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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평화의 복음, 부활의 능력

mms://wm-001.cafe24.com/dbia/070408.MP32007.04.08. 행 10:34-43
평화의 복음, 부활의 능력

2007년 부활절을 맞았습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부활절은 성탄절보다 훨씬 중요한 절기입니다. 성탄절은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이후에 지키게 된 절기이지만 부활절은 초기부터 역사적 배경이 분명한 절기였습니다. 엄격하게 말해서, 성탄절은 없어도 기독교 신앙에서 결정적인 문제가 발생하지 않지만 부활절은 필수불가결의 요소입니다. 그런 정도로 부활 사건은 기독교 역사에서 핵심 요소입니다.
그런데 오늘 첨단 과학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이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별로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들은 도대체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게 말이 되냐, 하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제자들의 환상이거나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제자들의 기억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겁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별로 깊이 생각하지 않은 채 다시 살았다는 사실을 주술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입니다. 간혹 요즘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믿거나 말거나’ 같은 이야기와 비슷하게 말입니다.
이런 두 가지 생각 모두 성서가 말하는 부활과 상관없습니다. 부활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생명의 깊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생물학적인 생명현상은 아주 부분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지금 우리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그런 생명의 깊이가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부활은 바로 이런 생명의 깊이와 연관되어 있는 사건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을 단순히 현재의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 현상으로 보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부활은 이런 단백질로 구성된 몸으로 다시 산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방식으로 다시 살아난다면 우리는 또 다시 목마르고, 배고프고, 무언가를 갈망하게 됩니다. 부활은 온전한 생명으로 변화하는 사건입니다. 그걸 오늘 우리의 과학적인 지식만으로는 해명하거나 재단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설명에 만족하지 않을 겁니다. 도대체 무슨 말이냐, 에둘러 말하지 말고 똑 떨어지게 설명해봐라, 우리가 죽었다가 다시 산다는 거냐 아니냐 하고 말입니다. 신앙의 세계는 똑 떨어지게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나라를 똑 떨어지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절대적인 세계는 인간이 컴퓨터를 만들듯이 그렇게 앞뒤가 똑 떨어지게 검토해서 증명하는 게 아닙니다. 절대적인 세계, 즉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계시는 그분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만큼 조금씩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예컨대 젖먹이 아이들에게 어머니의 사랑을 과학적으로 똑 떨어지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 아이들은 어머니의 따뜻한 가슴으로 그걸 경험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세계를 알기에 우리는 이처럼 젖먹이 어린아이처럼 부족합니다. 따라서 생명의 궁극적인 실체라 할 예수님의 부활도 어머니의 따뜻한 가슴에서 그 사랑을 경험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방식으로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조금 더 자라면 조금 더 구체적인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겠지요. 이런 점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성서기자들의 경험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평화의 복음
오늘 본문은 누가가 전하는 베드로의 설교입니다. 그는 지금 로마 백부방인 고르넬리오의 집에서 설교하는 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구체적으로 이방인에게 전달되는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이 고르넬리오 이야기입니다. 고르넬리오는 가이사랴 주둔 로마부대에서 백부장의 위치에 있던 사람입니다. 그는 물론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경건한 사람이며 하나님을 공경하고 유대인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환상을 봅니다. 가이사랴에서 그리 멀지 않은 바닷가 마을 요빠에 머물고 있는 베드로를 데리고 오라는 천사의 말을 듣습니다. 비슷한 시각에 베드로도 기도하는 중에 어떤 환상을 봅니다. 결국 베드로는 고르넬리오의 집에 오게 되었고, 오늘 본문의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하나님이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구별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여러분들은 당연한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당시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발가락 사이의 때만도 못하게 여겼습니다. 그들 중에는 하나님이 지옥의 불쏘시개로 쓰기 위해서 이방인을 창조하셨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요즘도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팻말을 들고 길거리에서 외치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과 비슷합니다. 그렇게 극단적이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대개의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자신들이 전혀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베드로의 입을 통해서 초기 기독교는 전혀 새로운 복음의 세계를 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이이나 이방인이나 사람을 ‘차별대우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다 받아주신다고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주장은 아주 혁명적인 것입니다. 이렇게 바꿔서 생각해보십시오.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나 나오지 않는 사람이나 하나님이 차별대우하지 않으신다고 말입니다. 그들이 생명의 소중함을 알고 그것을 창조한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바르게살기만 하면 구원하신다고 말입니다. 이런 말씀을 듣고, 이제 교회에 나오지 않아도 되겠구나 하고 생각하실 분은 없겠지요. 우리는 우리가 특별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려고, 또는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려고 교회에 나오는 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선입견과 이기적인 생각을 뛰어넘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의 세계를 펼치신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에, 또한 그것을 알기 위해서 교회에 나옵니다. 초기 기독교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담이 허물어졌다는 사실을 베드로의 입을 통해서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아무런 구별이 없는 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받은 민족입니다. 그런 점에서 선민입니다. 다만 그들은 그 하나님의 말씀을 배타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그들은 독점하려고 했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냐 하는 것으로 사람들을 차별했고, 율법을 지키는가 아닌가 하는 것으로 사람을 차별했습니다. 베드로는 이제 하나님이 다른 방식으로 말씀을 주셨다고 증언합니다. “그것은 만민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시켜 선포하신 평화의 복음입니다.”(35b)
평화의 복음이라는 말에 집중하십시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평화를 주셨습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신약성서의 언어인 헬라어는 평화를 ‘에이레네’라고 하는데, 그의 설교를 듣고 있는 로마의 백부장은 아마 라틴어인 ‘팍스’로 알아들었을지 모르겠군요. 반면에 유대인들은 ‘샬롬’이라고 불렀습니다. 정치적인 의미의 팍스, 종교적인 의미의 샬롬, 또는 철학적인 의미의 에이레네는 인간이 나름으로 이 땅에 펼쳐 보이려고 했던 평화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평화는 말만으로 가능한 세계가 아닙니다. 우리가 평화롭게 살겠다고 노력해서 실현 가능한 세계가 아닙니다. 많은 정치적, 종교적, 철학적 평화가 시도되었지만 여전히 평화는 요원합니다. 베드로의 주장은 그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평화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정치, 종교, 철학적 차원의 평화가 실제로 가능하다고 말입니다.
제 설명을 듣고 평화를 위한 인간의 모든 노력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신다면 그건 오해입니다. 우리는 최대한으로 이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 수고해야 합니다. 산상수훈의 팔복말씀에서 예수님은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5:9) 남북분단 체제가 평화체제로 바뀔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겠지요. 남한과 북한 곳곳에 쌓여 있는 전쟁 무기가 속한 시일 안에 생활용품으로 바뀔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런 노력이 절실하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진정한 평화가 보장되는 건 아닙니다. 2천 년 전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시킨 사람들도 겉으로는 평화주의자들입니다. 유대교의 평화를 위해서 예수가 선포한 평화의 복음은 사라져야만 했습니다. 로마의 평화를 위해서 사회를 소란하게 하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중지되어야만 했습니다. 예수를 처형한 유대인들이나 로마 정치인들은 오늘 우리와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미국은 미국 방식으로 평화를 주장하고(팍스 아메리카나), 한국은 한국 방식으로 평화를 주장하며, 북한은 북한 방식으로 그걸 요구합니다. 이런 충돌로 인해서 국가 사이의 진정한 평화는 불가능합니다. 국가 사이만이 아니라 개인과 개인 사이에도 역시 그렇습니다.

부활의 능력
당신의 말은 아무래도 역사 허무주의 같이 들린다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우리의 모든 평화 노력이 무의미하다는 게 아닙니다. 그것의 궁극적인 한계를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건 제 말이 아니라 성서의 가르침입니다. 우리의 평화조약, 노동법, FTA 협정이나 반대, 복지향상을 근본적으로 넘어서는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 아니면 진정한 의미에서 평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평화의 불가능에 초점을 두는 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행하시는 평화의 가능성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평화가 관건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새로운 차원의 구원사건에서 진정한 평화의 길을 찾았고, 그것을 제시했습니다.
오늘 베드로의 입을 통해서 그들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분을 사흘 만에 다시 살리시고 우리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40절) 유대인들과 로마 권력이 서로 이해타산에 의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님을 하나님은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의 부활은 나사로나 과부의 외아들이 다시 살아난 사건과는 전혀 차원을 달리합니다. 베드로의 설명에 따르면 예수의 부활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증인으로 미리 택하신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41) 예수님의 부활은 호기심 천국의 대상이 아닙니다. 마술사들의 마술이 아닙니다. 불치환자를 급속냉동 방식으로 가사상태에 빠지게 했다가 의술이 발달한 5백년 후에 다시 살려낸다는 방식의 과학기술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갈 사람들에게만 특별하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이며, 신앙의 문제에 속하는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신빙성이 없는, 오직 기독교 안에서만 타당한 사건이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설교 서두에 저는 여러분에게 우리가 흡사 젖먹이 어린아이처럼 궁극적인 세계를 알기에는 턱없이 모자란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그를 증언할 사람들에게만 특별하게 일어난 사건이라고 해서 예수님의 부활에 신빙성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생명의 깊이와 신비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아무래도 신학적인 개념을 한 가지는 말씀드려야겠군요.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 유일회적인 사건입니다. 유일회적인 사건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것은 종말에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잠결에 어떤 소리를 들었다고 합시다. 어머니가 아이를 위해서 드리는 기도였습니다. 그 아이는 그걸 증명할 길은 없습니다. 그는 다만 분명하게 경험했을 뿐입니다. 나중에 어른이 되면 그 경험의 실체를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종말 때에 예수에게서 발생한 그 부활 사건의 실체가 온전히 드러날 겁니다.
우리가 기독교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바로 이 사실을 믿는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부자가 되거나 출세하기 위해서, 또는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나, 이 세상의 복지향상을 위해서나, 죽음으로부터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종말에 드러나게 될 생명의 실질(reality)인 부활 사건이 예수님에게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이 땅에서 잠시 살지만 그것으로 모든 게 끝나는 게 아니라 예상 밖의 방식으로 예수님의 이 부활 생명에 참여하게 되리라는 희망과 믿음으로 오늘을 삽니다. 그것이 곧 구원이며, 베드로가 마지막에 말하듯이 죄의 용서입니다. 이 죄의 용서는 곧 하나님과의 평화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예수님의 부활이 평화의 능력입니다. 우리의 삶이 전혀 새로운 생명의 옷을 입는다는 이 사건보다 더 큰 평화의 능력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민족의 차이를 뛰어넘어, 정치적 차이를 뛰어넘어, 궁극적으로 종교 차이를 뛰어넘어 진정한 평화를 가능하게 하는 능력의 원천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에서 사람 사이의 평화가 가능합니다. 2007년 부활절을 맞는 여러분에게 이런 놀라운 부활생명의 능력이 가득하기를 진정으로 바랍니다.
사도행전 10:3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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