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교회의 송영
딤전 1:12-17
바울의 고백
자신의 제자인 디모데에게 개인적으로 보낸 편지가 이렇게 기독교의 경전이 될 것이라고 이 편지를 쓴 바울만이 아니라 그 당시의 어느 누구도 몰랐을 것입니다. 이런 성서에, 특히 개인과 개인 사이에 오갔던 서신을 오늘 우리가 읽을 때는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로 접근해야만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나눈 연애편지를 세월이 한참 흐른 다음에 제3자가 읽는 경우와 비슷하니까요. 우리가 이런 개인적인 서신을 가능한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본문에만 한정하지 말고 초기 기독교의 신앙적 토대에서 읽어야만 합니다. 더 나아가서 그 이후의 기독교 역사도 역시 성서읽기에서 중요합니다. 즉 기독교 신앙의 부분적인 대목을 다룬 서신을 전체 기독교 사상 안에서 읽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전체적인 기독교 사상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노력이 곧 신학의 역할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도 보기에 따라서 아주 간단하기도 하고, 매우 은혜롭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부분적인 것에만 매달리게 되면 결국 우리는 초기 기독교 전체의 신앙적 줄거리를 따라잡을 수 없고, 따라서 본문도 충분하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사도 바울의 개인적인 신앙 경험과 초기 기독교 전체의 신학이 맞닿아있기 때문에 우리는 훨씬 조심스럽게 접근해야만 합니다.
바울은 12절부터 자신의 과거 행적을 반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사도행전과 그 이외의 여러 서신을 통해서 잘 알고 있듯이 철저하게 율법에 따라서 살았던 바리새인 바울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를 핍박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기독교 공동체를 반대하던 사람이 이제는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사람으로 변했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은총이었다는 게 바로 바울이 말하려는 핵심입니다. 자신의 회심에 대해서 언급하는 다른 대목에서는 늘 ‘다메섹’ 사건에 토대를 둔 부활한 주님과의 만남을 거론하는데 여기서는 그런 이야기가 생략되었습니다. 디모데가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이 신앙적 사건의 의미를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죄인들 중에서 가장 큰 죄인입니다. 그런데도 하느님께서는 이와 같은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앞으로 당신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는 사람들에게 나를 본보기로 보여 주시려고 먼저 나에게 한량없는 관용을 베푸신 것입니다.”(15,16절).
여기까지의 이야기는 우리가 자주 들었던 내용입니다. 바울에게서도 들었지만 그 이외에 많은 기독교인들에게서 들었습니다. 한 개인에게 다가가는 실존적인 신앙 체험은 요즘도 똑같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 기본 패턴은 비슷합니다. 죄인으로 살던 사람이 이제 예수를 믿고 새 사람이 되어서 구원과 생명을 얻었다는 식입니다. 그런데 ‘죄인들 중에서 가장 큰 죄인’이라는 바울의 진술에서 의미하는 죄는 어떤 도덕성이라거나 실정법과 관계된 것이 아닙니다. 생명이 아닌 것에, 즉 율법에 묶여서 살아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율법을 절대화함으로써 결국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식하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그는 죄의 뿌리를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를 통해서 복음의 세계로 들어온 다음에 율법주의자들과 끊임없이 투쟁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앞대목인 3-11절에서도 에베소 교회의 율법주의자들을 비난했습니다. 그들은 “그릇된 교리를 가르치거나 꾸며 낸 이야기나 끝없는 족보 이야기에 정신이 팔린” 사람들이었습니다.
교리의 절대화
율법을 절대화함으로써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곧 죄라는 바울의 인식은 우리에게 매우 소중한 것을 가르칩니다. 즉 우리도 여전히 어떤 교리를 절대화함으로써 그 안에 안주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이 아무리 귀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 자체가 하나님이 아닌데도 하나님처럼 생각함으로써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멀어진 율법주의가 오늘 우리에게도 매우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도그마’라고 합니다. 어떤 생명을 담고 있는 그릇에 불과한 교회의 도그마가 신자들의 정신생활을 포위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은 생명의 길이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자기에게 익숙한 생활, 그런 사고방식에 철저하게 의존함으로써 일종의 편안함을 느끼고 살아갑니다. 다시 한번 더 말씀드립니다. 바울에게서 죄는 율법, 틀, 고정관념에 묶여서 하나님을 못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리의 절대화인 ‘도그마’로부터 벗어나기가 참으로 힘들다는 게 문제입니다. 일종의 ‘패러다임 쉬프트’가 일어나는 일은 거의 혁명적인 발상의 전환이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예컨대 타종교에 구원이 없다는 고정관념이 우리의 인식을 지배하게 되면 그것을 벗어나기가 좀처럼 어렵습니다. 북한 공산당은 모두 나쁜 놈들이라는 생각도 바뀌기 힘듭니다. 내가 여기서 타종교도 좋다거나 공산당도 좋다는 뜻으로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고착된 사고방식으로 인해서 훨씬 근원적인 세계로 들어가지 못하는 그런 현상을 설명하는 것뿐입니다. 집사람과 음악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가 종종 있는데 그 음악 경험도 역시 그렇더군요. 피아노 음악을 단지 손가락 운동으로만 생각하는 학생들에게 원초적인 음악의 세계를 경험하게 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철저하게 율법의 범주 안에서 하나님을 인식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는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은총과 관용을 언급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어떤 음악학도가 전혀 새로운 음의 세계로 들어간 것처럼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면 자기에게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그것은 곧 하나님의 은총과 관용입니다.
하나님의 속성
결국 바울은 절대화한 율법의 세계를 벗어나서 근원적인 세계를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인식의 경험을 초대교회의 ‘송영’으로 고백합니다. “영원한 왕이시며 오직 한 분뿐이시고 눈으로 볼 수 없는 불멸의 하느님께서 영원무궁토록 영예와 영광을 받으시기를 빕니다. 아멘.”(17절). 바울은 이 송영을 뒤에 가서 다시 반복합니다. “하느님은 오직 한 분이시고 복되신 주권자이시며 왕 중의 왕이시고 군주 중의 군주이십니다. 그분은 홀로 불멸하시고 사람이 가까이 갈 수 없는 빛 가운데 계시며 사람이 일찍이 본 일이 없고 또 볼 수도 없는 분이십니다. 영예와 권세가 영원히 그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아멘.”(6:15,16절).
바울이 왜 이런 송영을 부릅니까? 율법의 한계로부터 벗어나서 예수의 복음을 접함으로써 다시 새롭게 열리는 하나님의 세계를 경험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노래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근원으로 돌아가는 경험입니다. 그 근원이 곧 하나님이십니다. 예배를 드릴 때마다 교회가 드리는 찬송은 이런 점에서 우리의 가장 근원적인 신앙고백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중심이 되는 찬송이야말로 참된 찬송이라는 뜻입니다. 한국교회에서 자주 부르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 같은 복음 찬송은 사실 찬송이라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의 심리와 감정과 정서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울이 제시하고 있는 초대교회의 송영은 하나님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왕이십니다. 왕이 의미하는 바는 곧 ‘통치’입니다. 자본과 소비와 놀이가 통치하는 이 시대에 하나님이 이 세상을 통치한다는 이 찬송이 가능할까요? 교회성장이 최고의 가치가 되어 있는 한국교회 안에서 하나님만이 통치하신다는 찬송이 유효할까요? 이런 찬송을 진정으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의 통치를 전혀 다른 지평에서 인식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바울을 비롯한 초대 기독교인들이 인식한 바로 그런 생명의 통치를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 왕이신 하나님은 한 분뿐이십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라면 이 세계도 역시 하나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하나로 생각할 줄 모릅니다. 이 세계를 하나로 볼 수 있으려면 이 세계의 비밀과 신비에 눈을 떠야만 합니다. 교회마저 하나가 되지 못한 마당에 하나님이 한 분이며, 이 세계가 하나라는 찬송을 부른다는 것은 위선이겠지요.
한 분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시각을 뛰어넘어 계십니다. 눈으로 볼 수 없다는 말은 단지 감각적이지 않다는 뜻만이 아니라 우리가 예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존재하신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의 질서를 절대화하는 사람들은 이것과 전적으로 다른 하나님의 나라, 새 예루살렘과 새 땅, 새로운 에온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초대 기독교인들은 그런 세계를 기다리면 살았습니다. 그게 곧 대강절 신앙입니다.
영원하고 하나이며,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은 불멸이십니다. 도대체 불멸이 무엇일까요? 아직 우리는 그 실체적 의미를 모릅니다. 다만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유한하다는 사실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가 부른 이 찬송의 의미는 불멸이라는 용어의 명확한 해명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의미합니다. 그 초월을 불멸이라고 노래하는 것뿐입니다. 간혹 나중에 죽어서 하늘나라에 가면 죽지 않고 영원하게 산다는 말을 듣습니다만 영원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아직 모릅니다. 그러니까 이런 성서 용어를 여기서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이 무한정 계속되는 것으로 받아들이면 크게 오해하는 것입니다.
영예와 영광
그렇다면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구체적으로 확실하게 말할 게 하나도 없다는 뜻이냐, 하고 질문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명시적으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는 곧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된 하나님의 최종적인 현실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종말이 되어야만 드러나게 될 궁극적인 현실입니다. 그 종말이 오기 전까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또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신비하게 존재하시며 또한 그런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영원무궁토록 영예와 영광을 받으시기를 빕니다. 아멘.”이라는 초대 기독교의 찬송이 단지 수사적 의미에서만 불려진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과 하나님의 관계를 가장 정확하게 해명해주는 찬송입니다.
우리는 이런 용어를 만나면 당황합니다. 도대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기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예배를 장엄하게 드린다든지, 선교에 나선다거나, 혹은 두 손을 높이 들고 찬양하는 것쯤으로 생각합니다. 가능한대로 세상의 일을 버려두고 교회에 속한 일을 하는 게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원칙적으로는 옳습니다만, 훨씬 근원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서 주인 되도록 하는 게 곧 그분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왕정시대에 왕은 모든 사람들의 영광을 받았다고 하는데, 이는 곧 모든 사람은 왕 앞에서 절대로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비록 국가를 위한 일을 의논하더라도 자신의 뜻이 아니라 왕의 뜻이 드러나는 것에만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도 역시 자기 자신을 없애고 하나님의 뜻만 드러나도록 하는 게 곧 그분에게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게 자기의 뜻을 죽이고 하나님의 뜻으로 드러내는 것인지 분간하기 어렵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이 판단할 수는 없고 오직 자기 자신에게서 활동하시는 성령만이 판단하실 수 있습니다. 아마 자기 자신도 대략적으로는 인식할 수 있습니다. 표면적이든지 내면적으로든지 자기를 내세우면 결코 참된 생명을 발견할 수 없고 대신 온갖 욕망과 성취욕과 자기에 대한 관심만 난무하게 됩니다. 비록 선교사로 활동하더라고 목사로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상당히 많은 경우에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기의 영광을 획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영적으로 깨어있지 않으면 자기 자신도 모르게 그런 자기에게 영광을 돌리려는 마음이 자기 자신을 지배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바울과 더불어 초대교회의 송영이 의미하는 영적인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자기가 주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면 우리는 참된 생명을 얻습니다. 이 생명의 비밀을 잘 간직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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