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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푯대를 향하여 (빌 3 : 5 ~ 16)

▣ 들어가는 말

- 노아와 세 아들

창세기 6장부터 10장까지 노아와 홍수에 관련된 이야기가 나옵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창6:9) 온 세계가 죄악으로 가득할 때,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6:5) 이 어둠의 세계에 한 사람의 영웅, 의인을 등장시킵니다. 세상의 파멸로부터 생명을 이어갈 사람으로 노아를 선택합니다. 과연 그는 그런 역할에 어울리는 사람이 틀림없습니다. 그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입니다. 엄청난 표현입니다. 의인이요, 완전한 사람이라니요.

아무튼, 그 사람이 지은 방주를 통해 세상은 생명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도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라도 실수를 합니다.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9:20~21). 왜 이런 장면을 묘사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 모습을 아들이 보게 되지요. 노아는 셈과 함과 야벳이라고 하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함이 아비의 벌거벗은 몸을 보고 형제들에게 이야기했더니 셈과 야벳이 옷을 들고 뒷걸음질을 쳐서 아비의 부끄러움을 덮어주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25절) 여기서 가나안은 함을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아버지의 하체를 보았다는 이유로 그는 저주를 받습니다. 아버지의 부끄러움을 덮어 준 다른 두 형제는 축복을 받지요. 참 재미있는 장면입니다. 이것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 대한 어떤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는 장면처럼 보입니다. 뭔가 우리에게 드러내 줄 통찰이 숨어있는 것 같습니다.

 

- 부모와 자식 : 그 비극에 관하여…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인류의 영원한 숙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어떤 관계보다도 친밀하고 강력한 유대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 어떤 관계보다도 깊은 고통과 아픔을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에서 아버지를 죽여야 하는 운명을 피하고자 몸부림쳤으나, 결국 아버지를 죽이고서야 자기의 삶을 사는 오이디푸스 왕의 모습을 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아들(자녀)은 아버지(부모)를 넘어서야만 하는 존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반드시 그래야만 오롯이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주는 기쁨은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크지요. 그런데 제가 상담을 해보면, 많은 이들이 부모(특히, 아버지)에게서 받은, 말할 수 없는 상처를 간직하고 있는 것도 봅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그 어떤 것보다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어떤 것보다 불행과 고통을 가져다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 인생에서 큰 딜레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노아의 두 아들은 아버지의 치부를 보지 않으려 뒷걸음질로 아버지에게로 갑니다. 세상 그 무엇보다 좋은 존재인 부모. 무한한 사랑으로 나의 모든 것을 받아줄 것 같은 존재. 그러나 그 부모 역시 한계성을 가진 죄 많은 가련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불행일까요. 그 누구보다 자식에게만큼은 완전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부모 역시 허물투성이의 불완전한 인간이지요.

그러기에 어쩌면 자식이라는 존재는 언제나 부모의 허물을 보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려 뒷걸음질로 부모님께로 나아가야만 하는지도 모릅니다. 부모의 허물을 덮어주고 모른 채 해주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리해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나 봅니다.

 

- 의존과 자립

엄밀히 생각해보면, 세상 그 어떤 관계보다 정직하고 아름다워야 할 관계가 이렇듯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수 없는 관계라면… 이 얼마나 큰 비극인가요. 그러나 이 깊은 비극 안에 놀라운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도 같습니다.

 

한때 완전하다고 믿었던 부모의 나약함과 인간적인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고 실망합니다. 상처를 받습니다. 그러나 그렇기에 자식은 부모로부터 온전한 독립을 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자기 스스로 부모를 떠나 자신만의 삶을 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자신에게 실망을 안겨준 부모를 넘어, 더 나은 사람, 더 나은 부모가 되기 위해 자신의 길을 기꺼이 나서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다면 영원히 부모에게 온전히 독립하여 완전한 주체적 자기, 주체적 삶을 살 수 없지 않을까요.

한편 자신을 향해 무한대의 신뢰를 보내던 자녀가 더 이상 그런 눈빛을 거두게 될 때, 부모는 어떤 슬픔을 느낄까요. 자신의 바람대로, 가르침대로, 인도하는 대로 따르던 자녀가 자신의 말을 잔소리쯤으로 여길 때, 나를 떠나 남모를 타인의 가르침을 따르려 할 때, 부모의 마음은 부서져 내립니다. 그리고 스스로가 그런 완전한 안내자, 인도자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 슬픔과 비통을 통해서 부모는 자녀를 놓아주게 되지요. 독립적인 인격으로, 온전한 개체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인류는 조금씩 더 나아지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그 자녀도 언젠가 머리가 희끗희끗해지는 때가 되면, 그들이 거부하며 넘어서고자 했던 그들의 부모와 같은 일을 경험하게 되겠지요. 그리고 한 사람으로서 부모를 이해하게 되지요. 이러한 과정을 자연적인 것으로 잘 받아들이고 잘 견디면서 우리는 좋은 사람이 됩니다. 사람다운 사람이 됩니다. 완전해서가 아니라, 한계성을 가진 인간이기에 이런 고통과 슬픔을 겪으며 성숙해 나아가는 것이지요.

 

 

▣ 지혜의 왕 솔로몬

- 위대한 아버지

앞서 말씀드렸듯, 대부분 사람은 가장 사랑하고 가장 은혜를 많이 입은 아버지(부모)를 부끄러워해야 하는 것, 아버지의 치부를 보지 않기 위해서 얼굴을 옆으로 돌린 채 아버지에게 뒤쪽에서 다가가야 하는 슬픔과 운명을 짊어져야 합니다. 어렸을 때, 막연히 가장 훌륭하고 가장 힘이 세고, 가장 아름답고, 한없이 좋기만 했던 그 부모가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부족하고 한계를 지닌 여느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 받아들이게 되지요.

 

그러나 솔로몬에게 아버지 다윗은 너무나도 훌륭한 위대한 왕이자, 아버지였습니다. 온 민족의 자랑이자,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의 기억 속에서 높이 찬양될만한 선택받은 자이자 탁월한 자이자 민족의 힘이자 나라의 자랑거리이자 하나님의 벗이자 미래의 약속이기 때문에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는 행운을 가졌다면, 이보다 더 큰 행복이 어디 있을까요. 너무나 행복한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솔로몬은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행운아 중 하나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갖지 못한 아버지를 가졌으니 말입니다. 존경할 부모를 갖는다는 것은 너무나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크고 훌륭한 유산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그 위대한 다윗 곁에는 나단이라는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나단은 왕이 잘못된 길을 걸을 때마다 범죄를 질책하며 견책하였습니다. 나단은 ①다윗이 성전을 건축하려 할 때, 성전 건축 자체는 찬성하지만, 다윗이 아니라 아들 솔로몬에게 건축을 맡길 것을 전합니다. ②다윗이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야를 전쟁터로 보내 죽게 했을 때, 그 죄를 다윗의 면전에서 폭로하고 그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를 선포합니다. ③솔로몬이 태어났을 때, 하나님의 명을 받아 ‘여디디아(여호와께서 사랑하심)’이라는 이름을 붙여줍니다. ④아도니야가 반란을 일으켜 왕이 되려고 할 때 나단은 밧세바를 찾아가 솔로몬이 왕이 되도록 다윗에게 청하라고 권면합니다. ⑤제사장 사독과 브나야와 함께 솔로몬을 노새에 태우고 기혼으로 가서 대관식을 거행합니다.

 

- 선지자 나단

선지자 나단은 다윗에게도, 솔로몬에게도 특별한 존재였던 것 같습니다. 다윗의 곁을 지키며 다윗의 명령에 목숨을 걸었던 수많은 충신과 용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희생과 충성이 없었다면 다윗은 성공한 군주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나단의 존재는 더욱 특별했습니다. 다윗이 잘못된 선택을 할 때마다,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질책하며 다윗의 길을 바로잡습니다. 왕의 권력이나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진정 어린 충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다윗이 단순히 왕위에 오르는데 그치지 않고 이스라엘 모든 이의 성군이 되게 한 결정적 역할을 하였던 것입니다.

아울러 나단은 솔로몬과도 각별한 관계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솔로몬의 이름을 지어주고, 솔로몬이 왕위를 물려받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나단이 없었다면 솔로몬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성경에 자세히 나타나 있지 않지만, 다윗의 집안과 나단은 매우 특별하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서로에 대한 깊은 신뢰가 바탕에 있음은 물론입니다.

 

- 드러난 진실

솔로몬은 위대한 선지자 나단에게서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납니다. 아버지 다윗은 늘 국정에 바빴기에 자주 볼 기회도 거의 없었습니다. 어머니 밧세바는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야라고 하는 훌륭한 다윗의 장군이었던 이의 아내였습니다. 그러한 상황을 생각해보면, 다윗이 솔로몬을 가까이에 두고 아끼는 모습을 보이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어쩌면 궁에 함께 있지도 않고 나단의 집에서 살았을 지도 모르지요.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고 했던가요. 다윗의 위대함과 업적은 너무나 굉장해서 솔로몬이 좇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온갖 시련을 견디며, 크고 작은 전쟁에서의 굉장한 무용담, 백성들의 마음을 그에게로 이끄는 지도력 등… 솔로몬에게는 그런 환경과 여건이 허락되지 않았던 것이지요. 하여간 아버지의 카리스마와 하나님 앞에서의 진실한 신앙, 수많은 업적은 그를 경탄하게 했습니다. 늘 존경하는 아버지, 위대한 왕이었지요. 경외심마저 느껴질 정도였지요.

 

그러던 어느 날, 아직 청소년의 때를 벗어나지 못한 어느 날 솔로몬은 왕이 된 아버지를 방문합니다. 흥분을 감출 수 없습니다. 먼발치에서만 바라보던 왕이 된 위대한 아버지를 직접 보다니요. 아버지가 자신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려줄지, 자신을 좋아할지, 어떤 모습으로 아버지를 대해야 할지, 설레기도 하고 기대가 되기도 하는 그런 시간을 보냅니다. 기대한 것보다 더 용감하고 부드럽고 지혜로운 왕을 만났겠지요. 그리고 그날 밤 아버지의 침실에서 뭔가 인기척 소리를 듣고서 잠을 깹니다. 갑자기 불길한 예감과 공포가 그를 덮쳐옵니다. 혹시나 아버지를 해치려는 자객이 온 것은 아닐까. 두려움에 몸서리가 쳐집니다. 잔뜩 긴장하며 살금살금 아버지의 침실로 향합니다.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위대한 왕, 아버지 다윗의 모습이 보입니다. 다행히 위험한 상황은 아닙니다.

그러나 충격적인 모습을 목격합니다. 그리도 위대하고 완전하게 보였던 다윗 왕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참회를 하고 있습니다. 뜨거운 눈물과 흐느낌. 참회하는 영혼이 부르짖는 절망의 울음소리를 듣습니다. 자신의 잘못과 죄, 추악한 욕망에 대해 너무나 고통스러워하며 절규하는 너무나 초라하고 불쌍한 한 사람을 본 것입니다.

 

- 솔로몬의 깨달음

어쩔 줄 몰라 조용히 다시 침대로 돌아옵니다. 잠이 오지 않습니다. 잠이 들었지만, 휴식을 취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꿈을 꿉니다. 다윗은 신에게 벌을 받은 배덕자라는 꿈, 만왕의 왕 하나님의 분노가 다윗에게 내리는 꿈, 하나님을 잘 섬긴 보상으로가 아니라 오히려 형벌로써 제왕이 되어야 하는 꿈을 꿉니다. 다윗은 통치자가 되도록 저주받았다는, 즉 하나님의 정의가 아무도 모르게 다윗의 죄를 심판하는 동안 백성들의 칭송과 찬사만이 귀에 들려오는 군주가 되어야 하는 저주를 받는 꿈을 꿉니다. 그리고 그 꿈은 하나님이 정의로운 자의 신이 아니라 배덕자의 신이며, 하나님의 선민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배덕자여야 한다는 것을 직감합니다.

 

- 종교적 실존

이 이야기는 키르케고르의 글을 참고로 제가 다시 재구성해 본 것입니다. 여기에 키르케고르의 놀라운 통찰이 숨어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참회하는 마음으로 땅에 엎드려 있을 때, 솔로몬은 침실에서 일어나 다윗의 연약함, 불의함, 한계성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 충격은 너무나 커, 거의 넋이 나간 상태가 됩니다. 그리도 훌륭한 다윗의 진실이 이런 것이었다니… 하나님의 선민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데 생각이 미쳤을 때 전율이 솔로몬을 덮쳐옵니다. 믿는 자와 하나님의 친교의 본질을 깨닫게 됩니다. 거룩한 주 앞에서 그 누구도 자신의 순결과 정직을 드러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전적인 타자, 완전한 절대자 앞에서 우리의 모든 부끄럽고 은밀한 죄가 낱낱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종교적 실존에 다다른다는 것은 더 이상 어떤 시험도 유혹도 없는 흔들리지 않는 완전한 경지에 다다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는 단연코 없습니다. 인간의 근원적이고 존재론적인 불안과 절망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종교적 실존에 다다랐다고 해서 완전하게 불안과 절망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경지를 꿈꾸십니까? 인간의 구원은 그런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 불안과 절망이 있기에 우리는 온전한 인간일 수 있습니다. 부단히 주를 향한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불안과 절망에 이리저리 휩쓸리지 않으며, 완전히 벗어났다고 자만하고 오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5:20) 어둠이 있어, 불안과 절망이 있어, 우리는 사람일 수 있고,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고, 오직 은혜로,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 나가는 말

- 옥중서신

오늘 본문말씀으로 읽은 빌립보서는 바울의 옥중서신(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빌립보서) 가운데 하나인데 63년경에 쓰인 것으로 봅니다. 로마의 감옥에서 쓴 것으로 알려져 있지요. 2년간의 투옥생활 이후 잠시 풀려나 스페인 선교활동을 계속하다가 순교하게 되지요.(67~68년 경) “기쁨의 서신”이라는 별명이 있기도 합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그것조차도 오히려 복음이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으니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에게 행복, 기쁨의 기준은 육체의 안락함이나 편안함이 아니라 자신을 통해서 오로지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것, 그리스도가 영광을 얻는 것이랍니다. 정말이지 굉장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육체적으로 윤리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삶은 너무나 완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깁니다. 신 앞에선 실존, 종교적 실존을 경험하게 되자, 자신이 그리도 소중히 여기던 그 모든 것들이 한낱 배설물로 밖에 여겨지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완전한 삶의 의미와 온전한 자기 자신을 발견한 이에게, 쓸데없는 자존심과 많은 물질과 세상에서의 명예와 스스로 도덕적 선을 지킨다는 윤리의식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비켜주시오, 햇볕을 가리고 있소.” 라고 일갈했던 디오게네스처럼, 완전한 진리와 자유를 소유한 이에게 권력자가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 푯대를 향하여

유진 오닐은 퓰리처상을 네 번이나 수상한, 상업적인 연극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 미국 최고의 극작가입니다. 그의 작품 『밤으로의 긴 여로』는 그에게 네 번째 퓰리처상을 안겨준 작품인데, 자신의 비극적인 가족사를 담고 있습니다.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이 작품은 티론과 그의 아내 메리, 그리고 큰 아들 제임스와 작은 아들 에드먼드로 이루어진 한 가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메리는 마약중독자인데, 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다락방에서 웨딩드레스를 찾아서 들어옵니다. “내가 뭘 찾고 있었더라? 잃어버렸던 거였는데…” “꼭 필요한 건데. 아주 잃어버렸을 리가 없는데.” “꼭 필요한 건데. 그게 있었을 때는 전혀 외롭지도 않고 두려움도 없었어. 영영 잃어버렸음 안 돼. 그런 생각만 해도 난 죽어버릴 거야. 그렇다면 아무 희망이 없는 거니까.” 마약에 취해서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로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왜 웨딩드레스를 가지고 왔는지도 모른 채… 뭔가를 찾고 있습니다. 사실은 무엇을 찾는 지도 모르면서요. 남편과 두 아들과 그녀 자신의 삶이 완전히 망가져 버린 후에, 정신마저 놓아버린 것이지요. 그러나 무의식적으로 자기를 자기답게 하는, 자기의 삶을 지켜줄 수 있는 그 무엇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그것을 찾아야한다고 온전치도 않은 정신으로 웅얼거리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인이라면, 우리가 결코 잃어버리지 말아야할 무엇이 있습니다. 그것을 놓쳐버린다면, 우리가 아무리 예배와 기도와 온갖 종교적 형식을 지키고 따른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타락했고, 완전한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 외에 우리에게 구원의 길은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육체적으로 윤리적으로 사회적으로 근사하고 멋지고 아름답고 고귀한 삶을 산다고 해도 우리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깊은 한계와 절망을 품고 있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난 그 놀라운 은혜와 사랑과 구원이라고 하는 푯대를 향해 달려갈 뿐입니다. 그 푯대를 잃어버리지 않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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