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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창조의 위기와 구원

창조의 위기와 구원

(창 8:6-14)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 이야기는 창세기 12장부터 나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구체적인 역사입니다. 그 이전인 창세기 1-11장에 나오는 이야기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가 아니라 인류 보편의 역사입니다. 그걸 신학계에서는 원(原)역사(Urgeschichte)라고 합니다. 인류 역사의 근원이라는 뜻입니다. 거기에는 특이한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에덴동산의 선악과 이야기, 가인의 아벨 살해사건, 그리고 노아 홍수와 바벨탑 이야기입니다. 창조는 본래 완벽했습니다. 보기에 좋았다는 표현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 뒤로 이어지는 이야기의 특징은 창조와 대립되는 것들입니다. 인류의 조상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합니다. 형제 살해가 일어납니다. 급기야 하나님의 심판이 임합니다. 더 이상 물에 의한 심판이 없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한 인간은 하늘에 닿을 정도의 높은 탑을 건축하려고 시도했지만 이루지 못하고 대신 언어의 혼란만 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대립하는 이야기의 중심에 노아홍수 사건이 놓여 있습니다. 6-11장이 모두 직간접적으로 노아홍수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노아홍수 이야기를 아무런 선입관 없이 읽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뭔가 찜찜한 생각이 들 겁니다.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죽인 하나님은 동일한 하나님일까요? 자기 마음대로 만들어놓고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모두 죽이는 심보가 무엇인가요? 이런 질문은 아주 근본적인 것입니다. 아무도 피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이런 문제의식 없이 노아홍수 이야기를 무조건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게 능사는 아닙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도 우리는 비슷한 문제의식을 갖고 삽니다. 이 세상에는 전능하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 창조했다고 볼 수 없는 사람들의 운명이 많습니다. 이번 천안함 사고에서 목숨을 잃은 장병들의 운명은 참으로 비참합니다. 태어나면서 장애를 갖고 있거나 심지어는 어릴 때 죽는 일도 일어납니다. 창조의 하나님이 왜 그 행위 자체를 부정하는 일을 하실까요?

 

 

인간의 죄

     그 대답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세상이 끝나야만 완전한 대답을 알 수 있겠지요. 지금 우리는 부분적인 대답만 압니다. 구약성서가 말하는 대답은 인간의 죄입니다. 창세기 기자는 그 사실을 이렇게 전합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셨고 말입니다.(창 6:5) 그 죄의 뿌리는 이미 아담과 이브의 불순종(창 3장)과 가인의 아벨 살해(창 4장)에 놓여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의 표현인 자유를 죄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창세기 기자는 인간의 죄를 하나님이 사람 지은 것을 한탄하셨다는 말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한탄은 창 6:6, 7절에서 반복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한탄은 한탄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창조한 생명을 모두 죽이겠다고 하십니다. 창세기 기자가 전하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창 6:7)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모든 걸 알고 모든 걸 하실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한탄은 그걸 부정하는 것 같습니다. 인간이 자유를 방종의 기회로 삼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하나님이 모르신 것 같습니다. 이런 성서기자의 진술을 문자적으로 읽으면 곤란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얼마나 영악하고 교만하고 허황된지를 설명하는 문학적 수사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본질을 부정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인간이 악하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악과 죄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의 창조가 부정됩니다. 하나님의 본질이 부정됩니다. 하나님 자체가 부정됩니다. 이 사실은 역으로 죄의 본질을 가리킵니다. 죄는 창조의 부정입니다.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부정입니다. 하나님 자체에 대한 부정입니다. 생명의 부정입니다.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이런 설명이 복잡하게 들리시나요? 노아홍수라는 지구적 차원의 파멸이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리시나요?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문명사회가 하나님의 창조를 긍정하는지 부정하는지를 보십시오. 생명 지향적인지 반생명적인지를 보십시오. 현대 문명이 우리를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해주었으니 생명 지향적이라고 말할 사람은 설마 없겠지요. 제가 자주 예로 드는 교육 현장을 보십시오. 청소년들의 영혼이 풍요로워지고 있을까요? 그들이 생명의 신비에 마음을 열고 있을까요? 대학생들도 지금은 사회정의는 물론이고 인생의 낭만에 대해서조차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무엇보다도 가장 큰 반생명은 생태 파괴입니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현대 문명이 얼마나 생태 파괴적인지를 모르는 분은 없을 겁니다. 북극의 빙하가 급속도로 녹아내리고 있다거나 아마존 열대림이 급속도로 파괴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진 현상들입니다. 사람의 편리한 삶을 위해서 자연을 도구로 이용한 결과들입니다. 현대 문명과 단절된 사람들, 우리가 가난하고 미개하다고 보는 사람들이 마지막 심판 때는 의로운 사람들로 인정받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심판의 기준을 생태에 놓고 볼 때 그렇습니다. 많은 걸 소비한 사람들, 그래서 지구의 수명을 단축한 사람들은 그 책임을 져야겠지요. 어쩌면 제2의 노아홍수는 이미 시작했는지도 모릅니다. 그 속도가 느리게 보이기 때문에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노아홍수 시절도 역시 그랬습니다. 방주를 짓고 있던 노아에게 관심을 기울인 사람은 없었습니다. 모두 먹고 마시면 일상에 취해 있다가 졸지에 홍수를 만났습니다. 홍수가 시작된 뒤에는 그걸 피할 길이 없습니다.

     노아 홍수 이야기에서 궁금한 점은 하나님은 왜 인류 몰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취할 수밖에 없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죄가 문제라고 한다면 실제로 죄를 지은 사람만 골라내서 심판을 하지 왜 모든 사람을 죽일 생각을 하셨느냐, 하는 겁니다. 모든 인류가 죽어야 할 정도로 악하다고 말하는 건 좀 곤란합니다. 어른들은 그렇다 치고 어린아이들도 죄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노아 홍수에서는 갓 태어난 아이들도 피해가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인간만이 아니라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죽이겠다고 했습니다. 가축이 무슨 죄가 있나요. 하나님이 정의롭고 사랑이 충만한 분이라고 한다면 이렇게 싹쓸이 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심판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창세기 기자는 지금 말이 안 되는 방식으로 노아 홍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창세기 기자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절대성을 말하는 중입니다. 생명과 구원의 절대성을 말하는 중입니다.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창조, 그의 생명은 부분을 고치거나 개량하는 방식으로 이뤄지는 게 아닙니다. 총체적인 변화가 필요합니다. 무늬가 아니라 실체의 변화 말입니다. 몇몇 행동거지를 바꾸는 게 아니라 존재 자체를 바꾸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그 이전의 모든 창조물을 완전히 물갈이 하는 방식밖에는 없습니다. 그것이 노아 홍수 이야기가 말하려는 근본 메시지입니다.

     저는 오늘의 문명도 이런 방식의 근본적인 전환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마치 우주 물리학이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그 관점을 바꾸듯이 근본적인 전환이 요구됩니다. 이런 근본적인 전환이 무엇인지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소유에서 존재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자본에서 생명으로, 소비에서 누림으로 말을 갈아타는 것입니다. 경쟁 패러다임에서 상생 패러다임으로 근본적인 관점을 바꾸는 것입니다. 남북 대립에서 남북화해로, 자연 지배에서 자연과의 일치로 나가는 것입니다. 이런 설명이 너무 거창해서 작은 일로 울고불고 하는 소시민들에게는 공허한 이야기처럼 들리시나요? 이런 설명이 원칙적으로 옳다고 하더라도 실제 삶에서는 별로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렇게 생각이 든다면 우리가 반(反)창조, 반(反)생명, 반(反)생태의 현대 문명에 길들여졌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을 신앙 문제로 설명하는 게 여러분들에게 더 실감 있게 들리겠군요. 바울은 고후 5:17 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런 말도 일단은 실감이 가지 않을 겁니다. 예수를 믿어도 변한 게 하나도 없는데 무슨 새로운 피조물이냐, 하고 말입니다. 여러분, 기독교 신앙을 교양의 변화로 생각하면 큰 오해입니다. 삶은 세상의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그저 경건의 모양을 갖추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신앙은 피조물의 차원, 즉 하나님의 창조 차원입니다. 총체적인 생명의 차원입니다. 우리의 모든 실존, 우리의 운명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전적으로 새로워지는 운명을 말합니다. 만약 이런 인식과 경험이 없다면 여러분은 명목으로만 그리스도인일 뿐이지 실제적인 그리스도인은 아닙니다. 여기 모인 대다수의 교우들은 바울의 이 말에 동의할 겁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었으며, 이를 통해서 더 이상 죽음의 운명이 아니라 부활의 운명으로 자리를 옮긴 사람입니다. 전적인 변화입니다. 존재의 변화입니다.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죄의 운명으로부터 생명으로 인도하는 부활의 운명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삶을 지향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과거의 ‘나’는 지나갔고, 지금 ‘새 것’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기오스’, 즉 세상과 구별된 무리라는 뜻의 성도입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전적으로 새로운 삶으로 나가야 하듯이 창세기 기자는 세상의 전적인 변화를 기대했습니다. 그것을 희망했습니다. 하나님의 본성이 부정당할지도 모를 위험을 감수하면서 그는 노아홍수 이야기를 세상에 전한 것입니다. 여기까지의 이야기만 놓고 본다면 노아홍수 이야기는 절망과 좌절이며, 공포와 두려움입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 대립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까요. 우리 모두 조금 세월이 흐르면 죽어야 하듯이 우리 모두 노아홍수의 위협 앞에 노출되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노아홍수 이야기는 죽이는 이야기가 아니라 살리는 이야기입니다. 심판과 저주가 아니라 은총과 선택입니다. 그 길목에 선 사람이 노아입니다.

 

 

마른 땅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를 짓게 했습니다. 모든 생물 암수 한 쌍씩 방주에 실으라고 했습니다. 그 일이 다 준비되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사십일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하늘에서 비가 쏟아졌고, 땅에서 샘이 솟구쳐 올라왔습니다. 온 땅이 물로 가득했습니다. “땅 위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으니 곧 새와 가축과 들짐승과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라.”(창 7:21) 다섯 달이 지나면서 물이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노아의 방주가 아라랏 산 한 곳에 닻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산봉우리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또 사십 일이 지난 뒤에 노아는 방주의 문을 열고 까마귀를 날려 보냈습니다. 홍수 상태가 어떤지를 알아볼 생각이었습니다. 까마귀는 방주로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은 채 땅이 마를 때까지 계속 날아다녔습니다. 홍수 상태를 확인할 수 없었던 노아는 비둘기를 다시 날려 보냈습니다. 비둘기는 방주로 돌아왔습니다. 자기가 둥지를 짓고 살 곳을 찾기 못했기 때문입니다. 노아는 다시 칠일이 지난 뒤에 비둘기를 날려 보냈습니다. 비둘기는 감람나무 새 잎사귀를 물고 돌아왔습니다. 나무가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다시 칠일 후에 비둘기를 내보냈는데, 그 비둘기는 아예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둥지를 틀 자리를 마련했다는 뜻입니다. 결국 홍수가 난지 거의 일 년 만에 노아는 방주 뚜껑을 열고 마른 땅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창 8:13-19) 놀라운 순간입니다. 인류가 멸종의 위기를 넘어서 존속할 수 있는 계기였으니까요.

     방주에서 일 년 동안 생활하던 노아와 그 가족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상황은 암담합니다. 완전히 죽음과 같은 시간들이었습니다. 천지가 물로 뒤덮였습니다. 천둥과 번개가 내리칩니다. 해일이 밀려드는 장면을 상상해보십시오. 20층 아파트 크기의 바닷물이 덮칩니다. 하늘에서는 폭포수처럼 비가 쏟아집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노아라고 하더라도 심각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위기는 우리의 인류 조상들이 종종 겪었습니다. 한 가지만 예로 든다면 빙하기입니다. 빙하가 매년 수 킬로미터씩 내려왔습니다. 더 이상 먹을거리를 찾을 수도 없습니다. 몸이 약한 아이들과 노인들과 여자들이 죽어갑니다. 자기 종족이 멸종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겠지요. 우리 후손들도 그런 위기에 처해질지도 모릅니다. 견디기 힘든 나날이었지만 일 년 뒤에 노아는 드디어 마른 땅에 발을 내디딜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멸망당할 수밖에 없었던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새로워졌습니다. 이것은 제2의 창조였습니다.

     노아홍수 이후에 전개된 역사를 여러분은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은 바벨탑 건설을 시도했습니다. 무지개를 통해서 홍수가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한 결과입니다. 인간은 역사를 통해서 배우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똑같은 악을 반복합니다. 충격적인 일을 만나면 새로워지는 포즈를 잠시 취하지만 세월과 더불어 악한 길로 접어듭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도 역시 악의 반복입니다. 그들도 역사에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하나님이 홍수가 없을 것이라고 약속한 이유는 홍수 심판이 사람을 새롭게 하지 못하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 대한 기대를 접으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방식으로 구원의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그 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에서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례는 바로 그것을 가리킵니다.(벧전 3:21) 이런 구원이 너무 시시하게 보이시나요? 아닙니다. 노아홍수 같은 충격적인 사건이 인간을 새롭게 하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에서만 그게 가능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노아홍수와 같은 실존상실의 위기가 앞에 놓여 있더라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마른 땅이라 할 부활생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부활절 다섯째주일, 5월2일)

창세기 8: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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