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미 5:2-5a, 대림절 넷째 주일, 2018년 12월23일
2.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3.그러므로 여인이 해산하기까지 그들을 붙여 두시겠고 그 후에는 그의 형제 가운데에 남은 자가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오리니 4.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목축하니 그들이 거주할 것이라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치리라 5.이 사람은 평강이 될 것이라.
평화와 예수 강림
오늘은 대림절 넷째 주일입니다. 대림절은 예수 강림을 기다리는 교회 절기입니다. 교회가 예수 강림을 기다린다는 말은 예수 강림을 통해서만 구원이 가능하다고 믿는다는 뜻입니다. 구원은 생명 완성을 가리킵니다. 생명 완성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아직 명백하게 알지 못합니다. 현대 물리학자들이 양자 현상을 부분적으로 설명할 뿐이지 양자 자체는 알지 못하는 거와 같습니다. 다만 지금 우리의 삶과 세상과 역사가 생명 완성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이를 확인할 수 있는 분명한 증거는 오늘 우리가 진정한 의미에서 평화를 누리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곳곳에서 평화는 위협당하고 파괴됩니다. 국제관계나 사회관계에서만이 아니라 개인의 차원에서도 평화는 요원합니다. 많은 이들의 마음과 영혼이 롤러코스터를 타듯이 요동칩니다. 그런 마음들이 여과 없이 밖으로 발산되면서 이웃과의 평화를 파괴합니다. 개인에 따라서 차이가 있으나 완전한 평화를 실제 삶에서 누리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평화 운운은 배부른 사람들에게 해당되지 지금 당장 먹고 사는 게 급한 사람들에게는 거리가 먼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평화를 추구하기보다는 남부러울 정도로 멋지게 사는 것이 우리 인생에서 최선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예수 강림과 평화 문제를 얼마나 진지하게 대하는지 잘 모릅니다. 다만 하나님 말씀에 붙들려 살아야할 운명의 설교자로서 지난 기독교 2천년 역사를 통해서 없어서는 안 될 절기로 받아들여진 대림절과 성탄절 신앙이 말하는 바를 오늘 여러분에게 전할 뿐입니다.
예수 강림을 기다리는 대림절 신앙은 구약성경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오늘 우리가 제1독서로 읽은 미가에 나옵니다. 여기서 한 지역 이름이 거론됩니다. 베들레헴입니다. 미 5:2절을 공동번역으로 다시 읽겠습니다.
그러나 에브라다 지방 베들레헴아, 너는 비록 유다 부족들 가운데서 보잘것없으나 나 대신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너에게서 난다. 그의 핏줄을 더듬으면, 까마득한 옛날로 올라간다.
‘에브라다’는 ‘에브랏’ 집안의 거주지라는 뜻입니다. 에브랏 집안 이야기는 삼상 17:12절에 나옵니다. 일개 목동인 다윗이 프로 격투사인 골리앗과 일대일 결투를 벌이기 직전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은 다윗을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 이새의 아들로 소개합니다. 에브랏은 유다 지파에서 1천명을 넘지 못하는 작은 부족입니다. 우리나라 족보 이야기와 비슷합니다. 저의 경우에 한자로 나라 정(鄭)을 성씨로 합니다. 본관은 봉화입니다. 저의 조상이 경북 봉화에서 살았다는 뜻이고, 나중에 거기서 갈라져 나와 강원도로 이주한 이들 중의 하나가 저의 조상입니다. 미가의 선포에 따르면 에브랏 족속이 터 잡고 산 베들레헴은 비록 작은 마을이지만 거기서 위대한 인물이 나올 것입니다. 첫 번째 위대한 인물은 이미 유대 역사에 등장했던 유대 왕조의 태두인 다윗이었고, 앞으로 다윗의 후손 중에서 정말 새로운 인물이 나타날 것이라는 겁니다.
미가가 예언한 그 아이가 자라서 어떤 일을 할 것인지에 관한 이야기가 4절에 나옵니다. 여호와의 능력과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표현들이 어떤 이들에게는 상투적으로 들릴 겁니다. 여호와를 ‘창조자’로 바꿔서 읽어보십시오. 창조자의 능력은 우주의 시작인 빅뱅과 연결되며 오늘의 모든 우주와 역사 현상에 연결됩니다. 개인적으로는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가는 모든 것들과도 연결됩니다. 여호와의 능력은 중력이고 흑암 에너지이고 바람이며, 역사와 진화의 힘입니다. 철학적인 개념으로 바꾸면 존재의 힘이고 사랑과 평화의 능력입니다. 미가는 미래에 태어날 이 아이를 목자로 표현합니다. 목자는 양을 책임지는 사람입니다. 양은 목자를 통해서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목자의 역할이 단순히 유대 민족에게 한정되는 게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미친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치리라.”(4b)고 했습니다.
미가의 이런 예언은 당시 다른 선지자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는 이사야입니다. 사 7:14절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말은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들이 그들의 역사에서 벌어진다는 뜻입니다. 그 하나님의 일은 정의, 공의, 자비, 긍휼 등등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평화입니다. 미가가 예언한 인물이 핵심적으로 할 일 역시 평화입니다. 미 5:5a절은 이렇습니다. “이 사람은 평강이 될 것이라.” 루터는 우리말 성경이 평강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샬롬을 Friede라고 번역했습니다. 프리데는 평화입니다. 공동번역 역시 ‘평화’로 번역했습니다.
전쟁 연습
미가는 평화에 대한 예언을 4장에서 자세하게 피력했습니다. 미 4:3절은 사 2:4절과 거의 똑같은 내용입니다. 당시 선지자들의 관심이 무엇이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들어보십시오. “그가 많은 민족들 사이의 일을 심판하시며 먼 곳 강한 이방 사람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 아주 강렬한 메시지입니다. 칼을 쳐서 보습(쟁기)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든다는 것은 더 이상 전쟁을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입니다. 구체적으로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만약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상상해보십시오.
내년도 우리나라 국방예산은 대략 전체 국가예산인 460조원의 10%에 해당되는 46조원 내외입니다. 여기에는 군인들의 연봉을 비롯해서 무기구입과 군부대 운영에 필요한 전반적인 경비가 다 포함됩니다. 이것을 교육과 일자리와 의료 부분에 사용한다면 삶의 질이 훨씬 좋아지지 않겠습니까. 남한의 기독교인들이 이사야와 미가 선지자의 외침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다면 국방비 축소를 외쳐야합니다. 한반도에서 더 이상 전쟁을 연습하지 말라고 외쳐야합니다. 얼마 전에 남북한 당국에 의해서 비무장지대의 GP가 철거되었습니다. 역사적 사건입니다. 이런 일에 한국교회는 박수를 보내야합니다. 남북철도를 복원하기 위한 준비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국방비를 줄여서라도 이런 일에 세금을 사용해야합니다. 이사야와 미가는 분명히 칼을 쟁기로 만들고, 창을 낫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외치지 않았습니까. 한국교회의 일부만이 선지자들의 이런 전통을 이어받으려고 하지 대형교회를 비롯한 대부분의 교회는 남북평화를 위한 움직임에 대해서 냉소적으로 대하거나 오히려 반대합니다. 그들의 입장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냉전적 사고방식에 묶여 있는 데에는 멀게는 남북 6.25 전쟁 경험이 트라우마로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과 북한이 핵무기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 놓여있습니다. 트라우마는 질병의 하나이니 치료해나가야 하고, 북한 핵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선제적으로 평화 지향적 정책을 펼쳐야 합니다. 한민족의 운명에서 현재 가장 중요한 분단체제에 대해서 신학적이고 신앙적인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는 한국교회는 훗날 역사적 판단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선지자적 영성은 둘째 치고 제 앞가림도 못하고 있으니 할 말이 없긴 합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이런 설교를 할 뿐이지 실제로는 아무 역할도 못하고 있어서,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다만 선지자나 목사는 말을 하는 사람이니 그 사명이나마 최선으로 감당하겠습니다.
미가가 활동하던 기원전 750-690년은 유대 역사에서 매우 어두운 시절에 속합니다. 미가는 북이스라엘이 기원전 722년에 아시리아 제국에 의해서 멸망당하는 것을 목도했습니다. 아시리아의 속국이 되어 겨우 왕조 멸망만은 면한 남유대도 사정이 녹록치 않았습니다. 모두 정신을 바짝 차려야만 합니다. 나라를 새롭게 하고 신앙도 반듯하게 일으켜야합니다. 한 나라도 한 가정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사업이 망하거나 실업자가 되었다면 가족들이 서로 마음을 하나로 모아 어려움을 헤쳐 나가야 합니다. 미가가 활동한 유다는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왕실을 비롯한 지도층에 속한 이들은 불의를 자행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고위 성직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2:1,2절에 따르면 지도자들은 잠을 자면서도 악을 꾸미고 날이 밝으면 자신의 권력으로 악을 실행합니다. 남의 밭을 빼앗고 집을 차지하고 사람들을 노예로 삼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돈벌이에 매달린다는 뜻입니다. 3:2,3절은 이렇습니다. “너희가 선을 미워하고 악을 기뻐하여 내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그 뼈에서 살을 뜯어 그들의 살을 먹으며 그 가죽을 벗기며 그 뼈를 꺾어 다지기를 냄비와 솥 가운데에 담을 고기처럼 하는도다.” 미가 선지자의 이런 외침이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사실을 아는 분들은 다 알 겁니다. 미가는 결국 예루살렘과 성전은 황폐해질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3:12). 모두가 자포자기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이런 와중에 미가는 베들레헴 에브라다에서 태어날 아이가 목자로서 세상을 다스릴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그 아이는 모든 인류에게 평화를 줄 것입니다.
미가의 예언이 성취된 예수
예수의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은 미가의 이 예언이 예수에게서 성취되었다고 보았습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동방박사 이야기를 하면서 미가 선지자의 이 예언을 인용했습니다. 헤롯 왕 시절에 예수가 유대 베들레헴에서 출생했고, 동방의 현자들이 예수를 찾으러 왔습니다. 사회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걸 느낀 헤롯 왕은 대제사장과 서기관을 비롯하여 유대교 전문가들을 불러서 ‘그리스도가 어디서 태어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미 5:2절에 근거하여 유대 베들레헴에서 날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미가 선지자의 예언을 예수 출생과 연결했다는 것은 마태복음 기자가 예수의 구원을 평화 사건으로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누가복음 기자도 예수 출생을 평화와 연결해서 전했습니다. 목자들은 예수 출생 소식을 천사들에게 전달받은 뒤에 천사들의 찬송을 들었습니다. 그 찬송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예수가 평화를 가져온다는 말이 옳습니까? 설교 앞 대목에서 말했듯이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에서는 ‘그렇다.’고 대답하기가 어렵습니다. 기독교 정신으로 살아간다는 유럽과 북미 국가들이 평화 지향적이지도 않고, 부분적으로 그런 노력들이 성과를 내지도 못했습니다. 오늘날의 평화는 오히려 폭력적일 때가 많습니다. 칼을 더 많이 생산하고 창을 더 많이 생산해서 상대를 굴복시킴으로써 평화를 만들 수 있다고 그들은 생각합니다. 칼과 창의 위협을 통한 평화는 평화가 아닙니다. 상대가 더 강한 무기를 손에 드는 순간에 평화는 깨집니다. 그렇다면 예수로 인해서 평화가 주어진다는 성경말씀은 틀린 것일까요? 저는 두 가지 근거에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예수가 평화의 담지자, 즉 평화의 왕이라는 말은 이 사실을 알고 믿는 사람들이 평화 지향적으로 살겠다는 고백입니다. 이 세상에 평화가 불가능한 이유는 사람들의 욕망들이 서로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카풀 실행 문제를 놓고 영업용 택시 운전사들이 대규모 집회를 열었습니다. 시민들의 편의와 택시 운전사들의 이해가 충돌한 겁니다. 국가 사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류가 존속하는 한 완전한 평화는 성취될 수 없습니다. 동물의 세계를 보십시오. 겉으로는 평화스럽고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과 비슷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곤충들끼리 서로 잡아먹고 먹힙니다. 인간과 박테리아도 전쟁을 벌이는 중입니다. 저는 지금 평화롭게 살지 못하는 것이 어쩔 수 없다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라도 오히려 치열하게 평화 지향적인 삶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둘째, 참된 평화는 종말론적인 사건입니다. 세상이 끝날 때 참된 평화가 주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죽을 때 평화와 안식이 주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의 재림을 기다린다는 말도 이것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평화 지향적인 노력이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면 오해입니다. 종말론적인 신앙을 아는 사람은 그 종말을 당겨서 삽니다. 예를 들어서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여기 자주 싸우는 부부가 있다고 합시다. ‘평생 원수’로 삽니다. 이혼하거나 둘 중의 한 사람이 죽으면 싸움은 그칩니다. 그런 순간이 곧 들이닥친다는 사실을 절감한다면 상대방에 대한 생각도 달라집니다. 늙는다는 것이 이런 점에서는 사람과의 관계를 평화롭게 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나이가 든 분들이 자주 그런 말을 합니다. 미웠던 남편도 측은지심이 든다고, 연민이 느껴진다고 말입니다. 늙기 전에 그런 마음으로 관계를 맺고 사는 게 좋겠지요. 잘 안 되면 조금만 기다려보십시오. 늙으면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지금 현실에서 우리 개인들이 어떻게 영혼의 평화를 누릴 수 있는지, 종말론적인 평화를 어떻게 지금 여기에서 현실로 당겨서 살아낼 수 있는지, 신앙적인 관점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그 길을 알고 싶은 분들이 있을 겁니다. 이게 이론으로 해결되는 게 아니라서, 그리고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것이라서 간략하게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영혼의 평화를 깨뜨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해보십시오. 돈이 부족하다거나 몸이 약하다는 것을 그 원인으로 볼 수도 있으나, 그것이 결정적인 게 아니라는 것은 모두 알 겁니다. 가난하면 가난한대로 영혼의 평화를 누리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가난한 교회에서도 영혼의 평화를 경험하는 사람들이 많은 거와 같은 이치입니다. 영혼의 평화를 파괴하는 가장 결정적인 것은 생명의 결핍감입니다. 그걸 채우려고 안간힘을 쓰는데도 해결되지 않으니 영혼의 평화가 주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 생명의 결핍감을 성경은 죄라고 말합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죄의 결과입니다. 결핍갑을 해결하려다가 삶의 모든 에너지를 발산하면 영혼이 바닥을 보입니다. 그게 죽음입니다. 기독교는 예수가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다고 가르칩니다. 예수와의 일치를 통해서 생명의 결핍감에서 해방되어 충만감에 이른다는 뜻입니다. 이를 알고 경험한 사람은 일상에서 평화를 경험하고, 종말론적으로 열린 평화를 지금 여기에서 현실로 살아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합니다. 그것이 곧 구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대림절 넷째 주일입니다. 이틀 후면 성탄절이 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은 지금 생명 충만하신가요? 평화 지향적이신가요? 세상살이에 쫓겨서 이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는 것은 아니신가요? 잊지 마십시오. 베들레렘 에브라다에서 평화를 이룰 한 아이가 태어날 것이라는 미가의 예언은 베들레헴에서 실제로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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