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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하나님과의 다툼

mms://61.100.186.211/pwkvod/dawp/dawp_080224.wmvmms://wm-001.cafe24.com/dbia/dawp_080224.mp3하나님과의 다툼
2008.2.24 출 17:1-7

오늘 본문인 출애굽기 17:1-7절을 함께 읽으신 여러분은 무엇을 생각했습니까? 개인에 따라서 다 다르겠지만,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모세가 바위를 치자 생수가 흘러나왔다는 말은 믿기 힘들다거나, 또는 반대로 하나님을 잘 믿기만 하면 그와 같은 기적적인 일들이 일어나는구나, 하는 생각 말입니다. 그런 생각은 성서의 핵심이 아닙니다. 성서는 전혀 다른 걸 말합니다. 성서의 그런 내용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비슷합니다. 우리는 그 손가락을 통해서 달을 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려는 중심이 무엇일까요?

르비딤에서
우선 본문의 내용을 성서가 묘사하고 있는 그대로 따라가 봅시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미디안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1절 말씀에 따르면 그들은 씬 광야를 떠나 야훼의 지시대로 진지를 옮겨가면서 앞으로 나갔습니다. 르비딤에 이르러 거처를 마련했는데, 그곳에 물이 없었습니다. 물이 없는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제가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유목민처럼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중입니다. 가나안이 목표이긴 하지만 그곳에 들어갈 날도 요원합니다. 한 두 달 만에 들어갈 수 있으리라는 처음의 계획이 차질을 빚어서, 이제는 그냥 광야에서 살아있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살던 이집트의 고센 땅은 이런 광야와는 전혀 다릅니다. 나무와 풀이 많았고, 물도 흘러 넘쳐서 가축을 기르기가 아주 좋았습니다. 물론 이집트에서 소수민족이 당해야 할 억울한 일들은 많았지만 그래도 생존에 필요한 것은 크게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미국에서 자신이 노력하기만 하면 어느 정도 머고 사는 문제는 해결된 한인 교포들이 처한 형편과 비슷하다고 보면 됩니다. 그런데 광야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매 순간마다 생존의 위기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바로 앞장인 16장에는 그 유명한 만나와 메추라기 사건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씬 광야에 이르렀을 때 먹을거리가 떨어졌습니다. 아마 이집트를 떠날 때 준비한 것들이 바닥이 난 것 같습니다. 광야에 사는 다른 부족이나 광야를 횡단하는 대상들에게 먹을 걸 얻거나 구입했지만, 그것으로 수십만 명의 먹을거리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모세와 아론에게 원망을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이집트의 고기 가마 곁에서 빵을 배불리 먹던 시절이 그립다고 했습니다. 왜 광야로 끌고 나와 굶어죽게 만드느냐고 투덜거렸습니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하나님이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자리를 옮겨 르비딤에 이르렀는데, 물이 없었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들은 모세에게 먹을 물을 내라고 들이대었다고 합니다. 모세는 왜 자기 탓을 하느냐고, 왜 야훼 하나님을 시험하느냐고 대답했지만 당장 목이 말라 견디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달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다시 이집트 이야기를 하면서 이렇게 따졌습니다.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려 내왔느냐? 자식들과 가축들과 함께 목말라 죽게 할 작정이냐?”(3절)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은 일리가 있습니다. 가나안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야훼 하나님의 명령이 아무리 추상같다 하더라도 지금 당장 마실 물이 없는데 무얼 어쩌겠습니까? 요즘처럼 물이 흔한 세상에서도 여러분의 집에 있는 수도꼭지에서 일주일만 물이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당장 장관과 총리를 갈아치우라는 데모를 벌일지 모릅니다. 지금 본문의 상황은 지금부터 최소한 3천4백 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은 간혹 동물의 세계 같은 다큐멘트에서 가뭄이 든 아프리카 땅을 보셨을 겁니다. 강과 호수가 모두 말라버리면 동물들도 그 땅을 버립니다. 물이 없으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르비딤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향해 던진 원망은 엄살이 결코 아닙니다.  
모세는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대꾸하지 못하고 야훼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이 백성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당장 저를 돌로 쳐 죽일 것만 같습니다.”(4절) 모세는 지금 진퇴양난에 빠진 셈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목동으로 살았기에 미디안 지역을 손금 들여다보듯이 잘 알았습니다. 어디를 가야 오아시스가 있는지, 어느 때 쯤 광야의 풀들이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는지, 가나안 까지 도달하는 지름길이 어디인지 훤하게 뚫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감을 갖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광야로 나온 것입니다. 막상 광야로 나오고 보니 일이 뜻대로 되는 게 아니었습니다. 마라에서는 이미 썩은 물을 만났습니다.(출 15:22-27) 옛날에 알고 있던 샘터도 말라버렸거나 어떤 우물은 다른 종족들이 다 마셔버렸습니다. 지금 모세를 따라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기 왕성한 청년만이 아닙니다. 부녀자와 어린아이들, 노인들도 많습니다. 체력이 약한 이들은 이런 최악의 상황을 버텨낼 수 없습니다. 아마 먹지 못하고 목말라 죽어가는 사람들도 많았을 겁니다. 민심은 흉흉해집니다. 여차하면 모세를 돌로 칠 기세입니다. 그렇다고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다시 이집트로 돌아갈 형편도 아닙니다.
곤란한 지경에 빠진 모세에게 야훼 하나님은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모세는 그 말씀대로 따랐습니다. 장로들을 데리고 백성들보다 앞서 호렙의 바위 앞으로 갔습니다. 야훼 하나님이 바위 옆에 나타나셨습니다. 그 순간에 모세는 나일 강을 치던 지팡이로 바위를 내리쳤습니다. 그러자 물이 터졌습니다. 백성들은 그 물로 생명을 건지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그때 받았던 감격이 얼마나 강렬했을는지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겁니다. 그들은 이 경험을 후손들에게 반복해서 전했습니다. 그런 전승이 결국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되었습니다.
똑같은 이야기를 다루는 민수기(16장)는 출애굽기와 결론 부분에서 약간 다릅니다. 민수기에서 모세는 지팡이로 바위를 두 번이나 내리쳤습니다. 모세가 화가 났기 때문이겠지요. 야훼 하나님은 그것을 보시고 모세와 아론을 책망하셨습니다. 그 일로 인해서 모세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출애굽기는 모세의 이런 감정적인 행동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대신 이스라엘 백성의 문제점만 지적합니다. 7절 말씀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이 야훼 하나님께 대들었다고 해서 그곳 이름을 므리바라고 했으며, 야훼 하나님을 시험했다고 해서 마싸라고도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약간 형식은 다르지만 양쪽 모두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잘못된 태도를 지적합니다. 출애굽기에서 설명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과 불평이 왜 하나님과의 다툼이라는 것일까요? 그들 앞에 물이 없다는 사실은 당장 사느냐, 죽느냐 할 정도의 위기이며, 그런 위기에서 불평하지 않을 사람들이 하나도 없는데 말입니다. 그들이 정말 그렇게 욕먹을 행동을 한 것일까요?
우리는 이런 말씀들을 들을 때마다 쉽게 판단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그 말은 틀린 건 아닙니다만 그들이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그들을 무조건 매도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조금 더 진지하게 질문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므리바에서 물이 없는 걸 발견하고 모세를 원망했다는 사실이 왜 문제인가요? 그들이 원망했기 때문에 결국 마실 물을 얻게 된 게 아닐까요? 그것이 왜 믿음이 없는 행동일까요? 그것이 왜 하나님과 다투는 것일까요?

생수의 근원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없어서 힘들어 했다는 것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당연한 것입니다. 이런 어려운 현실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불평을 하실 때가 있을 것이며,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원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처형당하시면서 왜 자기를 버리시는가, 하고 외쳤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호소, 원망, 불평은 그것 자체로만은 그렇게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자체를 부정했습니다. 이집트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있었는데 왜 끌고 나와서 이 생고생 시키느냐고 했습니다. 그들은 이번만이 아닙니다. 광야에서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이집트 타령이었습니다. 광야보다 이집트의 생활이 좋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광아에서 이렇게 구차하게 살아갈 바에야 차라리 이집트에서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나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자신들의 존재론적 토대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런 부정은 곧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광야보다는 이집트에서도 하나님을 잘 믿으면 되지 않느냐, 하는 반론이 가능합니다. 그런 반론은 일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온 세계를 창조하신 분이시며, 온 세계에 편만하게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광야와 가나안만이 아니라 이집트에도 계십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물이 없는 르비딤이 아니라 물이 풍부한 이집트에서 하나님을 잘 섬기겠다는 주장이 진실한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하나님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풍부한 먹을거리와 물, 따뜻한 잠자리에만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그것을 보장해주는 분으로만 받아들여질 뿐입니다. 지금 광야에서는 아무 것도 보장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결국 이집트의 신이 자신들이 섬겨야 할 신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그것이 정답입니다. 그들은 지금 야훼 하나님이 아니라 이집트의 신을 섬기고 싶어 합니다. 왜냐하면 이집트의 신이야말로 자신들의 삶을 보장해주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집트의 삶에서 그걸 경험했습니다. 야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 신을 그리워하는 이것이 바로 야훼 하나님과의 다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도우심으로 광야를 지나 가나안에 들어간 다음에도 계속해서 야훼 하나님과 다투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민족의 문명에 흠뻑 사로잡혔습니다. 광야에서 별 볼일 없이 살았던 그들에게 가나안의 삶은 눈이 부실 지경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문명의 꽃을 피우게 한 가나안의 신이 야훼 하나님보다 더 우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는 농경신입니다. 풍요의 신입니다. 실제로 가나안 문화는 삶의 풍요와 즐거움을 보장해주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치 바람난 사람처럼 쉴 새 없이 다른 신에게 눈을 돌렸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늘 야훼 하나님과 다투었으며, 늘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투정을 들으신 하나님은 호렙 바위에서 샘물이 나오게 했습니다. 그들은 그 물로 목말라 죽을 위기를 겨우 넘겼습니다. 이건 분명히 야훼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그래서 모든 게 잘 된 걸까요? 그런 장소를 출애굽기 기자가 하나님과 다투었다는 뜻의 므리바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를 생각해보십시오. 인간은 하나님과 다툴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다투었습니다. 하나님을 거부했습니다. 이 므리바는 자랑스러운 장소가 아니라 부끄러운 장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당시에 반석에서 물이 나오는 걸 보고 쾌재를 불렀을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기적을 행하셨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부끄러운 사건입니다. 그들의 위선이 드러난 사건입니다. 그들이 겉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지만 속으로는 늘 이집트 신을 향한 갈망이 끊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사건입니다.
오늘 기독교인들도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비슷한 일들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두 차원에서 그렇습니다. 첫째, 우리는 어려운 일을 만나기만 하면 순식간에 신앙 이전의 상태를 그리워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는 형식적으로만 기독교인이지 실제로는 세상에 속해 있을 경우가 많습니다. 평상시에는 기독교인의 모양을 유지하지만, 문제는 비상시입니다. 평생 신앙생활을 잘 하던 박 권사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이분의 딸에게 애인이 생겼습니다. 박 권사는 절대적으로 반대했습니다. 그러자 딸은 가출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다급해진 권사는 점쟁이를 찾아갔다고 합니다. 많은 이들이 삶의 문제를 신앙적으로 받아들이는 걸 모릅니다. 자녀 교육 문제라든지 재산 문제에서 신앙이 아니라 세상의 법칙을 따를 때가 많습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평소에 우리가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둘째, 어떤 이들은 자기에게 일어난 기적적인 사건을 하나님이 자기에게 베풀어준 사랑의 증거라고 자랑합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바위에서 물이 터진 것은 놀라운 사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 그들의 신앙이 옳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삶에 이렇게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 걸 무시하라고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그런 기적은 본질적으로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것은 일어날 수도 있고,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정작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겠지요. 하나님의 아주 구체적인 사랑을 원한다고 말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할 그런 놀라운 축복과 기적이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쏠린 사람은 이집트를 그리워한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를 게 없습니다. 평소에는 기독교인의 모양을 유지하겠지만, 위기에 상황에서는 순식간에 안면몰수 하고 하나님을 멀리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과 다투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정한 기적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보다 더 큰 기적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사실보다 더 큰 기적은 없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하리라는 약속보다 더 큰 기적은 없습니다. 바위가 터지어 생수가 흘러나오는 기적을 원하시나요? 예수님은 여러분에게 영원한 생수의 근원이십니다.(요 4:14) 이미 여기에 생수가 있는데 무슨 다른 생수를 찾으시렵니까?

출애굽기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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