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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토기장이 하나님

토기장이 하나님

(렘 18:1-11)

 

     흙을 빚어서 그릇을 만드는 사람을 도공이라고 합니다. 옹기장이, 또는 토기장이라고도 합니다. 똑같이 흙을 재료로 한다고 해도 무엇을 첨가하며, 그것을 굽는 온도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그 질그릇의 명칭이 토기, 도기, 자기로 달라집니다. 자기의 품질이 가장 높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고려청자나 백자가 유명합니다. 일본의 도자기도 유명한데, 일본에 포로로 잡혀간 백제의 도공들이 시조라는 말이 있습니다. 도공들의 작업은 신기합니다. 빙글 도는 녹로에 진흙을 올려놓고 그릇의 모양을 만드는 작업도 그렇고, 불을 지피는 작업도 그렇습니다.

     예레미야는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을 토기장이로 비유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운명은 토기장의 손에 있는 진흙처럼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고 합니다.(6절) 예레미야는 실제로 토기장이 집에서 어떻게 토기가 만들어지는지를 보았습니다. 흙이 원한다고 해서 어떤 용도의 그릇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판단의 주체는 토기장이입니다. 토기장이가 마음에 안 들면 그릇을 만들었다가도 부숴버립니다. 예레미야는 그것을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하나님이 민족이나 국가를 부수거나 멸하려고 생각했다가 그 민족이 악에서 돌이키면 재앙을 거두신다고 합니다. 거꾸로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건설하려고 했지만 악한 것이 보이면 그 뜻을 거둔다는 것입니다.

     토기장이의 작업을 좀더 생각해보십시오. 토기장이는 좋은 그릇을 만들기 위해서 우선 좋은 흙을 찾습니다. 아무리 좋은 작품을 만들고 싶어도 흙이 나쁘면 만들 수가 없습니다. 좋은 흙이라고 생각해서 물로 반죽을 하고 보았더니 나쁜 것들이 포함되었다면 당연히 포기합니다. 그릇을 만들다가 중간에 부수기도 하고, 불에 구워낸 다음에도 부수기도 합니다. 별로 기대하지 않았던 흙이 반죽을 할수록 좋은 흙으로 나타난다면 당연히 좋은 작품을 만들겠지요. 중요한 것은 흙이 토기장의 눈에 맞는지 아닌지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나 보기에 악한 것”을 행하거나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면” 원래 내릴 계획이었던 복을 거두겠다고 합니다. 여기서 ‘나’는 물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토기장이가 중간에 계획을 바꿔서 질그릇을 깨기도 하고, 다시 좋은 그릇으로 만들듯이 이스라엘의 운명을 당신의 뜻대로 정하신다는 겁니다. 바울도 로마서에서 토기장이에 대한 이야기를 썼습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롬 9:21) 이 구절은 사 29:16, 45:9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예레미야, 이사야, 바울 모두 토기장이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절대성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절대성

     이런 성서의 가르침 앞에서 사람들은 여러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가르침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별로 아는 것도 없고 문명이 미개하던 옛날 사람들은 하나님을 절대적인 존재로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고 말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절대성보다는 인간의 절대성에 신뢰가 갑니다. 인간이 못할 것이 없을 정도입니다. 인간의 무의식까지 통제하고, 우주여행도 가능합니다. 경제력과 군사력만 있으면 세계를 지배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미래는 순전히 인간 자신의 손에 달려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을 토기장이와 같이 절대적인 존재로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며칠 전에도 호킹 박사는 이 세상의 창조를 신의 능력이 아니라 중력의 능력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말하는 것은 철없는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절대적인 존재로 생각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논리이겠지요. 유아적인 세계관이라고 말입니다.

     그들의 비판에 일리가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간혹 정신적으로 미숙한 사람들의 도피처처럼 생각되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하나님은 폭군이나 옥황상제처럼 보입니다. 조금만 잘못을 해도 불호령을 내리는 분입니다. 기독교 영성이 죄책감과 동일시되기도 합니다. 기독교 신앙을 외로움이나 허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종교적 욕구와 일치시키려는 것입니다. 어떤 신자들은 영육이원론에 빠져서 자기의 삶을 혐오하기도 합니다. 이런 미숙한 신앙에 대한 반성은 이미 오랜 전에 나왔습니다. 아돌프 히틀러 제거 결사단체에 가입했다가 체포되어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직전에 처형당한 본회퍼는 기독교 신앙이 이제는 성숙한 시대에 사는 사람들에게 성숙한 방식으로 대답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철부지 아이들의 요청을 기계적으로 들어주는 신으로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의 주장은 옳습니다. 순전하다는 뜻의 어린아이가 아니라 유치하고 미숙하다는 뜻의 어린아이의 세계관에 머물면 안 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성숙한 시대에 역사 앞에서 성숙한 자세로 책임 있게 판단하고 살아야 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유일한 분이라는 예레미야를 비롯한 성서기자들의 일치된 가르침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의 근거가 무엇일까요?

     진흙과 토기장이의 비유에 대한 예레미야의 말을 다시 한 번 더 생각해보십시오. 토기장이는 녹로 위에 진흙을 올려놓고 그릇을 빚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진흙을 모두 뭉개고 그 진흙으로 다른 그릇을 만듭니다. 진흙의 입장에서는 무엇이 문제인지 모릅니다. 언제 어떻게 뭉개질지 모릅니다. 그 기준은 진흙에게 있는 게 아니라 토기장이에게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 사실을 역사에서 발견했습니다. 이스라엘과 주변 여러 나라의 역사가 마치 토기장이의 손에 들린 진흙과 같다는 사실을 보았습니다. 잘 나가다가 쉽게 뭉개지는 나라가 있습니다. 형편없던 나라가 강한 나라가 되는 것도 보았습니다. 인간의 계산에 따르면 강한 나라가 계속 강해져야 하고, 약한 나라는 늘 그래야만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역사는 다르게 흘렀습니다. 그 역사에 인간이 계산해낼 수 없는 어떤 힘이 개입한다는 의미입니다. 그 어떤 힘이 바로 하나님이었습니다. 이건 그렇게 복잡한 문제가 아닙니다. 세계와 역사를 직면하면 그대로 보이는 것입니다. 지난 인류 역사에서 얼마나 많은 나라와 민족이 나타났다 없어졌다 했는지 모릅니다. 지금은 미국의 힘이 영원히 세계를 지배할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녹로 위에서 돌아가는 진흙과 같습니다. 어느 한 순간에 뭉개질지 모릅니다.

     개인의 운명도 비슷합니다. 여러분들이 계획적으로 인생을 살아가겠지만 계획대로 되는 게 많지 않을 겁니다. 겉으로는 계획대로 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을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원하는 대학교에 가고, 원하는 직장에 들어가고, 자녀들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키울 수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실제로 그렇게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차원에서 자기의 운명이 자기의 뜻대로 되지는 않습니다. 계획하지 않았던 사람들을 만나고, 그래서 행복하게도 살고, 또는 불행하게도 삽니다. 행복한 조건 가운데서도 실제로는 불행하게 살고, 불행한 조건 가운데서도 행복하게 살기도 합니다. 부분적으로는 우리가 선택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우리의 선택을 넘어서는 우연한 힘이 우리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이런 것들을 결정하는 어떤 힘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여기까지 동의한다고 해도 인간이 토기장이의 손에 숙명적으로 묶여 있는 진흙이라는 말을 기분 나쁘게 생각할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토기장이 이야기는 우리의 신세가 진흙처럼 보잘 것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 잡혀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예술가입니다. 그분의 손에 잡히면 진흙도 예술품이 됩니다. 수채, 유채 등의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분들을 보셨지요? 재료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예술가의 손에 들리면 놀라운 작품이 됩니다. 예술가 앞에서 그 재료는 무기력할수록 좋습니다. 재료가 나서서 잘난 척하면 예술가의 창조행위는 발휘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토기장이라는 예레미야의 가르침은 우리를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하나님의 창조성에까지 높이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에 놓인 존재들이라니, 얼마나 놀랍습니까!

 

    길을 돌이키고 기다릴 것

     위의 설명으로 모든 질문이 깨끗이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계획과 예상을 뛰어넘어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절대적인 분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냐, 하는 질문이 가능합니다. 진흙인 우리를 하나님이 예술품으로 만들 날만 무조건 기다릴 뿐이냐, 하고 말입니다. 아닙니다. 예레미야는 지금 골방에 앉아서 신학적인 이론을 전개하는 게 아닙니다. 그는 실제 삶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역사의 소용돌이에 들어 있습니다. 그가 하는 말은 구체적인 삶의 문제에 토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연관된 문제를 알려면 예레미야가 처한 삶의 자리가 어떤지를 살펴야 합니다.

    예레미야는 아시리아가 멸망하기 시작한 기원전 627년부터 시작해서 유대가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한 기원전 587년 이후 10년까지, 전체적으로 대략 40년 동안 예언활동을 한 사람입니다. 그 시기는 격동의 시대였습니다. 구 제국인 아시리아가 급속하게 몰락하고, 신흥 제국 바벨론이 힘을 뻗치고 있었습니다. 이런 국제 정세 속에서 유대 왕들은 자생의 길을 각가지로 모색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요시아의 개혁 운동입니다. 그 개혁운동도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유대 왕들은 이집트의 도움으로 바벨론을 대항하는 외교정책을 택했습니다. 당시 귀족들도 그런 정책을 전적으로 지지했습니다. 하나님의 신탁을 전하는 예언자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유대를 지킬 것이라고 낙관적인 예언을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정반대의 예언을 했습니다. 유대는 바벨론에 의해서 무너져 70년 동안 식민지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당시 힘을 갖고 있던 정치인들, 그리고 다른 예언자들과 힘겨운 싸움을 벌였습니다. 왕과 백성들이 누구의 말에 더 귀를 기울였을지는 긴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사람들은 거짓말이라고 하더라도 모든 게 잘 될 거라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거라는 말에 솔깃해하기 마련입니다. 어둡고 불편한 현실을 그대로 전하는 말에 귀를 막고 싶습니다. 아무도 예레미야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완전히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어떤 때는 죽음 직전까지 몰린 적도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눈에 유대의 멸망은 분명해보였습니다. 그것이 그의 가슴을 도려내는 것과 같았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지 궁금했습니다. 유대는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선택한 민족입니다. 하나님은 유대의 조상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약속을 맺으셨습니다. 후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겠으며, 가나안 땅을 후손들에게 주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백성이, 선택된 민족이 지금 멸망의 길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어디에 문제가 있는 걸까요? 예레미야가 얻은 대답이 오늘 설교 본문입니다. 하나님은 진흙의 운명을 결정하는 토기장이와 같습니다. 진흙인 유대는 뭉개질 운명에 처했습니다. 발버둥 친다고 해서 그 운명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유대 왕, 귀족, 예언자, 백성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신앙을 모두 포기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은 여전히 성전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제사장들도 많았습니다. 예레미야만이 아니라 수많은 예언자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신앙 형식은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문제는 신앙의 본질입니다. 그들은 우상을 섬기듯이 제사를 드렸습니다. 국제 정치적인 위기는 외교력으로 풀려고 했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기복신앙과 정치공학으로 문제를 헤쳐 나가려고 했습니다. 오늘도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삶의 내용은 없이 오직 경제만능주의와 꼼수정치학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나름으로 진정성이 있지만, 근본적으로 공허한 담론들입니다. 거짓 예언들입니다.

     예레미야는 그 시대를 향해서 이렇게 외칩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며 계책을 세워 너희를 치려하노니 너희는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키며 너희의 길과 행위를 아름답게 하라 하셨다.”(11절) 유대 나라가 토기장이인 하나님이 좋은 그릇을 만들 수 있는 좋은 진흙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거기까지입니다. 그릇을 만드는 일은 오직 하나님의 전권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 또는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채 막연하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토기장이고, 우리는 진흙입니다. 우리가 어떤 그릇으로 빚어질까요? 아니면 뭉개지고 말까요? 하나님께로 우리 삶의 방향을 실제로 돌이키고, 그분의 창조 섭리를, 즉 구원 섭리를 기다리십시오. (성령강림절 후 열다섯 주일, 9월5일)

예레미야 18: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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