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만!
사 6:1~8, 성령강림 후 첫째 주일, 2021년 5월30일
이사야 선지자는 오늘 설교 본문인 사 6:1절 이하에서 자신이 본 특별한 현상을 그림 그리듯이 사실적으로 묘사했습니다.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았다고 합니다. 그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했습니다. ‘스랍’이 등장합니다. 곤충 모양을 한 천사라고 할 수 있겠지요. 여기에 묘사된 스랍은 날개가 여섯입니다. 위의 한 쌍으로는 얼굴을 가렸고, 아래 한 쌍으로는 발(생식기)을 가리고, 중간 한 쌍으로는 날았습니다. 스랍들이 무리를 지어서 보좌에 앉으신 주님을 지켰습니다. 이사야가 묘사한 이런 현상을 비디오카메라에 담을 수는 없습니다. 그가 본 게 실제로 무엇인지 궁금해집니다. 우선 그의 설명을 조금 더 따라가겠습니다.
상투스
1절과 2절에서는 자신의 경험을 시각적인 방식으로 설명했다면 3절에서는 청각적인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스랍들이 합창을 하듯이 서로 주고받는 소리가 들립니다.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미사곡 <상투스>는 이 구절을 기초로 만들어졌습니다. 계 4:8절에도 이 ‘거룩하다’라는 찬양이 나옵니다. 세 번이나 반복된 이유는 거룩성의 지극한 차원을 가리키려는 데에 있습니다. 거룩하다는 말은 하나님에게만 붙일 수 있습니다. 모세도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는 떨기나무 현상 앞에서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라는 말을 듣습니다. 거룩하다는 게 눈으로 보이는 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것들과는 전적으로 다른 대상이기에 거룩한 존재라고 표현하는 겁니다. 이를 칼 바르트는 ‘전적 타자’라고 표현했습니다.
“거룩하다!”라는 이사야의 경험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는 우리가 일상에 고착해서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이 세상은 늘 그렇고 그렇게 보이기에 요령껏 살기만 하면 충분하다고 여깁니다. 좋게 표현하면 세상을 지혜롭고 모범적이며 존경받으면서 살기만 하면 만족한다는 겁니다. 이렇게 자신이 일상에서 추구하는 일에만 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으니 그 외의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여기서 거룩하다는 말을 낯설다는 말로 바꿔서 읽어보십시오. 낯선 세상을 만나면 자신이 평소에 붙들었던 일들이 별 것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겁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이 가깝게는 화성이나 멀리는 태양계가 아닌 우주의 어느 별에 속한 행성에 갔다고 상상해보십시오. 거기는 지구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생명체는 개미 새끼 한 마리가 없고, 생명체가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외계인으로 묘사하는 그런 생명체일지도 모릅니다. 이사야가 묘사한 스랍 같은 것들입니다. 그 세상에는 대학입시도 없고, 재판도 없고, 정치도 없습니다. 결혼도 없고, 스마트폰도 없고, 은행도 없습니다. 모두가 그들 방식으로 사랑하고 노래하고 춤을 춥니다. 정말 낯선 현상입니다. 다른 행성에 갈 필요도 없습니다. 지구에도 이미 그런 세상은 존재합니다. 숲에 가보신 적이 있습니까? 풀과 나무와 벌레들은 우리와 전적으로 다르게 삽니다. 그게 충격적으로 다가오면 ‘거룩하다.’라고 노래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사야의 ‘상투스’ 찬송이 바로 그런 경험에서 나온 겁니다.
우주와 자연에 대한 새로운 경험이 바로 하나님 경험과 똑같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 경험은 훨씬 더 포괄적이고 총체적입니다. 자연만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까지 새롭게 경험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개인적인 실존도 그렇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저는 브레드 피트와 캐이트 블란쳇이 남녀 주인공으로 출연한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를 보았습니다. 늙은이 외형으로 태어난 아이가 나이를 먹으면서 젊어지다가 어린아이로 죽는다는 줄거리의 영화입니다. 시간이 거꾸로, 또는 다른 속도로 흐를 수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서 증명되었습니다. 인류 역사를 거꾸로 돌려보면 정말 알 수 없는 우연이 겹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우연한 세계를 들여다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도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십시오. 무한수에 가까운 우연이 겹쳐서 개체로서의 여러분이 된 것입니다. 저의 어머니 난자와 아버지 정자가 결합해서 배아가 되는 생리적 현상부터 놀라운 사건입니다. 한 구체적인 인간이 태어날 확률은 첫 단계부터 수십만 분의 일에 불과합니다. 우리 앞에서 벌어지는 모든 현상은 이상합니다. 모든 것이 낯설고 신비롭습니다. 그 모든 이상함과 낯섦과 신비의 총괄을 가리켜 거룩함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존재는 하나님뿐입니다.
은폐성
3절 문장을 조금 더 자세하게 살펴보십시오.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뉩니다. 전반부는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라는 문장이고, 후반부는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라는 문장입니다. 개념으로 볼 때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우리와 구별된다는 뜻이고,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심으로 하나님 되심이 드러나기에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알면 저절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다는 말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온 땅에 충만하다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하심이 온 땅에 충만하다는 사실이 모든 이들의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또는 그것을 착각합니다. 못 보거나 착각하는 일이 이 세상에서는 더 흔합니다. 그게 참 이상합니다. 똑같은 세상에 살지만 거기서 거룩함과 영광을 보는 사람이 있고, 못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당시에 알아본 사람이 있고, 알아보지 못한 사람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를 기독교 신학에서는 그리스도 은폐성이라고 합니다. 밭에 감춘 보화라는 예수님의 비유(마 13:44)도 이를 가리킵니다. 이 은폐성 개념을 이해해야만 온 땅에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일상에서 몇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1) 어느 날 갑자기 평소에는 안 보이던 구름이나 달이 너무 예쁘게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아파트 단지 정원에 핀 목련꽃이 새롭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름 없는 야생화도 보물처럼 경험됩니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는 순간이 있는 겁니다.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2) 대구 샘터교회는 여러 교우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들 중에 정말 보물 같은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를 알아보기 전까지 그는 숨어 있습니다. 3) 여기 기악이나 성악 등, 음악을 좋아하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소리도 숨어 있습니다. 그걸 알아보는 사람에게만 그 소리가 들립니다. 그 소리는 점점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갈수록 더 깊고 다양한 소리를 냅니다. 그 깊이로 들어가지 못하면 그 소리는 침묵합니다. 4) 미켈란젤로인지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유명한 조각가 이야기입니다. 그가 로마 거리를 지나다가 대리석 가게 앞에 멈췄습니다. 주인이 폐기하려고 모아둔 대리석을 자기에게 넘기라고 했습니다. 주인은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 조각가의 눈에는 대리석 덩어리에서 다른 사람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 피에타상이 보였습니다. 예술가는 숨어 있는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사람입니다. 5) 저는 평생 평범한 설교자로 살았습니다. 성경 텍스트 안에는 내가 그동안 보지 못하던 세계가 여전히 무수하게 많다는 사실만은 눈치채고 있습니다.
세상이 은폐되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삶에 충만한 느낌이 없습니다. 이를 여러분의 개인적인 인생살이와 연관해서 생각해보십시오. 일상이 생명으로 충만하신지요. 기쁨으로 충만하신지요. 평화로 가득하신지요. 사랑의 능력으로 활력이 넘치는지요. 개인이 따라서 다르겠지만 자신 있게 그렇다고 답할 분들은 많지 않을 겁니다. 저도 사실은 여러분과 비슷합니다. 세상에서 자기를 실현하고 확인하는 열정에 사로잡힐 수는 있습니다. 경쟁심이나 소유욕으로 뜨거워질 수는 있습니다. 사업을 늘리는 일에 인생을 불사르듯이 매진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삶은 깊이가 아니라 표면입니다. 좋게 표현하면 세상이 말하는 모범답안입니다. 그런 방식으로는 세상에 숨은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가 없으며, 따라서 자기 인생이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다는 느낌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생명 안으로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인생의 표면에만 머물지 않고 생명 충만한 그 깊이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이사야처럼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다는 찬송을 실제로 부를 수 있을까요? 이런 질문은 자신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또는 충만한 삶이라는 말은 관념적으로 들리고, 그렇게 사는 게 실제 삶에서 무슨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다고, 그리고 충만하게 사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별로 보지 못했다고 주장할 분들도 있을 겁니다. 솔직한 주장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너 나 없이 모두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이 충만하다는 말이, 그래서 성령 충만하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전혀 몰라서 아예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사는지 모릅니다. 망고를 먹어보지 못한 사람은 망고 맛에 대한 설명을 아무리 들어도 실감이 가지 않듯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다는 이사야의 저 고백은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 안으로 받아들여진 경험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저의 생각을 말씀드려도 되겠지요. 저는 지구를 포함한 우주 전체와 그 안의 모든 생명체와 생명 아닌 만물을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믿기에 지구에서 사는 저의 짧은 인생도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 안에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살아있는 순간만이 아니라 죽음 이후까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속해있습니다. 숨을 쉬고 먹고 배설하는 생리적 현상만이 아니라 이 모든 일이 단절되는 현상도 하나님의 생명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그렇게 믿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그의 영광이 없는 세상은 없습니다. 그야말로 온 땅에 충만합니다. 그 충만한 거룩하심과 영광을 알기에 저는 저의 인생이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충만한 삶이 계속 유지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합니다. 어느 순간에는 충만하나 어느 순간에는 충만하지 못합니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삶이 위축됩니다. 공연한 근심과 걱정, 또는 도에 넘치는 욕망에 사로잡힙니다. 이 땅에 두 발을 딛고 사는 동안에 완전한 충만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충만에 가까이 가도록 노력하는 게 최선입니다. 바울도 자신의 삶이 완성된 게 아니라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바울 같은 사람도 완전한 충만에 이르지 못했다면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들이야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게 아닐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앞으로 달려가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속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일단 방향을 정확하게 잡고 앞으로 조금씩이라도 나아가야 합니다. 자신의 신앙이 조금이라도 진보하는 기쁨을 아는 사람은 알 겁니다. 또는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이라도 깊어지는 즐거움을 아는 사람은 알 겁니다. 조금이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삶은 살아있는 겁니다. 그 살아있는 삶이 바로 충만한 삶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살아있는 삶이 쉬운 게 아닙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충만한 삶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많은 이들은 바울의 표현대로 “예수께 잡힌 바 된 것”을 잡으려고 달려가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더 확실하게 제자리걸음입니다. 세속적인 기준으로 자기 삶이 안정되면 안정될수록 그 안정된 삶에 더 고착됩니다. 몸과 정신이 경직됩니다. 충만과는 거리가 멀게 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다는 사실이 남의 나라 이야기로 들립니다. 그런 소리를 들어도 가슴이 뛰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도 기쁜 소식으로 들리지 않습니다. 궁금해하지도 않습니다. 성경의 그 어떤 이야기도 복음으로 들리지 않습니다. 영혼의 활기가 없습니다. 교양을 키우는 삶으로 만족합니다. 또는 재미있는 취미생활로 만족합니다. 여러분은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라는 찬송을 부르고 싶지 않으십니까?
이사야의 환상
이사야는 지금 성전 안에 앉아 있습니다. 거기서 아주 이상한 현상을 경험했습니다. 그가 앉은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번제가 종종 드려졌기에 번제 불도 늘 타고 있었고, 거기서 나오는 불꽃과 연기도 성전 안에 어느 정도는 남아있었습니다. 이사야는 이런 현상에서 하나님의 높은 보좌와 그의 옷자락과 스랍들을 환상처럼 보았습니다. 조용한 밤이라면 이런 현상은 더 신비롭게 보였을 것이며, 불이 타는 소리를 합창 소리로 들렸을지 모릅니다. 평소에 이사야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을 마음에 두고 있었기에 시인처럼 그 자리에서 그런 거룩한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도 이사야처럼 세상을 전혀 새롭게 보자고 말입니다. 높이 들린 보좌도 보고, 그분의 옷자락도 보고, 여섯 날개를 가진 스랍도 보자고 말입니다. “거룩하다.”라는 합창 소리도 듣자고 말입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에서 천사를 보자고 말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너무 밋밋하게 봅니다. 가난해질까 염려하고 병들어 죽을까 염려합니다. 무시당할까 하여 노심초사할 뿐입니다. 정말 충만과는 거리가 먼 초라한 인생입니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주님의 말씀이 마음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라는(고후 5:8) 바울의 고백도 헛소리로 들립니다. 우리는 정말 삶을 제대로 인식한 채 사는 겁니까? 아니면 그냥 남의 흉내를 내면서 거대한 기계의 부속품처럼 대충 사는 겁니까? 지금 여러분의 눈에 무엇이 보이고 귀에 무슨 소리가 들립니까? 진지하게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의 영혼을 사로잡는 실체가 무엇입니까?
오늘 정 목사가 겁주는 방식으로 설교하네, 하고 생각할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저 자신을 이사야와 비교해보니 답답해서 저와 여러분이 함께 분발하자는 뜻으로 강하게 말씀드린 겁니다. 이사야의 환상이 우리에게 현실이 되었으면 하고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인생의 추동력이 되었으면 하고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으로 여러분이 충만해진다면 여러분의 남은 인생살이에서 더 필요한 게 없다는 사실을 절감할 것이며, 그제야 궁극적인 안식을 얻게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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