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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

청함과 택함 "사이" (마 22:1-14)

청함과 택함 사이

22:1-14, 창조절 여섯째 주일, 20201011

 

 

삶이 무엇인지, 왜 사는지를 완벽하게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실은 소소한 사물의 근원도 우리는 모릅니다. 피상적으로만 알지 궁극적으로는 모릅니다. 그 궁극적인 차원은 피조물인 우리에게 비밀입니다. 그 비밀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예수님 당신도 하나님을 다 아는 게 아니라고 마 24:36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즉 하나님의 다스리심, 다시 말해 하나님의 구원을 일종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처럼 비유로 설명하셨습니다. 기독교인에게는 그 손가락이 지시하는 방향을 정확하게 바라보는 게 삶의 궁극적인 의미에 가까이 가는 최선의 길입니다.

 

하늘나라

오늘 설교 본문인 마 22:1-14절에 유명한 비유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2절에서 하늘나라(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는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비슷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그 내용을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임금은 이미 오래전에 초대장을 보냈습니다. 초대를 받은 사람들은 그 날짜에 맞춰서 미리 준비했어야만 합니다. 잔치 날짜가 되자 임금은 손님들을 데리고 오도록 하인들을 보냈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초대받은 사람들이 잔치에 오기를 싫어했습니다. 임금은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다른 하인들을 다시 보내서 이렇게 전했습니다.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22:4) 요즘으로 바꾸면, 대통령 취임 행사와 이어지는 리셉션에 참석하라는 정중한 초대입니다. 초대받은 사람들은 임금이 보낸 하인을 상대하지도 않고 각자 자기 밭으로 나가거나 사업하러 출타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임금이 보낸 하인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였다고 합니다. 이 사실을 전해 들은 임금은 군대를 보내서 살인자들을 진멸하고 마을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아무리 비유지만 너무 과격하게 들려서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같은 이야기를 다루는 누가복음에는 상황이 좀 더 자연스럽게 묘사됩니다. 어떤 사람이 잔치를 베풀고 사람들을 초대했습니다. 잔치가 열린 시간이 되어서 하인들을 사람들에게 보내서 오라고 일렀습니다. 초대받은 사람들은 세 가지 이유를 대면서 초대를 거절했습니다. 밭일로 바쁘고, 소 다섯 겨리를 시험하러 나가야 하고, 장가가야 한다고 말입니다. 하인이 돌아와서 주인에게 상황을 설명하자 주인은 길거리에 나가서 지나가는 아무나 데려오라고 하인들에게 시켰습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약간 다르게 보도하지만, 그 이야기가 전하려는 핵심 메시지는 똑같습니다. 처음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잔치에 들어오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를 마 22:14절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새번역 성경으로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부름받은 사람은 많으나, 뽑힌 사람은 적다.” NIV 성경은 청함받음을 초대받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청함받음, 부름받음, 초대받음은 비슷한 뜻입니다. 이렇게 청함을 받은 사람은 많은 정도가 아니라 모두에게 해당합니다. 세상에 태어났다는 사실이 이미 청함을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실이 얼마나 특별한 일인지는 여러분이 이미 다 알고 경험하셨을 겁니다. 거꾸로 어떤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했다고 신세를 한탄합니다. 우리의 현실을 보면 그런 말을 할만합니다. 개인적으로 큰 불행에 떨어진 사람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 사람들 이야기는 오늘 본문에서 핵심 주제가 아니라서 저는 더 깊이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다만 어떤 경우의 인생도 초대받지 않거나 못한 경우가 없다는 사실만은 확실하다고 말씀드립니다.

청함 받음

임금의 하인을 죽이기까지 한 이들을 파렴치하고 폭력적인 사람들이라고 보면 곤란합니다. 나름으로 합리적이면서 열심히 사는 사람들입니다. 성실하게 밭일을 하고 자기 사업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입니다. 평생 열심히 노력해서 얻는 수입으로 가족의 생활을 책임지고, 더 나아가서 어려운 사람을 돕기도 했을 겁니다. 이들의 삶은 높이 평가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종종 어려움을 겪게 되는 대목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에서 칭찬받는 이들을 성경이 무조건 칭찬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성경의 주장이 지나친 게 아닐까요? 비현실적인 게 아닐까요? 근면 성실한 삶 자체를 폄훼하면 안 되나 동시에 무조건 옳은 게 아니라는 사실은 눈여겨봐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이들에게 문제가 있었는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봅시다.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들이 구축해놓은 삶의 토대에 묶여서 임금이 베푸는 잔치의 즐거움을 모르고, 외면하고, 더 나아가서 부정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착하거나 성실할 수는 있지만 영적으로 둔감한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아는 것만 절대화하기에 그 너머의 삶을 외면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제사장들이 대표적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규정한 삶의 범주를 절대화했습니다. 율법이라는 범주만을 근거로 누가 옳은지 그른지를 재단했습니다. 그들의 눈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 자입니다. 성전을 허물라, 사흘 만에 짓겠다거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시비를 걸었습니다. 예수라는 존재 자체가 자신들의 삶을 근본에서부터 위태롭게 한다고 생각하여 로마 법정에 넘겨서 죽게 했습니다. 본문에서 임금의 하인들을 죽인 사람들과 같습니다.

오늘 우리는 돈이 완벽하게 지배하는 세상을 삽니다. 모든 일이 경제 논리로만 평가됩니다. 그 범주로만 삶을 바라보기에 크고 작은 싸움이 연일 계속됩니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말을 요즘처럼 절감하는 때가 없습니다. 지긋지긋하게 싸웁니다. 우리가 외국인 노동자를 대하는 태도를 보십시오. 미국인이나 인도인이나 모두 외국 노동자들인데 우리는 전혀 다르게 대합니다. 북한이 우리보다 더 잘살거나 최소한 우리만큼만 살아도 남북문제는 훨씬 좋게 풀릴 겁니다. 어떻게 보면 대학교 총장이 하는 일보다는 건물을 청소하는 분들의 일이 더 소중할 수 있습니다. 성형외과에서 사람들의 얼굴을 오늘의 상업적 미학만을 기준으로 뜯어고치는 일보다는 재활용 공장에서 재활용 가능한 물품과 안 되는 물품을 골라내는 일이 지구 건강의 차원에서 보면 더 귀한 일일 수 있습니다. 세상이 그렇게 판단하지 않는 이유는 돈에 있습니다. 임금 잔치의 소중함과 즐거움을 모를 정도로 자기 일에 묶인 본문의 사람들과 오늘 우리는 다를 게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자신들의 바쁜 일상이 언젠가는 끝난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 삶의 태도입니다. 밭일과 사업을 아무리 크게 일으켜서 소위 재벌이 된다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곧 끝나는 일 아닙니까. 몇 주일 전의 설교에서는 저는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객실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자리에 먼저 앉겠다고 다투지 않습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지금 자신의 일상을 소홀하게 대해도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밥벌이를 등한히 해서 가족 부양을 책임지지 않고, 더 나아가서 남에게 민폐를 끼쳐도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두 발을 땅에 딛고 사는 한 성실하게, 힘들더라도 성실하게 일상을 영위해야 합니다. 다만 그런 일은 끝나는 순간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12:13-21절에는 어리석은 부자에 대한 비유가 나옵니다. 풍년이 들어서 곡식을 쌓아둘 곡간이 부족했습니다. 곳간을 더 늘리고 모든 곡식을 그곳에 채울 계획을 짰습니다. 자신에게 말합니다. “이제 됐으니 잘 먹고 마시면서 마음껏 인생을 즐기자.” 하나님은 그에게 말합니다.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을 텐데, 네 소유가 누구의 것이 되겠냐?” 이 비유에 나오는 부자와 오늘 설교 본문의 청함을 받은 사람들은 똑같습니다. 자기가 열정을 불살랐던 모든 일이 끝난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정확하게는 모르는 게 아니라 모른척한 겁니다. 그러니 임금의 잔치 초대가 귀찮아지는 겁니다.

당신 말이 옳기는 하지만 돈 버는 일에 전력투구하지 않으면 생존이 위태로운 오늘의 현실에서는 안일하게 들린다고 생각할 분들도 계실 겁니다. 그런 분들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준 기도의 내용에 나오듯이 최소한 일용할 양식만은 떨어지지 않도록 열심히 사십시오. 일용할 양식이 복지 차원에서 제도로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서로 연대해야 합니다. 현실에서 볼 때 그게 보장되어야 임금 잔치 초대에 마음을 기울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들에게 문제는 일용할 양식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런 분들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문제는 대다수가 곡간 확장에만 관심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로 인해서 죽을 때까지 영혼의 깊이에서 울리는 생명의 소리를 외면하게 됩니다. 밭일과 사업 확장이 세계관으로 자리를 잡았기에 다른 소리를 내는 임금의 하인을 죽이고 맙니다. 영혼의 소리를 듣기 싫다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택함 입음

본문에서 임금은 잔치 자리를 채우기 위해서 특단의 조치를 내립니다. 길에 나가서 만나는 사람들을 잔치에 데리고 오게 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초대받지 못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끌어들이자 잔치 자리가 손님들로 가득 찼습니다. 이들은 택함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누가복음에는 없는 이야기가 본문 11절부터 나옵니다.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잔치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신약 주석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 예복 이야기는 별개 전승이었다가 마태복음을 기록한 사람에 의해서 이 자리에 편집되었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공동체의 특별한 상황이 여기에 반영되었을 겁니다. 그 상황을 우리는 모릅니다. 초대를 거절한 사람들과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들 모두 결국은 택함을 입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택함을 입은 이들에게는 두 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황송하게도 자신들이 왜 잔치에 들어왔는지를 모른다는 특징입니다. 원래 초대받았던 사람들은 귀족들과 왕족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초대를 거절했기에 길을 가던 평범한 사람들이 잔치에 들어오게 된 것뿐입니다. 만약 원래 초대받았던 사람들이 초대를 받아들였다면 길을 가던 이 사람들에게는 잔치에 들어갈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자신이 다 이해할 수는 없어서 기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어떤 놀라운 사건이 그들 앞에서 벌어진 겁니다.

비유적으로, 길을 가다가 어떤 외국인이 길을 묻기에 친절하게 가르쳐주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가 노벨 문학상을 받은 시인이었습니다. 기적인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나그네를 친절하게 맞았습니다. 그 나그네는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였습니다. 자신이 노력해서 천사를 만나겠다고 해서 만난 게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셨기에 우연히 만난 겁니다. 여러분은 세상을 천사를 만나듯이 살고 싶지 않으세요? 가능합니다. 영혼의 눈이 열리면 매일 여러분은 길을 가다가 얼떨결에 임금의 잔치에 들어간 사람들처럼 일상에서 기적을 만날 것입니다.

임금의 잔치에 택함을 받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다른 하나의 특징은 그들에게 악과 선의 기준이 적용되지 않는다는(10) 사실입니다. 이 말씀은 오해받기 쉽습니다. 악을 행해도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존재론적으로 선이기에 그가 베푼 잔치에 악인이 들어올 수 없습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악과 선은 사람의 기준에서 보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기준에 따르면 악은 율법을 범하는 것이고 선은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세리와 창녀는 악인입니다. 불행과 재난도 악이 일으키는 죄가 원인입니다. 욥의 친구들이 욥을 향해서 회개하라고 설득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악과 선의 기준이 폐기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예수님이 선포한 하늘나라는 절대적인 생명 나라라는 뜻입니다. 그런 나라에 들어가도록 하나님의 택함을 입고 싶지 않으세요?

 

사이에서

설교를 들으면서 여러분은 자신이 초대를 받은 건 분명하지만, 특히 예수를 믿는다는 점에서 그런데, 택함을 입은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 겁니다. 개인에 따라서 다르긴 합니다. 자신은 믿음이 분명해서 택함을 입은 사람이라고 확신할 수도 있습니다. 그게 사실일 수도 있고, 착각일 수도 있습니다. 사이비 이단 교도들도 대개 그런 착각에서 삽니다. 어떤 이는 잔치 초대를 거부할 기회만 찾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어느 쪽으로 기울어 있습니까?

제가 보기에 대개의 기독교인은 청함과 택함의 사이어디쯤에서 살아갑니다. 청함을 받았다는 말은 생명의 나라로 초대받았다는 뜻이고, 택함을 입었다는 말은 생명의 나라로 들어오도록 허락받았다는 뜻입니다. 청함은 구원의 가능성(possibility)이라면, 택함은 구원의 현실성(reality)입니다. 이를 사랑의 가능성과 사랑의 현실성으로 바꿔서 생각하거나 자유의 가능성과 자유의 현실성으로 바꿔서 생각해도 됩니다. 누구나 사랑의 가능성을 갖고 태어나지만 그걸 현실성으로 경험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가능성 언저리에서 머물다가 죽는 사람도 있고, 현실성에 가까이 다가가서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각각 다른 인생을 삽니다. 여러분 모두 택함에 가까운 위치에서 살고 싶을 겁니다. 다시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지금 나는 어디쯤에서 살고 있을까?”

잘 모르겠다.”라는 대답이 가장 많겠지요. 저 자신도 어느 위치에서 살고 있는지를 완전하게는 모릅니다. 성령만이 아시겠지요. 조심스럽게나마 자신의 인생이 어느 위치인지를 가늠해볼 수 있는 기준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삶과 세상을 어느 정도로 새롭게 느끼는지가 그 기준입니다. 바울 표현으로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점점 더 절실하게, 그리고 더 실질적으로 경험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어제의 자신과 오늘의 자신이 다르다는 사실을 가슴 시릴 정도로 절실하게 느낄 겁니다. 그래서 자기 죽음까지 새로운 차원에서 받아들이고 삽니다. 삶과 죽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경지까지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동의가 됩니까?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생명의 천국 잔치 자리에 오라고 청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들어갈 수 있도록 택함까지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아멘.

마태복음 22:1-14
https://youtu.be/wHK6dSakpL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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