명을 통해서 많은 것을 얻어냈지만 인류가 행복해지진 않았습니다. 카를 마르크스가 이런 말을 들으면 저를 철부지라고, 세상 물정 모른다고 책망할 겁니다. 여러분은 오늘의 문명과 오늘의 삶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문명 가운데서 여러분은 지금 행복하십니까? 사람들이 행복의 조건이라고 부추기는 것을 채움으로써 행복한 인생을 산다고 착각하는 건 아닙니까? 여러분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분들이니 아닐 것이라고 믿고, 그렇게 기대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말은 여호와의 창조 사건에 집중한다는 의미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창조 사건의 핵심은 생명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말은 생명 지향적으로 사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지혜의 근본은 생명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일단 생명은 숨 쉬고 먹고 마시며 배설하고 살아가는 생리 현상입니다. 모든 사람은 지금 생명을 누리기 위해서 최선을 다합니다. 그건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본능적인 현상이고 당연한 일입니다. 문제는 그런 현상에 집중하는 게 아니라 누가 더 좋은 음식을 먹느냐, 하는 것에 몰두한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사는 집에 매일 아침 들리는 길고양이 가족이 있습니다. 그들은 온종일 먹을 것을 찾아다닙니다. 야생 동물들의 운명입니다. 그들에게는 육체적인 삶만이 생명입니다. 주인에게 귀여움을 받고 싶어 하지만 그것이 그들에게는 절대적이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예술과 시가 나오지 않습니다. 사람은 다릅니다. 배가 고파도 사랑을 나눠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배우자로 선택할 수 있는 동물은 인간밖에 없습니다. 삶이 고달파도 시인은 시를 쓰고 화가는 그림을 그립니다. 사람에게 생명은 동물의 그것과 다르다는 의미입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를 생명으로 경험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마 16:16)라는 고백이 그것을 가리킵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훨씬 더 신학적으로 정리된 이야기를 전합니다. 조상들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낀 유대 군중들에게 예수는 만나를 먹은 조상들도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고 선언합니다(요 6:49). 예수를 믿고 예수와 하나 된 사람은 영생을 얻으며, 마지막 때에 다시 살아난다고 제자들은 믿었습니다. 예수가 바로 생명의 원천이라는 의미입니다. 제자들의 생명 경험은 예수를 하나님의 창조와 직결된 존재로 인식하게 했습니다. 요 1:1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태초에 말씀(로고스)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이 구절은 잠언에 나오는 지혜에 대한 묘사와 비슷합니다. 지혜도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이미 존재했고, 예수를 가리키는 로고스도 세상 창조 시점으로 그 기원이 올라갑니다. 어떻게 보면 이런 표현은 말이 안 됩니다. 예수는 기원후 30년경에 활동한 인물입니다. 그가 어떻게 태초에 이미 존재한 로고스가 된다는 말인가요. 이런 표현을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 젊은 두 사람이 첫눈에 빠져서 사랑하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들은 상대방을 통해서만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강렬한 사랑의 힘에 떨어져서 자신들이 전생에서도 사랑하던 관계였다고, 어느 별에서 사랑하다가 그 사랑이 지나쳐서 지구로 추방당한 사람들이라고 표현하고 싶을 겁니다. 연인들도 이렇게 절대적인 생명을 경험하는데, 예수 제자들이야 무슨 말을 더 보태겠습니까.
예수 제자들은 예수를 통해서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 보충될 필요가 없는 생명을 경험했습니다. 예수에게서 생명 충만감을 경험했기에 예수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말을 믿기 힘드신가요? 공감이 안 되나요? 절대적인 세계는 자신이 경험하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는 법입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빛보다 빨리 움직이는 우주선을 만들 수만 있다면 과거나 미래로의 시간 여행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우리의 일상 경험으로는 이해가 안 됩니다. 블랙홀도 이해가 안 됩니다. 우주와 우리가 사는 지구와 인류 역사는 우리의 표면적인 경험보다 훨씬 심층적이라는 뜻입니다. 아득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깊이입니다.
현대인들은 생명을, 즉 삶을 영혼의 깊이에서 경험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모두 바쁘게 살지만, 영혼의 기쁨이, 즉 생명 충만감이 없습니다. 잠언의 표현을 빌리면 지혜로운 삶을 모릅니다. 영혼의 기쁨이나 지혜로운 삶이 밥 먹여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는 영혼의 기쁨만이 우리에게 실제로 밥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영혼의 기쁨을 아는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충분하다고 여길 줄 알지만, 영혼의 기쁨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많은 것이 주어져도 부족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늘 부족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제자들이 예수를 절대 생명으로 경험했다는 말은 자신의 인생을 다른 사람과 비교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예수를 통해서 새로운 생명을 경험한 사람들이니 어떤 조건 가운데서도 주눅들 필요가 없고, 동시에 자기만 잘난 척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런 삶의 태도가 바로 잠언이 말하는 지혜로운 삶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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