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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차별이 없으신 하나님




차별이 없으신 하나님

행 10:34-43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말씀은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고르
넬리오 집에서 선포한 아주 귀한 설교입니다. 어떻게 보면 매우 단순한
구조의 설교입니다만 초기 기독교의 정체성을 명백하게 해명하는 설교
로서 부족함이 없습니다. 오늘 이 설교의 핵심을 이해하려면 베드로가
이 자리에 서게 된 그간의 사정을 어느 정도 살펴보아야 합니다. 왜냐하
면 이 설교는 일반 대중들을 향했던 설교와 달리 고르넬리오라는 한 사
람의 집에서 행한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렇게 설교하게 된 사정과
설교의 내용이 긴밀히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요즘의 계급으로 말하자면 육군 중대장이라 할 수 있는 로마 군대의
백부장 고르넬리오가 어느 날 환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는 로마
인이지만 유대교로 개종한 인물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행 10:22 참
조). 하나님의 천사가 그에게 요빠에 머물고 있는 베드로를 데려오라고
말했습니다. 고르넬리오는 사람들을 요빠의 베드로에게 보냈습니다. 비
슷한 시각에 베드로도 한 환상을 봅니다. 하늘이 열리고 네 귀퉁이에 끈
이 달린 보자기에 온갖 들짐승과 날짐승이 담겨 있었습니다. 아마 베드
로가 시장기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환상을 보게 된 것인지도 모
릅니다.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들렸습니다. "베드로야, 어서 잡아먹어
라". 베드로는 그 말에 기겁을 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율법을 지켜온
그로서는 그런 부정한 짐승을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이런 음
성이 들렸습니다.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
라." 당혹해 하는 베드로에게 이런 말씀이 세 번이나 들리더니 보자기가
하늘로 들려 올라갔습니다(행 10:1 이하). 베드로가 이 환상의 의미가 무
엇인지 깊이 생각하는 그 순간에 고르넬리오가 보낸 사람들이 그의 집에
들이 닥쳤습니다. 결국 베드로는 다음날 이 사람들을 따라 고르넬리오의
집에 들어갔습니다. 유대인이 로마인의 집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썩 마
음 내키는 일이 아니었지만 그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사람이었기 때문
에 모든 전통을 무시하고 고르넬리오의 집에 들어섰습니다. 이제 베드로
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하는 고르넬리오에게 설교합니다.

차별이 없으신 하나님
오늘 베드로의 설교는 하나님이 사람을 차별대우하지 않으신다는 말
씀으로 시작됩니다. 우리는 이미 기독교인의 시각으로 성서를 읽기 때문
에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대하신다는 베드로의 이 가
르침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그 당시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
다. 베드로는 유대인이었습니다. 그가 고상한 종교 지도자가 아니라 비
록 육체 노동을 하는 어부였습니다만 예수님을 따라 나선 것을 보면 상
당히 경건한 사람이었고 볼 수 있는데, 그 당시의 경건한 유대인들은 철
저하게 거룩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구별하고 살았습니다. 베드로가
본 환상에 등장하는 들짐승과 날짐승은 분명히 금지된 먹거리였을 것입
니다. 레위기에 의하면 네발 가진 짐승 중에서 굽이 갈라지고 되새김하
는 것들만 먹을 수 있었습니다. 돼지는 굽이 갈라지기는 했지만 되새김
을 하지 않지 않기 때문에 불결한 짐승이었습니다. 소나 양은 이 두 가지
조건에 해당되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즐겨 먹었습니다. 지금도 중동 지역
의 사람들은 돼지를 먹지 않습니다. 개도 되새김을 하지 않기 때문에 먹
지 않습니다. 현재의 형편도 이런 정도인데, 2천년 전에야 오죽했겠습
까? 하나님이 차별하지 않으신다는 베드로의 이 가르침은 아주 파격적
인 것입니다.
다른 한편, 베드로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당연히 율법대로 살았겠
지만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 뒤로는 율법과 상관없이 살았기 때문에 베드
로의 이런 설교는 당연한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 승천 이후에도 예
수님의 제자들은 유대교 공동체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예루살렘
성전을 드나들었으며, 여전히 유대인들의 기도 시간을 지켰으며, 여전히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그게 참으로 이해하기 곤란합니다. 상식적으로 생
각한다면 자신들의 선생님을 십자가에 처형시킨 장본인들과 단칼에 인
연을 끊고 제 갈 길을 가야 했을 텐데 무슨 미련이 있어서 성전 출입을
계속했는지 이상합니다. 우리는 그 복잡한 상황을 한 두 마디로 풀어낼
수 없으니까 접어두기로 하고, 다만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주 철저하게
유대교의 경건 훈련을 받았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런 종교적 습관이나
정서를 하루아침에 끊어낼 수 없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부정한 짐승을 먹으라는 소리를 듣고 베드로가 손사래를 친 것을 이해할
만 합니다. 그러나 이제 베드로는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인간이
속되다고 할 수 없다는 말씀을 듣고 결국 고르넬리오의 집에 들어가서
하나님이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고 설교를 합니다.

깨침의 과정과 성숙의 단계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가 단지 남을 가르치기만 하는 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 배우고 깨우쳐 간다는 점에서 아주 바람직한 기독교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앞서 지적한 대로 베드로가 이 설교를 할 당시에도
유대인들은 철저하게 이방인들을 거절했으며, 유대인이었던 베드로도
역시 그런 가치 판단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의 영에 마음을 열어놓고 있던 베드로는 사람들의 풍습이나 전통이나 윤
리 수준에서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차원에서 생각하기 시
작했습니다. 35절 후반절에 보면 베드로는 이전에 가졌던 자기의 생각이
틀렸고 하나님의 뜻이 다른 데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고백합니다.
이렇게 생각이 깊어지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과정이고 신앙의 성숙입니
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의 성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것 같
습니다. 대개는 교회를 오래 다니고 교회 질서에 잘 적응을 하고, 교회의
직분을 받기만 하면 신앙이 깊어지는 줄로 압니다. 기도를 좀더 열심히
하고 전도를 하고 성서의 내용을 잘 알게 되면 그게 바로 신앙의 성숙인
걸로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어느 보험회사의 보험설계사가 보험 실적을
많이 올리면 유능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과 비슷합니다. 보험설계사는
단지 많은 고객을 확보해서 회사에 경제적으로 이익을 많이 남겨주는 것
을 목표로 합니다. 이 사람에게는 경제 정의나 인간다운 삶이라는 주제
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단지 상품을 파는 것만 지고지선으로 작용
합니다. 이처럼 교회 신앙도 까딱하다가는 교회라는 상품을 많이 파는
것에 따라서 그 성숙도가 달라지고 있는데, 이는 큰 착각입니다. 기독교
의 신앙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뜻을 깊이 이해하는 과정을 통해서 성숙해
집니다. 비록 기도는 세련되게 할 줄 몰라도, 헌금을 많이 드릴 수 없어
도, 전도는 하지 못해도 오늘 베드로처럼 하나님의 뜻을 새롭게 이해해
나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대개의 신자들이 단지 교회의 형식에 적응하
는 것만을, 그것의 강화만을 신앙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게 참으로 안타
깝습니다.
이 문제는 우리의 인생에도 거의 비슷하게 적용된다.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매일 매일 새롭게 깨달아가기 보다는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버는가, 어떻게 하면 남보다 앞설 수 있는가, 하는 것에만 신경을 쓰고
살면 결코 삶이 성숙해지지 않습니다. 이건 참으로 중요한 문제인데도
사람들은 별로 관심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자녀들의 교육에서도 역시
삶을 의미 있게 살아가게 하는 것보다는 학교 성적이나 대학 입시만 절
대적인 기준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이런 성적이나
실적이 곧 의미 있는 삶과 직결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
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연봉이 1억원인 사람과 1천만원인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앞사람은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저 돈을 얼마나 많
이 모을 수 있는지, 얼마나 좋은 집에 사는지에 대해서만 신경을 쓰면서
불안하게 사는 반면에, 뒤의 사람은 비록 작은 집에 살지만 산다는 게 무
엇을 의미하는지 매 순간마다 새롭게 깨달으며 산다고 합시다. 누가 더
행복한가요? 물론 돈을 많이 갖고 있으면서도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한다
면, 그리고 매순간마다 깨달음이 지속된다면 훨씬 바람직할 지 모르겠습
니다만, 그런 깨달음이 있다면 그렇게 돈에 매달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준
베드로가 새롭게 깨달은 것은 하나님이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기준이
기존의 생각과 전혀 다른 데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전에는 출생, 신
분, 성, 도덕성, 등등이었습니다만 이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올바르
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안다는 점이 핵심입
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베드로를 초청한 고르넬리오는
바로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유대인이 싫어하는 로마인이긴 했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건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을 받아들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통해서 이제 베드로는 하나님
의 기준이 인간의 것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걱정하지 말라는 예수님
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이르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사도행전에서는 참으로 두려워해
야 할 대상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두려워한다는
것이 공포에 떤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하나님이 참되다는 사실을 인정하
는 것이 바로 그 단어의 의미입니다.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어떤 충격을
받게 되고 그 충격은 곧 좋은 의미에서 두려움으로 작용합니다. 천동설
이 잘못되었고 지동설이 옳다는 사실을 정확히 인식한 과학자는 큰 충격
을 받게 되고 두려워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동설에 근거해서 세워졌던
모든 물리학적 이론을 다시 세워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천동설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지구나 태양을 중심으로 돌
고 있는 게 일차적으로 사실이지만 그 태양도 역시 은하계 안에서 돌고
있습니다. 모든 별들이 움직입니다. 어쨌든지 베드로는 지금 진리를 알
게 되는 사람이 갖게 되는 그런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인식하고 사는 사
람들을 하나님께 받아주신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이 가
르침은 오늘 우리에게도 역시 진리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이 말
씀이 어떤 차원에서 진리입니까?

모든 것에 대한 심판
베드로의 설교는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분
은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자기를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의 심판자로 정하셨
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선포하고 증언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42절). 이
말씀에는 두 가지 사실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하느님께서 마지막 때에 모든 것을 심판하신다는 말씀입니
다. 하느님의 심판은 누구를 벌주기 위한 것이기보다는 진리를 완전히
드려내는 것입니다. 인간의 역사에 등장했던 모든 것이 결국 진리의 기
준에 따라서 판단을 받는다는 사실은 알고 있을 때 우리는 자기의 생각
을 절대적인 것으로 고집하지 않고 좀더 바른 것에 따라 살아가려고 노
력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인간의 죄는 바로 고집입니다. 자기의 생각
을 절대화하는 그 고집입니다. 또한 어거스틴이 말하는 대로 교만이기도
합니다. 자기 자신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그 교만입니다. 이런
교만은 곧 인간이 심판할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서려는 욕심입니다.
언젠가 미국 대통령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미국
헐리우드 영화는 이렇게 대통령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자주 만듭니다.
때로는 대통령이 가장 애국적인 사람으로, 정의를 위해서 몸을 던지는
사람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권모술수의 화신으로 등장하기도 합니다만
대개는 긍정적인 쪽으로 모아집니다. 아마 미국 사람들은 대통령을 자기
들의 정체성에 대한 표징으로 여기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지 내가 본 이
영화에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어느 나라에 대량살상무기가 장착되었다
는 정보를 받았습니다. 정부 각료와 군 수뇌부는 당장 군사 공격을 감행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때 대통령은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가 공격
해야 할 그 건물에는 이런 사실을 모르고 청소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것
이다. 그 청소부는 몇 명 아이들의 아버지일 것이다. 내가 공격 명령을
내린다면 이런 사람이 죽을 수밖에 없는데, 내가 고민해야 하지 않겠는
가? 미국 대통령들이 이런 고민을 실제로 하는지 않는지는 잘 모르겠습
니다. 아마 지미 카터 대통령을 대상으로 한 영화가 아니었을까 생각됩
니다. 그런데 지난 이라크를 공격한 부시 대통령을 보면 아무리 좋게 생
각해도 이런 최소한의 인간적 고민을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다는 이유 때문에 수 천명의 군인과 민간인이 죽는 전
쟁을 일으켰다고 하는데, 이제 그런 정보가 사실이 아닐 뿐만 아니라 의
도적으로 왜곡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심판
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좀더 진지하게 생각했다면 유엔에서도 허락
하지 않고 거의 모든 나라가 반대한 전쟁을 일으킬 수는 없었을 것입니
다. 말로는 기독교인이라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들의 이념을 절대화했다는 말씀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이 심판을 예수님에게 맡기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씀은 이 심판의 기준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속한 사람들은 구원을 받고 거기서 벗어난 사람은 말 그대로 심판을 받
습니다.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이 예수님에 의해서 심판을 받습니다. 모
든 인간의 역사 전체가 예수님을 기준으로 심판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속한 사람들은 이 심판을 두려움으로 생각하
지 않습니다. 자기가 믿고 그렇게 살아왔던 그 기준으로 심판이 임하기
때문에 오히려 설렘으로 이 심판의 때를 기다릴 수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에게 속했다는 사실이 단순히 교회에 나왔는가 아닌가
에 만 달려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라는 체제 안에서 예수
님의 말씀과 아무런 상관없이 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그 사실
만으로 예수님에게 속했는가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이미 오늘 베드로의
설교 앞부분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하나님은 겉모습을 보고 사람을 차별
하지 않으십니다. 심판의 기준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그분의 인격에 자
기의 삶을 걸어두고 살았는가 하는 점입니다. 본문 36절에 보면 하나님
이 이스라엘에게 선포하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선포하신 '평
화의 복음'이라고 증언되어 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고 남녀
를 차별하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차별하는 게 아니라 그들 사이에 평화
를 이루어나가는 삶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인간들의 모든 구별과 차별
로 인해서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을 당하셨지만, 하나님은 그 예수님을
살리셨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이 인간의 차별을 철폐시켰다는 의미입니
다. 그리고 이런 기준으로 마지막 때에 인간의 모든 역사를 심판하십니
다.

차별이 없는 사회를 향하여
오늘 베드로는 어려운 결단을 했습니다. 경건한 유대인이 이방인 로
마 장교의 집에 들어갔습니다. 아마 상당히 많은 생각을 했겠지요. 민족
적인 면에서나 종교적인 면에서나 도저히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는 하나님의 가르침에 마음을 열어놓았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였습
니다. 이방인을 차별하지 않으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생각했
기 때문에 가능한 행동이었습니다. 기독교는 겉모습으로 차별하지 않는
미래의 사회를 향해서 줄기차게 달려나가야 합니다.
이런 삶의 지향성이 그렇게 간단하게 해결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현재의 이 세상을 해석할 수 있어야만 우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이런 사회를 일구어나갈 수 있는지 그 대답이 주어집니다. 이 세계가 겉
으로는 매우 그럴듯하고, 어떤 면에서 세련되고 화려한 것 같지만, 그리
고 민주적이고 평등한 것 같지만 속으로는 옛날에 비해서 공동체성이 훼
손되어간다는 점에서 훨씬 미숙한 지도 모릅니다. 그냥 저 잘난 맛에 사
는 사회가 되어갑니다. 재주껏 벌어서 마음껏 즐기면 살면 된다는 식의
생각이 만연해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풍토 속에서 차별을 받지 않기 위
해서 우리는 안간힘을 쓰면 살아갑니다. 죽을 고생하면서 이런 구조에서
용케 살아남기 위해서 발버둥을 칩니다. 미국의 이라크 침략 이후에 국
제 질서가 훨씬 노골적으로 이런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고, 경제만능주의
적 정치와 교육 체제 속에서 한국에 살고 있는 개인들이 이렇게 살아갑
니다. 만약에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이나 못하는 아이들을 전혀 차별 없
이 대한다면 억울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이
렇게 유별하게 교육열이 높다는 것은 이 사회가 차별을 통해서 작동되고
있다는 사실의 반증입니다.
몇 년 전인가 여자 장애인이 자살한 일이 있습니다. 그녀는 행상을
하면서 살아왔는데, 정부에서 생활보조금을 준다면서 이 행상을 그만두
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50여 만원(?)에 이르는 이 보조금으로는 그녀의
약값을 대기도 힘들 정도였습니다. 보조금을 받으면서 행상을 하면 그
즉시 불법이 됩니다. 그녀는 한동안 정부와 투쟁했습니다. 같은 장애인
단체와 시민단체가 지원했습니다만, 어느 날 시체로 싸늘한 시체로 발견
되었습니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투쟁하다가 도저히 헤쳐나갈 자신이
없어서 죽는다는 유서를 남기고 말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철저하
게 차별하는 사회를 민주사회라고 믿으면서 문명인처럼 착각하고 살아
갑니다. 민주주의가 잘못되면 우민정치가 된다고 하는데, 국민들이 깨어
있지 못하면, 또는 이기심에 머물러 있으면 이 사회는 형식적으로 아무
리 완벽한 민주적 제도를 확보했다고 하더라도 미숙한 상태를 벗어날 수
는 없습니다.
우선 기독교인은 이런 왜곡된 질서에 편승하면 안 됩니다. 베드로가
깨달았듯이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주시는 기준은 이런 것과는 전혀 다른
데 있다는 사실을 좀더 명확하게 인식해야만 합니다. 인간의 이런 국제
질서와 개인적인 삶이 결국 예수님이 전하신 평화의 복음에 근거해서 심
판 받는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살아야 합니다. 이런 기독교인
들이 늘어나면 이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서 조금씩이나마 진보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차별이 없으신 하나님의 뜻에 맞게 말입니다.

<2003.7.13, 샘터교회>

사도행전 10:3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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