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19일 예배영상 https://www.youtube.com/live/dYP0zpWVBic?si=yhCXFij53xDewAfZ
▣ 들어가는 말
- 중요한 것
“철학자들은 단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포이어바흐 테제』, 11) 너무나 유명한 이 문장은 마르크스 사상의 핵심을 상징하는 구절로, 런던에 있는 그의 묘비에 새겨져 있습니다. 1845년, 마르크스는 독일 철학자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을 비판하면서 이 짧은 11개의 단상을 작성했습니다. 근대 최고의 철학자로 평가받는 헤겔은 『법철학 서문』에서 “정신(이성)은 세계의 본질이며, 현실은 정신의 자기실현이다.”라고 서술합니다. 당시 철학계를 지배하던 헤겔의 관념론은 “정신(이성)이 현실을 규정한다”라고 주장하지요. 역사를 단순한 사건의 나열이 아닌 자유의 발전 과정으로, 세계 역사 자체가 이성의 전개 과정으로 본 것입니다. ‘헤겔 없이는 현대 철학을 이해할 수 없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지요. 그런데 포이어바흐는 이러한 헤겔의 사상에 반발해 인간은 정신이 지배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연적이고 감각적 존재라고 주장합니다. 관념론을 비판한 유물론자이지요.
그러나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조차 ‘인간’을 현실적 역사 속 존재로 보지 못했다고 비판합니다. 즉, 그는 감각적 인간을 말했지만, ‘사회적 관계 속의 인간’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죠. 마르크스에게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이며, 개인은 사회적 구조 속에서 형성되는 존재입니다. 아울러 철학은 세계를 관조하는 것이 아니라 변혁하는 실천으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앞서 언급한 선언을 한 것입니다. 이 문장은 단순한 ‘행동 촉구’가 아닙니다. 마르크스는 진리는 실천을 통해서만 완성된다고 봅니다. 즉,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분리될 수 없으며, 진리란 사유의 산물이 아니라 역사적 행위의 결과라는 뜻이죠. 멋진 통찰이지요.
- 진리를 묻는 존재
인류는 끊임없이 진리가 무엇인지를 질문해 왔습니다. 우리는 왜, 언제 이런 질문을 할까요? 현실 세계에서 별 쓸모도 없는 것 같은데 말이지요. 칼 야스퍼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철학은 경이, 의심, 그리고 절망에서 시작된다.” 여기 “경이”, “의심”, “절망”은 인간이 진리를 묻기 시작하는 세 가지 길, 즉 “철학적으로 각성하게 되는 세 가지 문(門)”이라는 말입니다. 인간은 이러한 한계상황에 맞닥뜨릴 때, 진리가 무엇인지를 묻게 된다는 말이지요.
“경이”는 세계가 ‘낯설어질 때’ 철학이 시작된다는 말입니다. “경이는 일상의 자명함이 무너지고, 세계가 낯설게 보이는 순간에 일어난다.” 평소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것들이, 어느 순간(별빛이 쏟아지는 밤, 사랑하는 이의 죽음, 혹은 자신의 한계 등) 세계는 낯설고 신비롭게 느껴집니다. 그때 인간은 “왜 존재하는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원적 물음을 던지게 되지요. 즉, 경이는 “세계의 당연함이 깨어지는 순간, 진리가 깨어나기 시작하는 자리”입니다. 이것이 철학으로 들어가는, 진리 질문을 하게 되는 첫 번째 문입니다. “의심” 야스퍼스의 의심은 삶 전체가 흔들리는 것인데, 확실함, 토대가 흔들릴 때 철학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흔들릴 때, 인간은 단지 지식을 묻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믿고 사는 존재인가를 묻는 존재로 변한다.” 이 의심은 단순한 회의가 아니라, 기존의 확실함이 무너질 때 열리는 ‘진리의 공간’입니다. 다시 말해, 의심은 파괴가 아니라, 새로운 이해의 탄생을 위한 여백이지요. 진리의 물음은 바로 이 의심의 빈자리에서 생겨나는 것이지요. 이것이 철학의 두 번째 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절망” 인간은 한계와 마주할 때 철학이 시작된다는 것이지요. 야스퍼스는 ‘절망’을 가장 깊은 철학적 체험으로 봅니다. 그의 대표 개념인 ‘한계상황’(죽음, 고통, 죄, 투쟁, 우연) 속에서 인간은 자신이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현실 앞에 서게 됩니다. 그때 인간은 모든 ‘의지’와 ‘지식’이 무력해진 자리에 도달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나는 무엇을 의지할 수 있는가?”, “이 무너짐 속에서도 삶의 의미는 가능한가?”라는 궁극적인 물음이 태어납니다. 즉, 절망은 끝이 아니라, 초월을 향한 문, 진리의 근원으로 열리는 통로가 되는 것이지요. “절망은 진리로 향하는 마지막 문이다. 그 문을 통과할 때, 인간은 자신의 실존을 발견한다.”(야스퍼스, 『철학적 신앙』)
종합하면, “경이로움이 없다면, 인간은 세계를 느끼지 못하고, 의심이 없다면, 인간은 자기 생각의 포로가 되며, 절망이 없다면, 인간은 초월을 향해 나아갈 수 없다.” 너무 근사한 통찰이지요. 일상성 속에 매몰되어 있는 인간은 결코 진리나 존재에 대해 의문을 가지지 못합니다. 신학적으로 표현하면, 우리가 진리/존재 물음을 물을 때 비로소 우리는 깨어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도종환, ‘흔들리며 피는 꽃’)
▣ 인간의 물음
- 역사적 배경
‘마그누스’(위대한 자)라 불리던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는 기원전 63년에 예루살렘을 완전히 점령합니다. 이로써 유대는 사실상 로마의 지배 아래에 들어가게 되지요. 그런데 이두매(에돔) 귀족 출신 헤롯은 로마 유력자들과의 인연과 충성으로 기원전 40년경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유대의 왕으로 임명받게 됩니다. 그리고 로마의 지원을 받아 유대를 재건하게 되지요.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짓고 항구를 건설합니다. “헤롯의 아들이 되는 것보다 그의 돼지가 되는 게 낫다.”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가 한 말입니다. 그가 얼마나 지독한 권력의 화신인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잔인하게 자신의 권력을 지키려 하는지 알 수 있는 말이지요. 유대 율법 때문에 돼지는 죽이지 않지만, 권력을 위해 아들마저 가차 없이 죽였기 때문입니다.
그가 기원전 4년경 죽자, 그의 세 아들이 왕국을 나누어 다스리게 되는데,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은 헤롯 안티파스,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은 아켈라오, 북동부 지역은 빌립이 다스리게 됩니다. 그중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을 다스리던 아켈라오는 폭정으로 폐위되고 기원후 6년부터 로마가 총독을 파견하여 직접 통치하게 되지요. 바로 그 총독이 빌라도입니다.
빌라도가 재판 중에 예수를 헤롯 안티파스에게 보냈다가 돌려받는 장면이 누가복음 23장에 등장하는데, 예수가 갈릴리 출신 즉, 헤롯 안티파스의 관할이기 때문이지요. “빌라도가 듣고 그가 갈릴리 사람이냐 물어, 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헤롯에게 보내니…”(눅 23:6-7)
-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
예수가 체포된 후 가장 먼저 끌려가 심문을 받은 곳은 공회입니다. “백성의 장로들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모여서 예수를 그 공회로 끌어들여”(눅22:66) 그리고 그들이 예수에게 던진 질문은 “네가 그리스도냐?”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입니다. 이 물음은 종교가 던지는 가장 본질적이고 핵심적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단순한 정체성 확인이 아니라, 인간의 오래된 갈망이 숨어 있습니다. “신은 어디 있는가?” “정말 당신은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존재인가?” “세계의 고통과 불의, 죽음 속에서도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가?” 이것은 종교의 형식적 질문이 아니라, 삶의 벼랑 끝에서 던져지는 인간 실존의 외침, 절규입니다.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다.”(눅22:70) 예수는 그 질문을 피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하나님께서 세우신 구원자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그리스도”라는 칭호를 인정하면서도 당시 사람들이 기대했던 정치적, 민족적 구원자가 아니라 사랑과 자기 비움으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을 드러냅니다. 예수의 대답은 인간 욕망의 방향을 완전히 뒤집습니다. 그는 “하늘 위의 신”이 아니라 “이 땅 위의 하나님”, 인간의 눈물과 고통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드러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 “보라, 하나님 나라가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 예수는 “구원”을 저 먼 천상의 보상으로 미루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지금 이 자리, 사람이 서로를 품고 용서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 속’에 일어나는 일로 선언하신 거지요.
결국, 인간들이 바라고 추구하는 신, 구원은 천상의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우리 안에, 우리 일상의 삶 속에 있는 것입니다. 폴 틸리히의 표현을 빌리면, “하나님은 ‘저 위에 계신 존재’가 아니라, 우리의 존재의 ‘깊이’에 계신다.” 예수는 바로 그 “존재의 깊이”를 살아내신 것이지요. 하늘에서 내려오는 신이 아니라, 인간의 상처 속으로 들어오신 신. 그것이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예수는 인간이 묻는 “너는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느냐?”라는 질문에 “그렇다. 그러나 그 구원은 하늘의 신비가 아니라, 너희의 삶 속에서 사랑과 용서, 그리고 관계의 회복으로 이미 임하고 있다.”라고 대답하신 것입니다.
-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총독 빌라도의 첫 질문은 정치적 언어입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요 18:33), 이 질문은‘로마 제국에 대한 반역자냐?’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그 권력의 프레임을 거부합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요 18:36) 즉, 예수는 왕이지만, 로마식 권력의 질서 속의 왕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예수는 그의 나라는 세속 권력의 구조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말합니다. 그의 나라는 힘과 권력으로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는, 희생과 헌신, 사랑으로 섬기는 나라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막 10:45)
로마의 세계에서 “왕”이란 힘과 통제, 질서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예수가 말한 나라는 권력이 아니라 사랑의 질서, 정복이 아니라 자기 비움의 통치입니다. 빌라도는 그 말 앞에서 잠시 흔들립니다. 그는 평생 정치와 법의 언어로 진리를 재단해 온 사람이지요. 그러나 지금 그 앞에 서 있는 이 사람은, 말이 아니라 존재로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침묵, 그의 눈빛, 그의 상처 속에 빌라도는 그가 모르는, 알 수도 없는 어떤 ‘다른 빛’을 봅니다. 그는 제국의 언어로 묻는데, 예수는 진리의 언어로 대답합니다. 그들의 대화는 이미 서로 다른 차원에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왕 되신 예수’는 군림하는 권력자가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왕관 대신 가시관을 쓰는 왕입니다. 그분의 통치는 사랑, 정의, 그리고 평화의 통치입니다. “그의 다스림과 평화가 끝이 없으며, 정의와 공의로 보좌를 세우실 것이다.”(사 9:7) 성서가 말하는 진정한 왕권, 통치, 다스림은 지배가 아니라 자기 비움입니다. 예수는 세상의 권력 체계를 무너뜨리고, 섬김의 질서를 세우시는 것이지요.
- “진리가 무엇이냐?”
먼저, 로마인에게 ‘진리(veritas)’는 도덕적·법적·실용적 개념입니다. ‘진리’란 “현실을 정확하게 기술하는 것”, “국가 질서와 법이 보증하는 것”입니다. 로마의 진리는 질서(order)와 법(law), 그리고 힘(power)을 전제로 합니다. 진리는 로마의 팍스(Pax Romana, 로마의 평화)를 지탱하는 정치적 합리성이지요. 따라서 “진리가 무엇이냐?”라는 빌라도의 질문은 “이 혼란한 현실 속에서 정말 쓸모가 있는 것이 무엇이냐?”라는 정치인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맹자가 양혜왕을 찾아가자 양혜왕이 말합니다. “노인께서 이 나라에 오셨으니 장차 내 나라를 이롭게 할 수 있겠습니까?” 맹자는 “왕께서는 하필 이로움을 말하십니까? 오직 인의(仁義)가 있을 뿐입니다.” 오직 이익만을 생각하는 양혜왕의 이야기와 닮아있습니다.
또한, 빌라도는 로마인이지만, 로마의 지성은 헬레니즘의 영향 아래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 철학의 유산을 실용적 법률과 정치의 세계에 흡수한 사람들이지요. 따라서 그리스 철학의 관점에서 이 질문을 생각해 보면, 이들은 모두 ‘진리’를 사유의 차원, 혹은 존재 질서의 법칙성으로 이해했습니다. 즉, 진리는 관조하는 것이지, 살아내는 것이 아니지요. 따라서,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자는 내 말을 듣는다”(요18:37)라는 예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빌라도가 “대체 당신이 말하는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진리를 삶과 분리된 추상적 개념으로만 인식한 사람입니다. 즉, 그리스 철학의 진리는 ‘보는 것’, ‘깨닫는 것’이지, ‘사는 것’은 아니지요.
그러나 빌라도의 물음에 예수는 침묵으로 답합니다. 살아낼 의지가 없는 이에게 진리를 안다는 것은 아무런 쓸모없는 장식품에 불과한 거지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 14:6) 예수는 이미 자신이 진리요 생명임을 천명했습니다. 예수에게 진리는 개념이 아니라 인격입니다. 진리는 그분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만나는 것, 삶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자신이 진리임을 증명합니다. 기꺼이 십자가에 달리는 자기를 부인하는 사랑으로 말이지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그가 보여준 진리는 지식이 아니라 사랑으로 인한 자유였습니다.
▣ 나가는 말
- 세 가지 질문
산헤드린 공회에서 대제사장들이 던진 질문 -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은 종교의 가장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질문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이십니까? 당신은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까? 우리 영혼에 안식을 주실 수 있습니까? 총독 빌라도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는 질문은 정치, 이 세계의 가장 중심된 질문입니다. 이 세계의 정점, 돈, 명예, 권력의 화신. 인간의 모든 욕망과 바람에 끝에 있는 존재. 그 권력과 힘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있습니까? “진리가 무엇이냐?”라는 물음은 학문과 철학의 가장 핵심적 질문입니다. 완전한 앎이야말로 힘과 자유, 구원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말이지요.
결국, 세 가지 질문은 인간의 삶에 가장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물음입니다. 이 물음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내가 구원자다.” 너희들이 찾는 하나님, 구원은 천상의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너희 곁에, 너희 안에, 너희와 함께 있다. “나는 진정한 왕이다.” 그러나 지배하고 억압하고 착취하는 왕이 아니라 섬기고 너희를 위해 기꺼이 내 모든 것을 내어주는, 목숨마저 내어주는 왕이다. “내가 곧 진리다.” 진리는 머릿속에 갇혀 있는, 멀찍이 떨어져 세상을 관조하며,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그것을 위해 살고, 그것을 위해 죽는 것이다. 사는 것이다. 삶과 떨어진 진리가 어찌 진리일 수 있는가? 라는 대답입니다. 그리스 철학의 진리가 빛나는 이성의 세계라면, 예수의 진리는 상처받은 사랑의 세계입니다. 그리스 철학이 “진리를 깨닫는 자”를 지혜자로 만들었다면, 예수의 진리는 “진리를 살아내는 자”, 제자로 만듭니다.
- 진리를 찾고 있는가?
오늘날 우리 세계의 “진리가 어디있냐? 세상엔 그런 거 없다”라는 냉소에 대한 예수의 대답 같습니다. 어쩌면 절규인지도 모르지요. 정치와 권력의 세계에서 늘 타협하며, 진리를 애써 외면하며, ‘질서 유지’라는 명분으로 정의와 사랑을 희생시켜 온 관료 빌라도. 고달픈 세상살이에서 정의나 사랑이나 거룩함 따위는 외면하고, 잊고, 제쳐두고 소유와 사회적 지위와 허영을 좇으며 사는 현대인. 우리의 절규 “진리가 어디 있어? 그런 것은 없어” 아닐까요.
예수에게 진리는 어떤 논리나 사실이 아니라, 인격(person) 그 자체입니다. 진리는 “옳고 그름의 명제”가 아니라 “관계의 실재”입니다. 즉, 진리는 하나님과의 일치, 사랑의 관계성 속에서 드러나는 실존적 진리입니다. 예수는 진리를 설명하지 않고, 그 자신이 진리로 현존합니다. 그래서 예수가 말한 진리는 ‘법적 사실’이 아니라 ‘은총의 관계 속에서 새로 태어난 존재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빌라도는 처음으로 예수 앞에서 흔들립니다. 떨림, 균열을 느낍니다. 그는 눈앞의 사람에게서 ‘세상의 권력과 다른 어떤 빛’을 본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빛을 붙잡을 용기가 없습니다.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물었지만, 그 질문 앞에 이미 진리가 서 있습니다. 그는 진리를 보았으나, 진리보다 권력을 선택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내어주며 팻말을 붙입니다. “INRI”, 즉 라틴어 “예수스 나자레누스 렉스 유다에오룸”(Iesus Nazarenus Rex Iudaeorum) - “나사렛 사람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의미이지요. 요한복음 19:20에 따르면, 그 팻말은 히브리어(종교의 언어), 라틴어(제국의 언어), 그리스어(철학의 언어)로 기록됩니다. 요한이 굳이 이런 사실을 밝힌 것을 보면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지요. 예수의 주권, 구원이 특정한 이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 인류를 향한 것, 인간의 전존재를 향한 것임을 상징합니다. 예수야말로 모든 이들의 주, 세상의 왕, 진정한 구원자라는 선언입니다.
빌라도의 비극은 ‘진리를 몰랐다’가 아니라 ‘진리를 앞에 두고도, 그것을 개념으로만 여긴 것에 있습니다. 그는 진리를 보았지만, 그 진리 속으로 들어갈 용기가 없었습니다. 진리 앞에서 돌아섭니다. 그는(우리는) 진리를 판단하려 하지만, 진리는 그를(우리를) 구원하려고 그(우리) 앞에 서 있습니다. 그는(우리는) 관조의 진리를 원하지만, 예수는 체험의 진리, 십자가의 진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진리는 더 이상 사유의 대상이 아니라, 따라야 할 길, 함께 살아야 할 존재입니다. 우리 앞에 진리가 서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진리이신 주님,
주님 앞에 기꺼이 무릎 꿇게 하소서.
당신의 옷자락을 잡게 하소서.
진리 앞에서 두려움에 떠는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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