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제자들의 출가 이야기
눅 5:1~11, 주현후 5주, 2022년 2월6일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눅 5:1~11절에는 예수님의 첫 제자로 부름을 받고 따라나선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이야기가 풍경화처럼 묘사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게네사렛 호숫가에 있을 때 사람들이 예수님의 설교를 들으려고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부들이 고기잡이를 끝내고 그물을 정리하던 한 배에 오르셨습니다. 그 배는 시몬의 배입니다. 시몬은 우리가 보통 베드로라고 부르는 그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시몬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앞에 나오는 눅 4:38절 이하에는 예수님이 시몬의 집에서 열병을 앓던 시몬의 장모를 고친 이야기가 나옵니다. 배에 올라가서 거기 모인 사람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하신 예수님은 시몬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 보더라도 이런 말씀은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고기잡이 전문가는 시몬입니다. 예수님은 목수로 살았기에 고기잡이에는 문외한입니다. 시몬은 당연히 예수의 말을 정중하게 거절해야 합니다. ‘당신이 하나님 말씀을 깊이 있고 은혜롭게 전하는 분이라는 사실은 제가 인정하지만, 고기잡이에서만은 저에게 맡겨두시지요. 호의는 고맙습니다만 그물 정리를 우선 끝내고 우리 집에 같이 가서 아침밥이나 드시지요. 저의 장모님이 준비해놓으셨을 겁니다.’ 이렇게 말하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시몬은 다르게 반응합니다. 5절 말씀을 들어보세요.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평소 나사렛 예수를 향한 시몬의 신뢰심이 아주 깊었나 봅니다. 그렇지 않다면 밤새도록 고생만 하고 실적이 없어서 이제 그물을 거두어들이고 빨리 집에 돌아가서 쉬어야 할 순간에 다시 그물질할 리가 없습니다.
저는 시몬의 이 진술이 그날 하루의 상황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인생 전반에 대한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평생 고기를 잡으면서 살았습니다. 앞으로도 아들딸 낳고 행복한 가정을 꾸려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가능한 한 고기를 더 많이 잡아야 합니다. 문제는 삶의 궁극적인 의미입니다. 밤이 새도록 수고했으나 아무것도 남은 게 없는 듯한 인생입니다. 나이가 드신 분들은 이 사실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재산을 어느 정도 모아서 노후가 살만하고, 자식들도 잘 키워서 다 일가를 이뤘고, 자신의 건강도 괜찮으니 이제는 즐겁게 인생을 즐기기만 하면 됩니다. 그게 행복의 기준입니다.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말합니다. 제가 보기에 정확한 생각이 아니고, 솔직한 말도 아닙니다. 밤새도록 수고하셨으나 ‘잡은 것’이 없다는 시몬의 고백이 더 정확하고 더 솔직합니다. 사람들은 이런 시몬의 고백을 인정하면 자기 인생이 부정될까 두려워서 이런 사태를 아예 외면합니다. 이와 연관해서 다음과 같은 C.S. 루이스의 말이 인상 깊습니다.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세 가지밖에 없다고 봅니다. 죽음을 갈망하거나, 두려워하거나, 무시하거나. 현대인들은 세 번째 것을 ‘건강한’ 태도라고 부르지만, 사실 그것은 셋 중에서 가장 불안정하고 위험한 태도입니다.”(『메리에게 루이스가』 139쪽)
시몬은 호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렸습니다. 놀랍게도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혔다고 합니다. 다른 배에 있는 친구들도 거들어야 할 정도입니다. 두 배가 만선이 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대박이다!’라고 외치면서 동네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잔치를 벌이면 됩니다. 아니면 동네 사람들에게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면 누구든지 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다고 떠벌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몬은 전혀 엉뚱한 행동을 합니다. 8절이 그 상황을 이렇게 전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앞으로도 늘 만선의 행운을 누리려면 예수를 계속 붙들어 둬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나를 떠나소서.”라고 말합니다. 자기를 죄인이라고 고백합니다. 조금 이상한 반응이지요? 9절과 10절에 따르면 고기가 많이 잡힌 것으로 인해서 시몬도 놀라고, 동행했던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시몬과 그 일행은 예수라는 인물에게서 자신들이 범접할 수 없는 아주 비상한 능력을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그런 인물이 옆에 있으면 자신들의 인간적인 한계가 여실히 드러나기 때문에 떠나 달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에게서 무엇을 경험한 것일까요?
생명 충만과 죄인 자각
저는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혔다는 사실을 눈여겨보시라고 다시 말씀드립니다. 그것은 다른 것으로 채워질 필요가 없는 생명 충만을 상징하는 사건입니다. 궁극적인 자유, 평화, 안식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통해서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삶의 차원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예수가 지옥에 있다면 자신도 지옥을 선택하겠다고 말했는지 모릅니다. 예수를 통한 이런 삶의 깊이를 여러분은 경험하셨습니까?
삶의 조건이 좋아졌으나 현대인들은 옛날 사람 못지않게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고 삽니다. 트라우마와 강박도 예상외로 많습니다. 그렇게 기질적으로 타고나기도 하고, 삶의 과정에서 그런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정신과 약물치료가 필요한 사람은 받아야 합니다. 심리치료도 필요합니다. 개인 상담이나 집단상담도 도움을 줍니다. 이런 일에는 정신과 의사나 철학자, 또는 사람의 마음을 잘 읽어내는 종교인들도 한몫을 담당합니다. 이를 위한 각종 티브이 프로그램도 있습니다. 일종의 힐링캠프라고 불릴만한 그런 치유 방법론들이 실제로 우리의 운명을 얼마나 바꿀 수 있을까요?
저는 그런 방법론이 필요하지만, 그리스도인이 그것에만 의존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인간의 영혼은 그런 심리학적이고 뇌과학적이면서 생리학적인 치료 방법으로는 닿을 수 없는 차원에 속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차원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이기에 하나님만이 우리를 근본적인 차원에서 치유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에게서 바로 그런 근본적인 치유를 경험했습니다.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자신들의 영혼에 참된 자유와 안식과 평화가 충만해지는 경험이었습니다. 겨울 밤하늘의 총총한 별처럼 아주 낯선 깊이를 경험했기에 시몬은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인이라는 자기 인식과 고백을 불편하게 여기는 현대인들이 많습니다. 자기는 잘못한 거 없다고, 자기는 늘 떳떳하다고 강변합니다. 잘못한 게 있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이기적 유전자 탓으로 돌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인이라는 말은 파렴치하거나 부도덕하다는 말이 아니라 생명의 능력이 자신에게 없다는 뜻입니다. 생명의 신비를 온전히 인식할 수도 없고, 그걸 성취할 수는 더더욱 없습니다. 이런 피조물로서의 숙명적인 한계를 눈치챈 사람들은, 목사나 신부나 승려나 철학자나 과학자나 시인이나 정치인이나 모두 자신을 죄인이라고 고백합니다.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를 낮춥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악을 악으로 갚지 않습니다.(롬 12:17) 오해는 마십시오. 정의롭지 않아도 괜찮다거나 불의에 항거하는 일이 잘못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싸울 때 싸우더라도 자기가 생명과 진리의 세계에서 무능력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싸우더라도 잘난 척하면서 싸우지 않고 부끄러워하면서 싸웁니다. 예수 버전으로 “ ‘예’ 할 때에는 ‘예’라는 말만 하고, ‘아니오’ 할 때에는 ‘아니오’라는 말만” 하면 됩니다.(마 5:37)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마 22:21) 바치기만 하면 됩니다. 속된 표현으로, 잔머리 굴리지 않습니다.
자신을 죄인(생명의 무능력자)으로 인식하고 고백하기는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생명의 무한한 깊이에 대한 인식이 먼저 필요합니다. 본문에서 두 번이나 반복해서 표현된 ‘놀라움’이 이에 해당합니다. 자신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예수 현상 앞에서 놀라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일상에서 놀라움을 얼마나 자주, 그리고 얼마나 강렬하게 경험하시는지요?
사람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와 사물이 모두 소립자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계실 겁니다. 사람을 구성하는 소립자와 고양이를 구성하는 소립자와 돌을 구성하는 소립자가 똑같습니다. 똑같은 소립자가 어떻게 결합하느냐에 따라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양자로 불리는 그 소립자가 입자인지 파동인지를 확인하기가 어렵습니다. 보통 때는 파동으로 존재하다가 누가 볼 때는 입자로 인식됩니다. 귀신 현상과 비슷한 겁니다. 이런 물리학의 세계도 알고 보면 정말 놀랍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소립자가 인간이라는 형태를 이루기까지의 그 아득한 전체 과정에 하나님이 개입하셨다고 믿습니다. 세상의 신비와 하나님의 창조 능력을 실제로 안다면 세상과 사물에 관한 자신의 인식이 얼마나 유치한지, 다른 사람에 관한 판단이 얼마나 피상적인지, 그리고 생명의 근본에서 얼마나 무능력한 존재인지를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경험한 사람은 자기를 높이는 데에 인생의 목표를 두지 않습니다. 스스로 높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자신과 남 모두를 불쌍하게 여기고 사랑합니다. 이럴 때 궁극적인 차원에서 구원 사건이 발생합니다. 영혼이 자유로운 인간이 됩니다. 오늘 본문의 시몬과 그 일행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제자와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에게서 바로 그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 경험이 너무 강렬하고 분명해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눅 3:22)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재가 수도승
예수님은 자신들을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시몬과 그 일행에게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대한 그들의 반응을 11절이 이렇게 전합니다.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이들은 이제 자신의 일상을 포기했습니다. 밥벌이 수단이었던 배를 육지에 댔고, 자신의 소유를 버려둔 채 예수를 따라서 방랑 수도자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이런 일이 그날 하루에 갑자기 벌어진 건 아닙니다. 예수가 시몬의 집에 들어갔을 때 열병에 걸린 시몬의 장모를 고쳤다고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시몬은 이미 예수를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들었을 겁니다. 앞으로 예루살렘 성지 순례를 떠날 것이니 함께 가볼 생각이 있느냐는 제안도 받았을지 모릅니다. 예수가 특별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아본 시몬은 오늘 사건이 있기 전에 이미 영혼의 떨림을 경험했을 겁니다. 그 결정적인 순간이 오늘 왔습니다. 이제는 더 미룰 수 없습니다. 예수의 제자로 살아야겠다는 거룩한 압박감이 그를 출가의 길로 인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고 해서 누구나 시몬과 그 일행처럼 출가의 길로 들어서야만 하는 건 아닙니다. 21세기 현실에서 그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지난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출가한 이들보다는 그냥 자기 일상을 영위하면서 살았던 그리스도인들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모두 출가한다면 누가 세속의 삶을 책임질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교 전체를 놓고 볼 때 준비가 된 일부 사람들만 출가 수도승으로 살면 충분합니다. 그러나 본질적인 차원에서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제자이기에 오늘 본문에 나온 시몬과 그 일행이 선택한 삶의 방향성만은 유지해야 합니다. 이를 저는 ‘재가 수도승’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습니다. 수도승이라는 말은 구도적인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모두 세속의 일상에서 구도적으로 사는 ‘재가 수도승’입니다. 그런 삶의 방향성이 없으면 우리는 유명무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인생을 끝내고 말 것입니다. 그게 자기 삶의 분량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그렇게 살아보십시오. 그런 분들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것입니다. 저는 죽을 때까지 꾸준히 흉내라도 내야겠습니다.
우리 집을 수도원 공동체로 여기자고 가족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수도원 안에서의 활동은 크게 기도와 노동으로 구분됩니다. 기도에 관한 일들은 일단 접어두고, 노동 문제는 이렇게 정리되었습니다. 저는 주로 텃밭과 마당과 나무관리와 건물 관리 등을 맡습니다. 집안일로는 진공청소기 작업과 음식물쓰레기 처리와 분리수거입니다. 가장 바쁘게 사는 둘째 딸은 독립된 작은 텃밭을 가꾸고, 차 마시는 방의 인테리어와 청소를 책임집니다. 아내는 화장실 청소와 꽃밭 가꾸기와 식사 준비입니다. 일전에 아내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식사 준비가 끝난 뒤에 부엌에서 남편과 딸을 불러도 잘 안 들리니까 중간에 종을 하나 달겠다는 겁니다. 한번 울리면 남편이 부엌으로 와야 하고, 두 번 울리면 딸이, 세 번 울리면 둘 다 모여야 합니다. 수도원 풍경을 작게나마 만들어가는 중입니다.
재가 수도승의 방향성을 시몬과 그 일행의 행동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앞에서 짚은 대로 그들은 배를 육지에 대고 모든 소유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다고 합니다. 일상을 멈추고, 소유에서 벗어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 사건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본주의 세상에서 살려면 재산도 어느 정도는 늘려야 하고 재미있는 일도 찾아야 합니다. 그런 세속의 일상을 하나님의 선물로 여겨야 합니다. 여기에 우리 재가 수도승의 딜레마가 놓여 있습니다. 이전투구처럼 작동하는 이 세상에 두 발을 딛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첫 제자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과 비슷한 삶의 방향성을 유지할 수 있나요? 그게 실제로 가능한가요?
정해진 대답은 없습니다. 각자가 답을 찾아야 합니다. 저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돈을 벌고 집을 사되 곧 버려두고 떠나야 할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사람을 사랑하되 헤어질 각오를 해야 합니다.(고전 7:29ff. 참조) 이 대목에서 정말 중요한 사실은 다음입니다. 여러분이 이미 잘 알듯이 일상이 멈춰야 할 순간이 곧 들이닥칩니다. 아무리 자신의 소유를 부둥켜안아도 언젠가는 강제집행이라는 방식으로 졸지에 빼앗깁니다. 그런 순간이 오기 전에 종종 일상을 멈추고, 조금씩이라도 자신의 소유를 내어주는 훈련을 구도적으로 수행한다면 그런 결정적인 순간이 닥쳤을 때 당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살아있는 지금 이미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해질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더 중요한 사실은 다음입니다. 이런 재가 수도승으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결정적인 능력은 ‘예수 경험’에서 주어집니다.
0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