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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심판과 오늘, 9월11일

http://wms.kehc.org/d/dabia/9월11일.MP3http://wms.kehc.org/d/dabia/9월11일.MP32005. 9.11.         롬 14:1-12
최후심판과 오늘

삶의 다양성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에는 우리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는 내용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성서 전체에 바로 이런 특징이 있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예컨대 레위기에 묘사되어 있는 수많은 율법의 시행세칙과 성막 제조방식, 또는 역대기에 등장하는 여러 족보 이야기는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더라도 우리와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성서가 이런 내용을 담고 있는 이유는 성서 시대의 사람들이 우리와 전혀 삶의 방식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중에서 주술적 세계관은 직간접적으로 성서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2절 말씀을 보십시오. “어떤 사람은 믿음이 있어서 무엇이든지 먹지만 믿음이 약한 사람은 채소밖에는 먹지 않습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오늘 우리로서는 그렇게 실감이 가지 않습니다. 이 구절을 단순하게 해석한다면, 믿음이 있는 사람은 잡식주의자이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은 채식주의자라는 말이 될까요? 여기서 아무 것이나 먹는다는 말은 육식까지 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 따른다면 로마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채식주의자와 육식주의자들이 서로 다투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바울이 이런 문제를 이렇게 구체적으로 거론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우리가 그 당시 로마 교회의 상황을 정확하게 따라간다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상식적으로 어느 정도는 추정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채식주의자는 어떤 사람들일까요? 바울은 그들을 가리켜 믿음이 약한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육식을 하는 사람들을 믿음이 강한 사람들이라고 보는 것은 말씀을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믿음이 있다거나 약하다는 말은 신앙의 유형을 의미하는 것이지 실제로 강하거나 약한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쨌든지 채소만 먹고 산다는 것은 어떤 규칙에 묶여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뜻이겠지요. 믿음은 자유가 확대되고 심화되는 것인데, 그것이 제한되는 삶이니까 채식주의자의 삶을 가리켜 믿음이 약하다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이들이 채식주의를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가장 우선적으로 이 사람들은 기독교인이 되기 전에 에세네 학파에 속했을지 모릅니다. 그들은 예수 당시에 사해 부근에서 일종의 금욕적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학자들의 의견에 따르면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회개하라고 외친 세례 요한이 이런 에세네 학파 출신이라고 합니다. 종교는 무언가 세속과는 구별된 것을 가르친다는 점에서 금욕적이고 윤리적인 생활태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 것을 기독교인의 가장 전형적인 삶의 태도라고 생각하는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채식주의를 고집한 또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상 앞에 놓였던 고기에 관한 문제(고전 8장)을 참조한다면, 그들이 우상을 거절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에 시장에서 파는 고기들은 대개가 우상 앞에 놓였던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도 이웃에서 제사 지내고 보내준 떡을 먹지 않는 기독교인들이 있듯이 초기 기독교인들 중에서 시장에서 파는 고기를 먹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문제를 약간 다른 시각인 경제학적이 관점에서 해석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즉 로마서의 이 채식과 육식의 문제는 단지 금욕과 우상의 차원이라기보다는 교회 안에서 실행되던 성만찬과 연관된 문제라는 것입니다. 초기 공동체에서는 두 가지 종류의 성만찬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말 그대로 세례 받은 사람들만 참여할 수 있는 성찬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회원들이 참여할 수 있는 애찬입니다. 고전 11장에도 보도되고 있지만 일종의 공동식사라 할 애찬이 종종 문제가 되었습니다. 자기 형편에 따라서 먹을거리를 가져와서 함께 나누어 먹는 이 애찬은 공동체의 친교를 위한 것인데, 여기서 서로 갈등이 싹트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혼자서 배부르게 먹으려고 욕심을 부리고, 또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편을 갈라서 먹는 일들이 생겼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식사를 못하는 사람도 생기고, 먹을 걸 많이 가져오지 못한 사람 중에서는 열등감에 싸이는 사람도 생겼습니다. 채식주의자라는 말은 결국 가난한 사람들을 가리키고, 육식주의자는 부자를 일컫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 사이에 벌어진 갈등을 바울이 이미 고전 11장에서도 경고했고, 지금 로마서에서도 다시 언급하고 있다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어떤 해석이 본문에 가장 가까운 것인지 저로서도 단정적으로 말하기 힘듭니다. 다만 똑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인들이라고 하더라도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삶의 다양성은 어쩔 수 없는 현상입니다. 어떤 사람은 채식만으로 살고, 어떤 사람은 육식까지 합니다. 5,6절을 보면, 어떤 사람은 어떤 특정한 날을 지키는 사람들도 있고, 그것을 하찮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손 없는 날을 택해서 이사하듯이 유대인들도 안식일만이 아니라 어려 절기를 꼼꼼히 챙기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삶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다양성의 파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 자체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습니다. 그 다양성 사이의 일치를 파괴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게 어떻게 파괴됩니까? 3절에 의하면 서로 ‘업신’여기는 것이 파괴의 주범입니다. 10절에 의하면 형제를 ‘심판’라고 ‘멸시’하는 것이 문제의 근원입니다.
이 본문을 읽는 여러분은 로마의 기독교인들은 신앙적으로, 인격적으로 형편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까짓 거 채식을 하든지 육식을 하든지, 특정한 날을 지키든지 않는지 그게 무슨 문제라고 그것으로 상대방을 업신여기고 비판하는 걸까, 하고 말입니다. 지금 우리는 교회 안에서 이런 채식과 육식 문제로 크게 다투지는 않습니다. 물론 술, 담배 문제는 경우에 따라서 문제로 불거지기도 하지만 그렇게 노골적으로 심각해지는 일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2천 년 전 기독교인들 보다 신앙이 좋다는 말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본 성질을 없앨 수 없습니다. 다양성 안에서의 일치를 파괴하는 힘들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주 순간적으로 서로 업신여기고, 서로 멸시하고, 서로 배척하는 삶으로 빠져들 수 있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한국교회는 그 어느 때 못지않은 소용돌이에 휘말렸습니다. 서울 천호동에 있는 광성교회 사건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가운데서 교회의 일치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조직폭력배를 동원하면서까지 교회당을 차지하려는 목회자와 교인들이 서로 패가 갈라져서 싸웠습니다. 그들은 진리 투쟁이 아니라 단지 인간적 갈등으로 한국교회 얼굴에 똥칠을 할 정도로 싸웠습니다. 영락교회 사건도 겉모양만 세련된 것처럼 보일 뿐이지 그 내용은 여전히 작은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치의 파괴입니다. 요즘은 대구제일교회가 이런 분란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장로님들이 담임 목사를 노회에 고발했다고 하는군요. 내용은 자세하게 알 수 없지만 최소한 인격적으로 대화를 하더라도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인데, 혹은 한쪽에서 이해하면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인데, 이렇게 극한의 상황으로까지 진행되었다는 걸 보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투쟁적인 동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로마 교회만이 아니라 지금의 교회도 훨씬 더 사소한 것으로 서로를 업신여기면 살아가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이런 삶의 태도는 우리 사회 속에도 만연해 있습니다. 사회의 마이너리티나 낮은 층에 속한 사람들을 향한 멸시가 우리의 삶을 파괴시키고 있는 게 아닐까요? 언젠가 큰딸 지예가 이런 말 하는 걸 들었습니다. 어느 뜨거운 대낮에 친구와 함께 교정을 걸어가고 있었는데, 그때 풀밭에서 잡초를 솎아내고 있는 여자들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때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고 하네요. 우리는 저렇게 살지 않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공부해야 돼. 공부 못하고, 경쟁력 떨어지고, 어딘가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이질적인 대상으로 여기는 한 우리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평화와 그의 통치가 결코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겁니다.

심판의 때
바울은 “믿음이 약한 사람이 있거든 그의 잘못을 나무라지 말라.”고 충고했습니다.(1절). 이 말씀을 따른다면 아마 믿음이 약해서 채식만 하는 사람에게 문제가 있긴 있는 것 같습니다. 기본적으로 기독교 신앙의 기초인 자유를 상실하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려는 핵심은 비록 자기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다고 하더라도 자유롭지 못하게 사는 사람들을 나무라지 말고, 업신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채식주의자만 옹호하는 것도 아닙니다. 채식주의자도 역시 육식주의자를 비난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여러분이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에 별로 실감이 나지 않을 겁니다. 아, 그래. 기독교인들은 서로 용납하고 사랑해야 하는 거야. 서로 비판하지 말고, 관용을 베풀어야 해. 이런 그림들이 여러분 마음속에 이미 그려져 있을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리 그런 그림을 생생하게 기억하더라도 실제로는 여전히 서로 업신여기고, 잘난 체하고, 서로 비난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매우 용을 쓰기는 하지만, 그럴수록 마음만 복잡해질지 모릅니다. 마음속으로는 무시하고 싶지만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기독교인의 모습을 지키기 위해서 많은 힘을 쏟고 있습니다. 이런 걸 위선이라고 하는데, 오늘과 같은 험악한 시대는 이런 위선이라도 필요한 걸까요?
바울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는 그리스도가 살아있는 사람이나 죽은 사람 모두에게 ‘주님’이라는 사실을 상시시킵니다. 이 사실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셨다고 합니다. 그게 서로 업신여기지 말라는 가르침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여기서 죽음과 부활이 궁극적인 사건이라는 측면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모든 행위가 결국 의존해야 할 궁극적인 세계말입니다. 이런 궁극적인 사건, 그런 세계, 그런 생명이 우리의 일상과 일치할 때만 우리는 멸시와 비난이라는 우리의 본성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이런 궁극적인 생명과 상관없이 우리 스스로의 인격만으로는 결국 서로를 업신여기는 삶의 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냥 그래야 한다니까 노력하는 시늉만 할 뿐이지 실제로 그런 능력과는 거리가 멉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생명 사건과 우리의 상대적인 일상과의 일치가 곧 기독교의 영성입니다. 이런 영성에 의해서만 우리의 삶은 새로운 차원으로 돌입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모든 가르침의 초석으로 제시합니다. 이렇게 제가 설명한다고 하더라도 여러분에게는 이런 기독교 교리가 아직까지 매우 추상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도대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어떻게 우리 일상과 하나 된다는 말입니까?
우리는 그것의 근본적인 의미를 10절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형제를 심판할 수 있으며, 또 멸시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다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설 사람이 아닙니까?” 성서는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생명의 결정을 가리켜서 ‘심판’이라고 말합니다. 재림의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심판하신다는 말은 곧 궁극적인 생명이 완성된다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의 생명은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한 끼만 굶어도 배고프고, 학교에서 등수가 떨어지면 화가 납니다. 이게 다 생명이 완성되지 못한 증거들입니다. 물론 우리는 지금 무엇이 생명의 완성인지도  실증적으로 아는 게 별로 없습니다. 다만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시작되었으며,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을 통해서 현실이 된다는 사실만 약속으로 믿고 있을 뿐입니다.
바울의 말에 조금 더 세심하게 귀를 기울십다. 생명이 완성되는 심판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때에 우리는 각각 자기 일을 하느님께 사실대로 아뢰게 될 것입니다.” 심판은 바로 이런 사건입니다. 숨어 있던 것들이, 혹은 비밀이었던 것들이 모두 그대로 노출되는 사건입니다. 지금 우리의 실정법에 의해서 운용되는 재판은 결코 이런 비밀을 밝히지 못합니다. ‘X파일’로도 모든 실체가 드러나지 못할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생명을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생명의 비밀이 완전히 드러나는 때가 온다고 가르칩니다. 그때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의 때입니다. 이런 최후의 심판을 지금 여기서 자기의 삶과 일치해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오늘’ 우리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형제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할까요?


로마서 1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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