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왕이 오신다!
미 5:2~5a, 대림절 넷째 주일, 2021년 12월19일
미가의 신탁
오늘 우리는 2,700년 전 예루살렘에서 활동했던 한 선지자의 신탁을 설교 본문으로 읽었습니다. 그 선지자의 이름은 미가입니다. 그는 오늘 본문에서 한 마을 이름을 거론합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입니다. 에브라다는 ‘에브랏’이라고 불리는 주민이 집성촌을 이루고 사는 마을 이름입니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그곳에 1천 명 정도의 에브랏 사람이 살았다고 합니다. 미가가 베들레헴 에브라다를 거론한 이유는 그곳이 다윗 왕의 출생지였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다윗 왕의 후손에서 메시아가 올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미가는 단순히 다윗의 후손에 한정해서 메시아를 말하지 않습니다. 다윗 왕조를 온전히 신뢰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들은 왕정을 늘 비판적으로 보았습니다. 2절 말씀을 다시 들어보십시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는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라는 말씀은 메시아가 역사적 실존 인물인 다윗보다 더 상위라는 뜻입니다. 혈통으로는 분명히 다윗의 후손이지만 본질에서는 더 근원적인 존재라고 말입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인물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을 기록한 마태는 마 2:6절에서 바로 미 5:2절을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마태가 그 구절을 인용한 대목은 예수 탄생 이야기입니다.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고, 동방에서 박사들(점성가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라고 수소문했습니다. 여론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헤롯 왕은 유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모아서 ‘그리스도’ 탄생 지역에 관해서 질문합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구약성경 전문가들입니다. 그들의 대답에 바로 미 5:2절이 인용되었습니다.
마태복음만이 아니라 다른 복음서도 선지자들의 메시아 신탁이 바로 예수님을 가리킨다고 보았습니다. 예를 들어서 누가복음 2:14은 예수 탄생 당시에 목자들이 들은 천사의 합창을 이렇게 전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여기서 언급된 평화는 곧 미 5:5절에 나오는 ‘평강’입니다. 히브리어 ‘샬롬’은 헬라어 ‘에이레네’인데, 우리말 성경은 때에 따라서 평화, 또는 평강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천사의 합창에 나오는 가사는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에서 대중의 찬송으로 다시 나옵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눅 19:38) 이 두 장면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본질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아는 데에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첫째 장면인 출생 이야기는 예수님이 세상으로 들어오는 성육신을 가리키고, 예루살렘 입성인 둘째 장면은 십자가와 부활을 암시합니다. 이처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그리스도로, 즉 메시아로 믿는 예수님이 바로 미가가 선포한 메시아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들의 주장에 분명한 근거가 있는지를 말하기 전에 미가 선지자의 설명을 조금 더 따라가겠습니다.
미가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즉 메시아 표상을 목자 상으로 생각했습니다. 미 5:4절을 들어보십시오.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목축하니 그들이 거주할 것이라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끝까지 미치리라.
목자는 양의 안전을 보장하는 사람입니다. 고대 유대 땅에서 목자로 사는 사람은 지혜롭고 용감해야만 했습니다. 양의 생존에 필요한 풀과 물을 찾을 줄 알아야 하고, 양을 노리는 포식자를 피하거나 물리칠 줄 알아야 합니다. 미가는 메시아가 ‘여호와의 능력’과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는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그 목자로 인해서 이제야 양들은 그 땅에 ‘거주’할 것이고, 양의 숫자가 늘어나고, 땅끝까지 채우게 될 것입니다. 메시아가 오면 유대 백성은 목자와 함께하는 양처럼 생존의 불안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미가의 외침은 당시 유대 백성의 영혼을 사로잡았을 겁니다. 그는 5:5a에서 메시아의 본질적 속성을 이렇게 규정합니다.
이 사람은 평강이 될 것이라.
히브리어 성경을 그대로 발음하면 이렇습니다. “웨하야 쩨 샬롬(שָׁל֑וֹם)” 이사야 선지자도 9:6절에서 미가가 말한 평화를 메시야 속성의 본질이라고 언급했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평강의 왕’이라는 표현에 나오는 단어 평강도 샬롬의 번역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으로 바꾸면 ‘평화의 왕’입니다. 미가와 이사야 모두 이 세상에 평화를 실현할 메시아가 온다고 외친 겁니다.
평화 대망
선지자들이 평화를 메시아 대망이라는 차원에서 외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평화야말로 우리가 세상에서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전제 조건이라는 사실입니다. 고대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전쟁의 위협에 시달렸습니다. 오죽했으면 평상시 인사가 ‘샬롬’이겠습니까. 근동의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부자가 되었더라도 평화롭지 않으면 삶이 망가집니다. 도둑질, 살인, 인신매매, 성폭력 등이 만연한 세상이라면 우리가 어떻게 인간다운 삶을 꾸려갈 수 있겠습니까. 가족끼리 자주 다투는 부잣집에서 살고 싶으세요, 가난하지만 가족끼리 평화로운 집에서 살고 싶으신가요? 서로 파벌을 지어서 싸우는 대형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싶으세요, 교인들끼리 서로 평화롭게 지내는 작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싶으세요? 개인이나 공동체나 국가나 우리 삶의 전반에서 중요한 것은 평화입니다. 선지자를 비롯한 유대 백성들이 평화의 왕이 오시기를 기대한 이유가 이해됩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의 힘만으로는 평화를 구현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안 되니 메시아를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가난했던 옛날에 비해서 잘살게 되었고, 공부도 많이 했고, 또 나름으로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려는 노력도 많았으나 그 결과는 미미합니다. 미국이 세계 평화를 구현할 수 있다거나 중국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아마 하나도 없을 겁니다. 일본이나 북한도 마찬가지이고, 대한민국은 어떨까요? 개인 영혼의 문제도 비슷합니다. 하루도 진정한 평화를 누려보지 못한 분들이 없지 않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영혼이 산만한 겁니다. 이 문제는 연봉과 건강과 외모와 명예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미가나 이사야 선지자의 외침처럼 저도 평화의 왕이 오실 때만 평화가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실제적인 평화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미가는 이미 4장에서 이렇게 피력했습니다. 우리말 성경 4장에 달린 소제목은 ‘여호와께서 이루실 평화’입니다. 4:3절만 읽겠습니다.
그가 많은 민족들 사이의 일을 심판하시며 먼 곳 강한 이방 사람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
유명한 구절입니다. 칼을 쳐서 보습, 즉 밭을 매는 쟁기를 만들고, 창을 쳐서 풀을 베는 낫을 만들고, 나라끼리 칼로 싸우지 않고 전쟁을 연습하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말이 안 됩니다. 이런 세상을 우리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의 길을 걸었습니다. 더 날카로운 창을 더 많이 만들어야 합니다. 더 치명적인 창도 만들어야 합니다. 전쟁 연습을 게을리하면 안 됩니다. 한순간도 한눈을 팔면 안 됩니다. 개인도 그렇고 국가도 그렇습니다. 한반도에 종전선언을 하면 안보가 위험해진다고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국방비도 더 올려야 하고, 한미 군사연합 훈련도 더 열심히 해야 합니다. 이런 세상을 우리는 삽니다. 그런 주장도 나름으로 일리가 있습니다. 평화를 지키려면 힘이 있어야 하니까 말입니다. 과연 힘을 키우면 평화를 지킬 수 있을까요? 군대와 경찰이 많으면 평화로운 세상이 될까요? 법을 잘 만들면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까요? 수입이 늘면 가족들이 평화롭게 지낼 수 있을까요? 참으로 어려운 문제입니다. 미가의 저 거룩한 상상력이 지금 우리에게 비현실적인 외침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저 신탁에 더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런 노력마저 없으면 인간 세상은 그야말로 싸움판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가운데서 미가와 이사야처럼 평화를 외치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곳곳에 숨어 있었기에 이런 정도나마 평화로운 질서가 지탱하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그런 숨어 있는 소수의 사람이 될 수는 없을까요?
미가와 이사야가 선포한 메시야, 즉 ‘평화의 왕’이 예수라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2천 년 전에 왔는데도 아직 평화가 요원한 이유를 설명해보라고 그들은 요구합니다. 유럽 역사에서 볼 때 기독교 국가는 전쟁을 밥 먹듯이 벌였습니다. 이슬람 세력과 전쟁을 벌인 십자군 이야기나 가톨릭 영주와 개신교 영주가 싸운 30년 전쟁 이야기는 접어두겠습니다. 아메리카 발견 이후 스페인과 포르투갈과 영국은 기독교 이름으로 그곳을 식민지로 삼았습니다. 그곳에 살던 원주민인 인디언을 몰아내고 자신들의 땅으로 삼았습니다. 평화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기독교가 폭력적이었다기보다는 폭력적인 정치인이 기독교를 이용한 것이지만, 그렇게 이용당한 기독교도 변명의 여지는 물론 없습니다. 이제라도 기독교는 원래의 평화 전통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평화의 왕으로 오셨다는 사실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합니다.
이게 말로 되는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인 개개인이 우선 평화로운 존재로 변해야 합니다. 예수가 자기 인생에서 평화의 왕이라는 사실을 절감해야 합니다. 그게 회심입니다.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늘어나면 세상이 평화 지향적으로 조금씩이라도 바뀔 겁니다. 그 평화의 완성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그리고 하나님이 보내시는 메시아가 하겠으나 그 결정적인 순간이 오기 전까지 우리는 그 방향으로 치열하게 밀고 나아가야 합니다. 미가는 “여인이 해산하기까지”(5:3)라는 표현을 통해서 메시아가 오기 전의 상황을 예상했습니다. 평화의 미완을 참아낼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여러분도 개인적으로 그런 평화의 미완을, 즉 해산의 고통 과정을 살아가고 있듯이 말입니다.
왜 예수인가?
마지막 질문입니다. 예수가 평화의 왕인 근거는 무엇인가요?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다시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인 가르침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원래 기본이 늘 중요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문제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발생한다고 생각합니다. 죄는 곧 하나님과의 단절에서 오는 겁니다. 지금 우리의 주제인 평화 문제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평화롭게 살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안에서만 영혼의 평화와 안식을 누릴 수 있는 존재인 인간이 하나님 밖으로 나왔다면 당연히 그 평화와 안식은 깨집니다. 하나님 안과 밖이라는 표현이 멀게 느껴지신다면 생명 충만감과 결핍감으로 바꿔서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길을 걷습니다. 눈에 들어오는 모든 모습이 황홀하게 느껴집니다. 자신이 지구의 중력을 적당한 힘으로 버티는 그 순간의 쾌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겨울바람으로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이런 충만감 안에 있으면 인생살이에서 아쉬운 게 없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과 생각이 달라도 크게 속상하지 않고, 조금 손해를 봐도 예민해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일상에서도 이런 경험이 가능하니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과 결속해 있다면 그는 평화롭게 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한 사람이 평화롭게 살면 주변에 있는 폭력적인 사람도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 과정이 어렵기는 하지만 준비만 되면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칩니다. 모든 문제는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뜻입니다. 동의하세요?
우리가 예수를 평화의 왕이라고 믿는 이유는 그를 통해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막혔던 담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불화가 해결되고 하나님과의 평화가 발생한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온전하게 신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절대적인 하나님 신뢰가 예수에게서 발생했다는 뜻입니다. 이제 자기가 자기 인생을 완성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묶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하는 걱정을 더는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 걱정은 이방인들이 하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이미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기에 이방인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살아갑니다.
이전투구처럼 작동하는, 그래서 살벌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온전하게 신뢰하려면 생각을 혁명적으로 바꿔야만 합니다. 이건 저도 잘 안 됩니다. 우리는 평생 하나님의 자녀와 이방인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 사는지 모릅니다. 생각을 혁명적으로 바꾼다는 말을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제가 어렸을 때 아이들은 모두 구슬치기와 딱지치기 놀이를 하면서 자랐습니다. 그 놀이 자체가 우리를 자유롭게 했고, 행복하게 했습니다. 가난한 집 아이나 부잣집 아이나 아무 차이가 없었습니다. 구슬과 딱지가 많아야만 행복한 게 아닙니다. 많이 가진 아이나 적게 가진 아이나 모두 놀이에 몰입합니다. 놀이의 충만감에 들어가는 겁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은 하나님의 놀이에 우리가 어린아이처럼 참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즉 생명 충만감이 무엇인지를 깊이 알면 소소한 일상에서도 돈으로 살 수 없는 삶의 재미와 행복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이룬 모든 사람에게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삶의 열매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일상이 평화롭지 않다면 하나님과의 평화도 없는 겁니다. 그 평화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발생했기에 우리는 그를 ‘평화의 왕’이라고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대림절 넷째 주일에 다음의 한 가지 사실만은 꼭 기억하십시오. 평화의 왕께서 이미 오셨고, 앞으로 다시 오실 것이며, 지금 이미 여러분 옆에 와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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