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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축제의 능력

축제의 능력

(눅 15:11-32)

 

 

누가복음 15장에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세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첫째는 잃은 양의 비유, 둘째는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 세 번째는 소위 탕자의 비유입니다. 세 비유의 공통점은 소중한 것을 잃었다가 다시 찾았을 때 느끼는 기쁨입니다. 차이점은 잃었던 대상이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양이고, 둘째는 돈이고, 셋째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 비유가 가장 길고 드라마틱합니다. 연극 무대로 치면 대충 4막으로 전개됩니다.

 

 

탕자 이야기

제 1막은 살림살이가 넉넉한 어느 집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기 몫의 유산을 미리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둘째 아들의 태도가 좀 괘씸해 보였지만 아버지는 요구한 대로 재산을 나눠주었습니다. 당시 풍습에 따르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유산을 미리 받을 경우에는 돌아가는 몫이 훨씬 작습니다. 둘째 아들은 자기 몫을 챙겨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 지루한 고향집을 벗어난 것입니다.

제 2막은 탕자의 새로운 삶입니다. 둘째 아들은 한번 멋지게 살아보겠다는 야망을 품었겠지요. 그러나 세상이 자기 뜻대로 되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원하지 않던 일들이 자주 일어납니다. 젊은이들에게는 그런 유혹이 더 강렬합니다. 그는 허랑방탕하게 살면서 재산을 탕진했다고 합니다. 입에 풀칠을 하기도 힘들어졌습니다. 그 나라에 흉년이 들자 그는 막노동판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일터가 돼지 농장이었습니다. 돼지는 유대인들에게 혐오의 대상입니다. 둘째 아들의 형편이 얼마나 절박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돼지 사료로 허기를 면해보려고 했지만, 그것마저도 뜻대로 안 됐습니다. 그는 어느 날 아버지가 계신 자기 집을 생각했습니다.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입니다. 거기에는 먹을 것이 많았습니다. 지금 자기의 처지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곳입니다. 빈털터리로 집으로 돌아가는 건 체면이 서지 않는 일이었지만 여기서 굶어죽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 품꾼으로 돌아갈 작정을 했습니다.

제 3막은 다시 아버지의 집입니다. 아버지는 거지 행색으로 돌아온 아들을 멀찍이서 알아보았습니다. 아들을 끌어안고 입을 맞춥니다. 아들은 하나님과 아버지에게 죄를 지었다고, 그러니 이제부터는 아들이라는 말을 들을 자격이 없노라고 말했습니다. 눈물콧물을 흘리면서 자기의 잘못을 인정했겠지요. 성서기자는 이 순간에 아버지가 아들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냐, 알았다, 너를 용서하마, 하고 말했을까요? 타지에서 얼마나 고생했냐, 하고 말했을까요?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종들에게 명령을 내립니다. 좋은 옷을 아들에게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고 했습니다. 옷, 가락지, 신은 아들의 신분을 그대로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아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문 안에 들어서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또는 크게 훈계를 들을 거라는 걱정을 했겠지요. 그런데 아버지는 아무 소리도 않고 집을 떠나기 전의 그 아들로 그대로 인정합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살진 송아지를 잡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눅 15:23,24) 그러자 거기 모였던 모든 이들이 즐거워했다고 합니다.

제 4막은 잔치를 벌이고 있는 집밖에서 펼쳐집니다. 밭에서 하루 종일 일하다가 집으로 돌아오던 큰 아들은 집안에서 들려오는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종을 불러 자초지종을 물었습니다. 종들에게서 사실을 전해들은 큰 아들은 화가 나서 집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 장면이 매우 상징적입니다. 밖에서 떠돌던 둘째는 집으로 들어갔고, 집에서 효자 노릇하던 첫째는 밖에 머물렀습니다. 아버지가 밖으로 나와서 큰 아들에게 들어가자고 권했습니다. 큰 아들은 자기의 불만을 털어놓았습니다. 그의 불평은 아버지의 행위가 공정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한눈팔지 않고 아버지를 섬긴 자기를 위해서는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잡아주지 않았으면서 창녀들과 노느라 재산을 낭비한 작은 아들을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았다는 겁니다. 이렇게 불공정하게 일을 처리하느냐는 주장입니다. 나름으로 일리가 있습니다. 제 3자가 보았으면 큰 아들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할 겁니다. 아버지는 큰 아들에게 이렇게 해명합니다. 아버지의 재산은 살진 송아지만이 아니라 모두 큰 아들의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 사실을 알기만한다면 큰 아들은 섭섭할 게 하나도 없습니다. 이에 반해 둘째 아들의 형편은 전혀 다릅니다. 그는 재산도 없고 아들 자격도 없습니다. 그는 잃었던 자식이었습니다. 그를 다시 얻었으니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위의 비유에서 어떤 이들은 둘째 아들을 주인공으로 여깁니다. 그게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전체 이야기에서 둘째 아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큽니다. 그가 재산을 받아서 외국으로 나가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아버지에게 돌아오는 이야기는 세상에 취해서 살다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기로 한 기독교인의 전형적인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야기의 전체적인 구조에서 본다면 둘째 아들이 주인공은 아닙니다. 아버지가 주인공입니다. 그래서 어떤 성서학자는 이 이야기를 탕자의 회개가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으로 읽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이 비유에서 둘째 아들만이 아니라 첫째 아들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결론 부분에서 첫째 아들과 아버지의 대화가 나옵니다. 비유의 근본적인 교훈도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눅 15장이 다루고 있는 세 가지 비유가 어떤 상황에서 나왔는지를 보면 이 사실이 더 확실해집니다. 눅 15:1,2절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하나는 세리와 죄인들이고, 다른 하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오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다음과 같이 수군거렸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이런 수군거림은 비유에 나오는 첫째 아들의 불평과 거의 똑같습니다. 15장 전체를 읽는 독자라고 한다면 세리와 죄인이 둘째 아들로,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큰 아들로 대비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둘째 아들이 아니라 첫째입니다. 그는 평소에 잘 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아버지와 대립했습니다.

누가복음 기자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초기 기독교가 처한 삶의 자리를 간접적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유대인들이, 특히 종교적인 엘리트 집단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우습게 생각하는 이방인들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꾸려갔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랐던 유대인들을 대표합니다. 유대교와 이방 기독교는 시간이 지나면서 크게 대립했고, 결국 이방인 기독교 공동체는 더 이상 유대교 안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누가 공동체는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공생애 중에 말씀하신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를 기억해하고 복음서에 기록하게 된 것입니다. 자신들을 둘째 아들로, 유대인들을 첫째 아들로 인식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일단 누가공동체의 이런 노력을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이 비유에 담긴 더 근원적인 영적 가르침의 자리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축제로서의 삶

저는 설교 말머리에서 눅 15장에 나오는 세 가지 비유의 주제가 동일하게 잃은 것을 찾았을 때의 기쁨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이 세 번째 이야기에서 극대화합니다. 아버지는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 모두가 즐거워하고 기뻐했습니다. 문제는 거듭 말씀드리지만 큰 아들입니다. 그 많은 사람 중에서 큰 아들 한 사람만 잔치에 참여하기 싫어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제가 앞에서 설명한대로 성서본문이 정확하게 전달합니다. 그의 논리에는 두 가지 사실이 자리합니다. 하나는 성실하게 산 자기에게 아버지는 잔치를 베풀어 주신 일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아버지가 큰 아들을 위해서 실제로 잔치를 벌여준 일이 없었을까요?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매일의 삶이 잔치였을 테니까요. 아버지의 소유가 큰 아들의 소유라는 사실을 모두가 인정하고 있었을 테니까요. 큰 아들도 그걸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큰 아들이 트집을 잡듯이 불평하는 이유는 동생을 향한 아버지의 태도입니다. 이것이 큰 아들이 불평하는 논리의 두 번째 사실입니다. 그의 표현을 직접 인용하겠습니다.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눅 15:30) ‘이 아들’은 ‘당신의 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동생을 동생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사표시입니다.

여러분들도 자녀들을 키우면서 큰 아들의 이런 불평을 듣거나 또는 자녀의 입장에서 직접 불평을 터뜨린 적이 있을 겁니다. 입으로 말을 하지 않더라도 속으로 그렇게 생각할 때는 많았겠지요. 유산 문제로 가족들 사이에 소송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자기가 불이익을 받았다는, 또는 불이익을 받지 않겠다는 주장이 충돌할 때 이런 일들이 벌어집니다. 유산 문제만이 아니라 이 세상의 원리가 대략 이런 식입니다. 공정한 대우를 해달라는 요구가 서로 충돌합니다. 경쟁력이 높은 사람에게 더 많은 대우를 해주고, 없는 사람에게 적은 대우를 해주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대학진학률이 세계에서 그런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높은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 사회가 대학을 졸업하지 않는 사람을 인정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EBS에서 독일 교육에 대한 프로그램을 방영한 적이 있습니다. 굴뚝청소부 마이스터 자격증을 따는 교육이었습니다. 굴뚝청소부 장인이 되는 것에 그 학생들은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연봉도 충분히 받습니다. 둘째 아들을 위해서 살진 송아지를 잡을 수 있는 사회 제도라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행동을 공정하지 못하다고 생각한 큰 아들은 집밖에 머물렀습니다. 풍악과 춤추는 소리에 참여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큰 불행은 없습니다. 실제 물질적인 손해는 결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런 손해는 나중에 보충할 수도 있고, 손해를 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런 것들은 결국 우리의 손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잔치의 즐거움과 기쁨은 나중에 보충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은 쏜살 같이 지나가고 마니까요. 큰 아들의 심정은 이해할만 합니다. 정말 억울하다고 생각했겠지요. 자존심이 상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버지 앞에서 동생을 ‘당신의 아들’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마음이 굳어졌습니다. 우리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발견하는 삶의 태도입니다. 이런 방식의 삶에서 축제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아버지는 큰 아들과 전혀 달랐습니다. 물론 아버지도 둘째 아들이 얼마나 방탕하게 살았는지, 거꾸로 첫째 아들이 얼마나 성실하게 살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누가 더 바람직한 인간인지는 조금만 들여다보면 환히 드러납니다. 성실하지 못한 사람을 성실하다고, 똑똑하지 못한 사람을 똑똑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아버지는 이 상황을 전혀 다른 관점으로 보았습니다. 이런 다른 관점이 바로 우리가 성서에서 배워야 할 영성입니다. 아버지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이 문장은 24절과 32절에 반복되었습니다. 방탕하게 살다가 쪽박을 차고 집에 기어들어온 둘째 아들을 위해서 잔치를 벌일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이런 관점이 바로 삶을 축제로 받아들이는 능력입니다. 여기에서만 삶이 기쁨으로, 자유와 평화로 다가옵니다.

잃었다가 다시 얻었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본문에서는 일단 둘째 아들이 집을 나갔다가 다시 돌아온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도 종종 이런 경험을 합니다. 젊은이들이라면 헤어졌던 애인과 다시 친해진 것을 기억하겠지요. 사업가들에게는 부도의 위기를 넘기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것들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 우리가 관계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잃었다가 다시 얻은 것입니다. 이는 곧 우리의 소유는 아예 없다는 뜻입니다. 피조물에게 소유가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사람이 피조물이라는 성서의 증언을 허투루 듣지 마십시오. 우리 내부에는 존재의 근거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밖에서 주어진 것들입니다. 모든 것이 은총입니다. 모든 것이 잃었다가 얻은 것들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잔치를 벌이지 않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삶을 즐거움과 기쁨으로 살아가지 않을 수 있을까요? 만약 우리 삶에 축제의 기쁨이 사라졌다면 이런 영적인 시각을 알지 못하거나 망각했다는 증거입니다.

당신이 하는 말은 원칙적으로 옳기는 한데, 실제로는 그렇게 살기가 힘들다고 생각할 분들이 계실 겁니다. 실제 삶이 고단하다고 말입니다. 보기 싫은 사람들이 널려 있다고 말입니다. 물론 한 사람이 감당하기 불가능한 현실의 고통이 있긴 합니다. 그런 일들이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납니다. 풍악을 울리고 춤을 추듯이 살아가기 힘든 순간이 있습니다. 그때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잃은 것을 다시 얻은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어둠과 같은 현실은 빛의 축제로 바뀔 겁니다. 문제는 잃은 것을 다시 얻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올곧게 유지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순식간에 큰 아들의 논리로 돌아갑니다. 이 세상에 길들여지면서 점점 더 강력하게 그런 논리에 사로잡힙니다. 이런 악순환으로부터 우리가 벗어나서 늘 축제의 능력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은 없을까요?

저는 여러분들에게 성서가 제시하는 길을 대신 전달해드릴 수 있을 뿐입니다. 그 길로 들어서는가 아닌가는 여러분 각자의 몫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뿌리가 무엇인지 생각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잃었던 생명을 찾았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그 생명은 단순히 잘 먹고 잘 사는 차원이 아니라 부활이며, 영생입니다. 우리에게 약속으로 주어진 그 생명은 이 세상의 그 어떤 사물이나 이념이나 범주로도 존재유비가 불가능한 하나님의 배타적인 구원 사건입니다. 이 사건에 일치될 때 우리의 삶은 축제가 됩니다. 세상이 전혀 새롭게 다가올 것입니다. 동생을 동생으로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잃었던 것을 다시 얻었으니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사순절 넷째 주일, 3월14일)

누가복음 15: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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