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12:1-8
카리스마 공동체
몸의 예배
바울은 로마서 1-11장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이방인들과 유대인 모두에게 임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지적했습니다. 그의 논리는 명백합니다. 선민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함으로써 이방인들이 오히려 새로운 이스라엘이 되었으며, 이런 사태에 시샘을 느낀 유대인들이 정신을 차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율법에 의해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구별되었지만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해서 그런 구별이 철폐되고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신학적인 색채가 농후한 ‘칭의론’ 문제를 정리한 다음에 바울은 12장에서 참된 예배가 무엇인지에 관한 가르침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런 글쓰기의 순서는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기독교의 교리는 교리 자체를 위해서라기보다는 그런 교리를 배운 사람의 삶을 목표로 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의 삶은 바로 예배로부터 시작합니다. 예배는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고, 교회 전체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개인도 예배를 드리고, 공동체 전체도 예배를 드립니다. 1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이 드릴 진정한 예배입니다.” 공동번역은 ‘여러분 자신을’이라고 번역했지만, 이 단어는 원래 ‘여러분의 몸’을 가리킵니다. 2절에서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새 사람이 되라고 권면한 다음에 이어서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삶이 무엇인지 분별하라고 가르칩니다.
바울이 1,2절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결국 구원받은 사람의 삶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는 것이 곧 진정한 예배라거나, 새 사람이 된다거나, 완전한 것을 분간한다는 것은 모두가 바로 구원받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이런 가르침은 옳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단지 자신의 개인적인 영혼 문제에만 머무르지 않고 구체적인 삶, 특히 더불어 공동체를 꾸려야할 구체적인 삶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전 4:20)는 바울의 주장은 옳습니다.
우리는 늘 이런 성찰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이 과연 실제적인 삶의 현장에서 능력으로 나타나는가를 말입니다. 단지 형식적으로 드려지는 이런 예배에만 만족할 게 아니라 우리의 삶 자체가 예배로 승화되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그런 증거들이 우리의 삶에서 체화되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이건 단지 종교적인 차원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학문도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여러분이 무슨 공부를 하셨든지 그것이 참된 진리라고 한다면 여러분의 삶에서 구체화할 것입니다. 음악을 전공한 사람은 그 음악이 자신의 삶에서 어떤 능력으로 나타나겠지요. 지금 우리의 모습에는 예배와 삶의 일치, 몸과 제물의 일치, 진리와 삶의 일치, 말과 행위의 일치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몸의 예배나 새 사람이라는 용어를 오해하기 쉽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칫 이런 성서 용어를 도덕적인 것으로 간주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경제 정의를 실천한다거나 노숙자를 돕는다거나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삶이 곧 구원받은 사람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삶의 모습들이 물론 가치 있는 것이긴 하지만, 우리는 지금 성서의 가르침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바울이 지금 그런 것들을 염두에 두고 말하는 걸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런 건 바울이 극복하려고 했던 율법주의에 가깝습니다. 그렇다면 몸의 예배라는 게 이런 율법이나 도덕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걸 말하나요?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여기에 바로 기독교 신앙과 삶에 긴장이 있습니다. 도덕주의나 율법주의는 아니지만 율법과 도덕을 폐기하지도 않는 ‘삶의 예술’이 바로 기독교인의 삶을 추동합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많은 평신도들만이 아니라 교회 지도자들이 길을 잃기 쉽습니다. 성서에는 도덕적이고, 율법적인 삶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도 있고, 그런 것이 완전히 무시되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도 있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이런 현상적인 것을 통해서 훨씬 근원적인 것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런 훨씬 근원적인 것이 어떻게 설명되고 있을까요?
카리스마의 토대
3절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나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으로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정도에 따라 분수에 맞는 생각을 하십시오.”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은총’을 받은 사람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6절에서 그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총의 선물이 있다고 했습니다. 3절에서 사용된 ‘카리스’라는 헬라어와 6절에서 사용된 ‘카리스마’라는 헬라어는 약간 구별됩니다. 은총이라는 뜻의 카리스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베푸신 선물이라고 한다면, 은사라는 뜻의 카리스마는 개인들에게 특별하게 베푸신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카리스를 받았다고 한다면 그건 구원을 받았다거나 사랑을 받았다는 뜻이지만, 카리스마를 받았다는 건 설교의 능력이나 봉사의 능력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6-8절에서 일곱 가지의 구별된 은사를 나열하고 있습니다. 예언, 봉사, 가르침, 격려, 희사, 지도, 자선. 이런 카리스마는 각자의 취향이나 성향에 따라서 다르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은총과 은사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특히 오늘 바울이 강조하는 것에 따른다면 우리 모두는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선물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아마 이런 이야기는 여러분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주일학교 때부터 ‘달란트 비유’를 통해서 이런 은사의 쓸모에 대해서도 자주 들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사람에게는 더 많은 선물이 주어질 것이고, 그것을 묵혀두는 사람에게는 먼저 주어진 것마저 빼앗긴다는 식으로 들었습니다. 이건 옳은 말입니다. 수영선수는 매일 그 기술을 갈고 닦아야만 일류 선수로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학교 선생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가르치는 내용이 계속해서 심화되어야만 그는 선생의 역할을 지켜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카리스마를 그런 정도의 생각으로 마무리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삶이 곧 하나님의 카리스마로 여긴다는 것은 이 세계를 근본적으로 새롭게, 또는 다르게 본다는 뜻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아주 간단한 말입니다. 카리스마는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입니다. 카리스마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카리스마는 근본적으로 나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생각해보십시오. 내 소유가 아니니까 남을 위해서 봉사하라는 뜻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렇게 생각해도 좋지만, 한 걸음 더 들어가서 생각해보십시오.
그렇습니다. 카리스마는 그 토대가 하나님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모든 카리스마는 존재론적으로 동일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에게서 온 것인데, 좋은 게 있고 나쁜 게 있을까요?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더 좋은 게 있고 덜 좋은 게 있을까요? 그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에게서 온 것은 모두가 똑같은 정도로 가치가 있습니다. 이런 카리스마의 원리를 우리 삶과 연결시킨다면, 결국 우리의 삶은 결코 가치론적으로 구별될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여러분은 모든 삶이 평등하다거나 인권이 천부적이라는 말을 평소에 자주 들었을 겁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런 말을 정보로 간직하고 있을 뿐이지 실제적인 삶의 능력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서울대학교나 이곳 하양에 있는 대구가톨릭대학교나 똑같다고 한다면 누가 곧이듣겠습니까? 사람들은 좋은 것과 나쁜 것, 가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명백하게 구분하는 데 익숙하기 때문에 모든 삶이, 모든 소질과 모든 재주가 결국 존재론적으로 똑같다는 말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십시오. 학문적인 진지성이 무의미하다거나 삶에 대한 성실성이 무의하다는 뜻으로 이렇게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의 삶에 개입되어 있는 하나님의 선물이 본질적으로 똑같이 귀하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을 뿐이지 그것에 대한 인간의 태도까지 똑같다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우리 눈에 크게 보이든 작게 보이든, 가치 있어 보이든 아니든 전혀 개의치 않고 동일하게 최선이라는 뜻입니다. 화원에서 비싸게 팔리는 꽃이나 길가에 흔한 민들레나 그것들이 ‘꽃’이라는 점에서 똑같이 귀하다는 사실과 같습니다.
만약 우리의 삶이 바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인식하고, 그 근본을 깨우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이 세상을 전혀 다르게 살아갈 수 있을 겁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실체적으로 깨우칠 수만 있다면 우리는 분명히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이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 겁니다. 그 무엇을 부러워하지도 않을 것이며, 그렇다고 그 무엇으로 자랑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내가 자랑한 만한 것이나 내가 남에게 부러워하는 것이나 아무런 차이가 없다면 결국 우리는 그런 것에 집착하는 게 아니라 그것의 근원인 하나님에게 집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카리스마의 적용
아마 로마 교회에는 이런 카리스마의 문제가 심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방인 기독교인들과 나중에 합세한 유대인 기독교인들 사이에 교권이나 교회 행정 업무를 중심으로 다툼이 일어났을 가능성은 아주 높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잘난 척하고 떠들어대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그런지 바울은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정도에 따라 분수에 맞는 생각을 하십시오.”(3b절).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게 바로 인간의 본성인지 모르겠습니다. 정치인들이 자기를 과대 포장하거나, 기업가들이 자기 회사를 과대 광고하는 것은 그러려니 할 수 있지만 교회와 신자들이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런 현상에 대해서 저는 이 시간에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오늘 우리의 설교 주제와 연관해서, 왜 이렇게 자기를 과대평가하는 일들이 벌어지는가에 관해서 바울의 설명에 따라서 한 마디 짚겠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도 역시 오늘 본문과 거의 비슷한 구조로 교회와 카리스마를 설명했습니다. 그는 교회 공동체를 ‘몸’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몸에는 많은 지체가 있듯이 교회에도 역시 여러 카리스마가 있다는 것입니다. 4,5절 말씀을 보십시오. “사람의 몸은 하나이지만 그 몸에는 여러 가지 지체가 있고, 그 지체의 기능도 각각 다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수효는 많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각각 서로 서로의 지체 구실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비유는 매우 생생합니다. 손가락도 몸에 붙어 있고, 눈동자로 몸에 붙어 있습니다. 여기서 각각의 지체가 유기적으로 한 몸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이 말은 곧 손, 발, 심장, 귀 등등, 이런 모든 지체를 통 털어서 몸이라고 한다는 뜻입니다. 몸의 한 부분이 병들었을 경우에는 몸 전체가 이 병든 현상에 연루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요즘은 흔하지 않지만 옛날에는 손톱과 닿아있는 부분이 곪는 ‘생인손’이 많았습니다. 생인손에 걸려서 적시에 치료하지 못하고 덧나게 되면 밤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습니다. 우리 몸의 일부가 병들었지만 결국 몸 전체가 고통스럽습니다.
몸 전체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고 있는 사람들은 있겠지만, 교회 공동체, 더 나가서 사회 공동체도 역시 그렇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예컨대 교회 안에서, 또는 사회에서 빈익빈부익부라는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어도 우리는 아무런 고통을 받지 않습니다. 생태계가 허물어져도 자신의 집에 정수기와 공기정화기만 있으면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과대평가하기 위해서 온몸을 던지며 살아갈 뿐입니다. 이렇게 사분오열된 공동체는 결코 카리스마 공동체가 아닙니다. 카리스마 공동체가 아니면 결국 생명은 죽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은 오직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교회는 참된 의미에서 이런 유기적인 단일성을 회복하고 있을까요? 이런 카리스마 공동체 정신이 교회 안에서 확산되어가고 있나요? 더 나아가 기독교인들은 이런 카리스마 공동체의 의미를 이 세상에 삶과 몸으로 전달하고 있을까요? 여러분, 교회의 미래는 바로 이런 카리스마 공동체를 지향하는지 아닌지에 달려 있습니다. 왜냐하면 카리스마 공동체만이 생명 지향적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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