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와 해방
계 1:4-8, 부활절 둘째 주일, 2019년 4월28일
4.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와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5.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6.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7.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8.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신구약성경 66권 중에서 요한계시록만큼 특이한 성경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문장 형식도 특이합니다. 현대의 초현실주의 문학작품을 대하는 느낌이 듭니다. 한 예를 들면 4:1절 이하에 나오는 하늘 보좌에 대한 묘사입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무지개가 보좌를 둘렸고, 그 보좌에 24 보좌들이 둘려 있고, 그 보좌에 24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으며,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나고 보좌 앞에 등불 일곱 개가 있다고 합니다. 이어서 여러 가지 이상한 생명체가 나옵니다. 우리가 현실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형태들입니다. 이런 묘사들이 요한계시록에 많이 나옵니다. 극단적인 상징을 통해서 기독교 진리를 전하려다보니 이런 일들이 벌어진 겁니다. 영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나 <아바타> 등을 생각하면 됩니다.
희생제사
우리가 읽은 설교 본문인 계 1:4-8절만 해도 도대체 저게 무슨 말이지, 하는 질문이 나올만한 내용이 많습니다. 4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와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요한은 아시아, 그러니까 요즘의 터키 지역에 있는 일곱 교회에게 보내는 글을 쓰는 중입니다. 이 대목은 인사에 해당됩니다. 인사는 보통 은혜와 평화를 비는 겁니다. 단순한 은혜와 평화가 아니라 ‘누구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화입니다. 그 누구에 해당되는 대상은 위 구절에 둘입니다. 하나는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입니다. 하나님을 가리킨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표현이 8절에 다시 나옵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치 올 자요 전능한 자라.” 다른 하나는 ‘그의 보좌에 앞에 있는 일곱 영’입니다. 성령을 가리킨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성령의 이름으로 요한은 그 혹독하고 절박한 시절에 은혜와 평화의 인사를 전했습니다. 하나님과 성령이 언급되었으니 다음에는 누가 언급되어야 할지 예상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훨씬 많은 것을 말합니다. 5절을 읽겠습니다.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5절에 매우 특징적인 표현이 나옵니다. ‘그의 피로 우리의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가 그것입니다. 피로 해방된다는 이런 표현은 현대인들을 곤혹스럽게 만듭니다. 이 표현은 고대 유대인들의 희생 제사를 배경으로 한 것입니다. 그들은 동물을 잡아 피를 제단에 뿌리는 방식으로 희생 제사를 드렸습니다. 동물의 피는 제사를 드리는 사람의 피를 대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죽어야 마땅하지만 사람이 직접 죽을 수 없으니 동물의 피를 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동물의 피를 받으시고 제사 드리는 사람의 죄를 용서한다는 종교의식이 희생제사입니다. 우리나라의 전례 전통인 제사도 이상한 건 마찬가지입니다. 죽은 조상의 혼령이 제사 자리에 와서 제사 밥을 먹는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아 보입니다. 이런 고대인들의 종교의식이 이상하게 보이기는 하지만 그 깊이를 잘 따라가면 이해 못할 것도 없습니다. 고대 유대인들이 동물의 피를 제단에 뿌린 것은 하나님께 자신들의 생명을 바치는 심정으로 살아가겠다는 의미입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을 삶의 중심으로 삼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그들의 죄를 용서했다는 말은 생명을 허락했다는 뜻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동물을 잡아드리는 희생제사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모든 희생 제사를 단 한 번에 완성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이 말하는 ‘그의 피와 우리의 해방’이라는 표현의 의미입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은 이렇게 질문할 겁니다. 예수라는 유대인 남자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어떻게 죄에서 해방되느냐, 하고 말입니다. 이런 질문에 대해서 여러분은 어떤 대답을 준비하고 있으신지요.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우리가 모든 것을 일일이 대답할 수는 없고, 대답할 필요가 없기도 합니다. 최소한 우리 자신에게는 설득력 있는 대답이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실제로 믿을까요? 그런 경험이 실제로 있을까요? 개인에 따라서 다를 겁니다. 믿기는 하지만 경험은 없을 수 있고, 믿지도 못하고 경험도 없을 수 있습니다. 이런 믿음과 경험이 없으면 우리의 신앙은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교회의 형식과 메커니즘 안에 그냥 머물러 있을 뿐입니다. 오늘 우리는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 앞에 섰습니다.
예수의 죽음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따지고 보면 이해하기 곤란한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죽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에 관해서 자신의 생각을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유대교 전통으로 살았습니다. 유대교 전통은 율법입니다. 모세 오경이 가장 중요한 율법입니다. 그 외에도 불문율로서의 율법이 많았습니다. 안식일에는 노동하지 말아야 한다거나 부정한 음식과 정한 음식을 구분해서 먹어야 하고, 더 독실한 유대인이라면 죄인이나 세리들과 어울리지 말아야 합니다. 앉을자리와 앉지 말아야할 자리를 구분해야합니다. 그런 것들이 다 좋은 전통들입니다. 그런 전통들이 세월이 흐르면서 절대적인 도그마로 작용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삶을 그 율법을 잣대로 규정하는 것입니다. 다른 길이 없으니 당시 사람들은 종교 지도자들의 가르침에 따라 율법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삶의 방식이 그들에게 어느 정도 위로가 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들이 유대교의 종교 도그마에 눌려서 살기에 참된 자유와 평화를, 즉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누리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종교 도그마라는 표현을 하지 않았으나 그런 의미로 말씀하셨습니다. 예를 들자면 안식일을 위하여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을 위하여 안식이 있다고 말입니다. 이 말은 결국 당신 안식일 개념이 종교 도그마 자리를 잡아서 삶을 위축시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장애인을 고친기도 했고, 어울리지 말아야 할 죄인들과 어울리면서 먹고 마시는 데서도 율법의 눈치를 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삶의 새로운 빛을 발견한 당시 유대 민중들이 예수님에게 몰려들었습니다. 유대교 당국은 위기를 느꼈습니다. 급기야 성전 청결 사건을 계기로 그들은 예수를 제거하기로 작정했습니다. 예수를 제거하는 방법은 여럿입니다. 하수인을 시켜서 테러를 행할 수도 있고, 종교재판을 열 수도 있고, 당시 사법권을 행사하던 로마 총독에게 고발할 수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쬐어오는 위기를 느꼈습니다. 지금의 방식으로 계속 나아가면 그 결과가 어떨 거라는 건 명백합니다.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고난 받아 죽을 거라는 말씀을 제자들에게 몇 번에 걸쳐서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고난당하고 죽을 거라는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아일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메시아는 고난을 당하지 않고 오히려 승리하는 자입니다. 사람과 세상을 심판하고 구원해야 할 자입니다. 십자가 죽음 앞에서 예수님의 생각도 복잡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확신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의존해서 살면 당연히 하나님의 뜻이 여기서 실현되어야 합니다. 십자가 죽음은 그것과 거리가 멉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이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자신의 소명을 감당하고 싶었습니다. 겟세마네 언덕에서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 운명을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이제 선택해야만 합니다. 유대교 당국자들과의 정면 승부는 아직 때가 아니라 생각하고 일단 갈릴리로 돌아가서 후일을 도모하든지, 아니면 정면 돌파를 시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후자를 선택했습니다. 정면 돌파라는 말이 여기에 딱 들어맞지 않습니다.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다기보다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십자가 죽음의 운명을 피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여러분이 잘 알고 있듯이 유대 종교와 로마 정치의 결탁된 힘에 의해서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한 사람의 운명은 당시에 가장 저주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고전 1:23절에서 바울은 십자가의 죽음이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짚었습니다. 십자가 죽음은 로마 형법에 따라서 반로마 반역자들에게 내리는 처형 방법입니다. 구약성경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신 21:22-23절에 따르면 사형에 해당되는 사람이 생기면 그를 죽인 다음에 다시 나무 위에 달아서 사람들이 그 장면을 보게 해야 합니다. 수 10:26절에 따르면 여호수아가 전쟁에서 사로잡은 왕들을 죽이고 나무에 매달고 저녁까지 나무에 달린 채로 두었다가 해질 때에 시체를 끌어내려서 처리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가장 저주스럽고 모멸스럽고 참혹한 죽음을 당한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을 당하자 제자들은 몸을 숨겼습니다. 당연합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한 사람의 책임이 자신들에게 오는 걸 그대로 감수하기는 어렵습니다. 오늘 우리도 사실은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고사하고 약간의 불이익과 손해가 예상되는 상황마저도 우리는 손사래를 칩니다. 예수의 죽음과 죄로부터의 해방은 아무런 연관이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십자가 죽음은 제자들에게서 보듯이 우리를 더 불안하고 더 비겁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로부터 해방되었다는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죄로부터의 해방
가장 일반적인 생각은 우리가 죄라고 생각하는 잘못을 예수님이 대신 감당하셨다는 것입니다. 거짓말, 위선, 온갖 부도덕한 마음과 행위는 이제 예수의 피로 씻겼으니 이제 안심해라, 얼마나 기쁜 일이냐, 하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의 피로 우리의 모든 죄가, 현재의 죄만이 아니라 미래의 죄까지 씻김을 받았다는 구원의 확신으로 삽니다. 그게 심리적으로 효과가 있기는 할 겁니다. 그런 마음으로 일시적인 기쁨이 있을지 모르나 실제 삶에서 자신의 한계를 또 다시 확인하고 낙심하며, 그 낙심을 극복하기 위해서 예수의 피로 씻김 받았다는 사실을 주문 외우듯이 반복합니다. 어떤 이들은 한걸음 더 나아가 예수의 피가 우리의 죄를 씻었고, 예수가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당했으니 이제 우리는 고난당할 필요가 없다고까지 주장합니다. 이런 신앙에 반복해서 노출되면 종교적 이기주의에 떨어지고 맙니다. 세상이 어떻게 되든지 자기만 구원받으면 된다는 식입니다. 그런 방식으로라도 영혼의 안식을 누리고 삶을 성숙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다행이겠으나 실제로는 늘 조바심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죄로부터 해방되었다는 말씀을 오해한 데서 벌어지는 당연한 귀결입니다.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죄로부터 해방되었다는 말은 우리의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잘못이 마술적으로 용서받았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을 파괴하는 세력으로부터 우리가 자유로워졌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잘못에 대한 책임은 자기 스스로 져야합니다. 그 책임을 예수의 피로 면하려고 해서는 곤란합니다. 영화 <밀양>이 그걸 주제로 합니다. 우리교회 예배 순서에 나오는 사죄선포도 마술적인 사죄를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거짓말 습관을 해결하려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다는 게 말이 되나요? 이런 말은 자기들 심리적인 위로를 받으려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희화화하는 겁니다. 죄로부터의 해방은 죄의 세력으로 해방을 가리킵니다.
이게 실제로 무슨 뜻인지를 알려면 죄의 세력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죄의 세력은 생명을 파괴하는 힘입니다. 죄는 우리에게 나타나는 몇몇 잘못된 말과 행동과 생각이 아니라 훨씬 근원적인 사건입니다. 우리의 삶을 파괴하는 세력입니다. 아담과 이브를 유혹한 뱀을 보십시오. 그의 말은 그럴듯했습니다. 죄의 세력은 오히려 우리에게 솔깃한 말로 접근합니다. 구약성경은 그 세력을 우상이라고 말했습니다. 우상은 매력적으로 보입니다. 뭔가가 ‘있어’ 보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초기에 마귀에게서 받은 세 가지 시험을 아시지요?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로 빵을 만들어보라고 요구했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책무 아니냐는 논리입니다. 그럴듯하게 들립니다. 이런 마귀의 주장은 오늘도 반복해서 들립니다. 경제 지수가 조금만 낮아져도 나라가 거덜 날 것처럼 선동하는 소리를 여러 정치인들과 신문기사에서 듣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 다른 나라보다 우리나라가 더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는 예수를 시험한 마귀의 주장입니다. 표면적으로 설득력이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런 주장이 우리의 생명을 파괴합니다. 경제만능적인 사고방식에 묶여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연봉 차이를 줄이자는 정책을 노골적으로 반대하고, 자기 확신에 떨어져서 자기와 종교가 다르거나 성적 경향이 다른 이들을 혐오합니다. 무한 생산과 소비의 악순환을 통해서 생명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부추깁니다. 죄의 세력입니다.
이런 설명이 도대체 예수의 피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이냐, 하는 질문이 가능합니다. 예수의 피를 통해서 이런 죄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된다는 말은 세상과 삶을 너무 안이하게 보는 것처럼 비칠 수 있습니다. 지난 며칠 사이에 국회에서 벌어진 일들을 여러분이 보셨을 겁니다. 헌법 기관이라고 자부하는 국회에서 난장판이 벌어졌습니다. 대한민국의 정치발전을 위한 통과의례로 보기에는 민망한 일들입니다. 어느 쪽이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입장이고 어느 쪽이 당리당략적인 입장인지에 대한 판단은 여러분이 내릴 수 있을 겁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들이 보이는 사생결단 식의 행태가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현실에서도 여전히 우리는 예수의 피로 해방되었다는 말씀을 삶의 토대로 삼을 수 있을까요?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인생실패로만 여기면 곤란합니다. 하나님은 그를 죽은 자로부터 살리셨습니다. 예수를 통해서 우리는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생명을 파괴하는 죄의 힘으로부터 해방된 것입니다. 이걸 교리적으로 더 설명하지 않고 실제적으로 한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은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쳤습니다. 만약 일용할 양식만으로 생명을 충만하게 경험했다면 당연히 이 천박하고 야비하고 우상숭배적인, 그러나 매혹적인 자본주의라는 세력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예수님의 피로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켰다는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진리로 믿고 그 말씀에 따라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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