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6.8. (롬 5:1-11)
오늘 본문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 삶과 별로 상관이 없다는 느낌이 드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물론 여기에 등장하는 단어들은 우리에게 아주 익숙합니다. 하나님, 은총, 영광, 기쁨, 인내, 희망, 사랑 등등, 모든 단어들과 그 단어로 구성된 문장들은 이해 못할 게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단어들이 우리에게 생생하게 다가오지 않는 이유는 오늘 우리의 삶이 이런 신앙적 단어들과 전혀 다르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자기를 지켜내지 않으면 언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를 것 같은 불안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직장생활도 그렇고, 학생들의 학교생활도 역시 그렇습니다. 교회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대형마트로 인해서 소형 마켓이 문을 닫듯이 대형교회로 인해서 소형 교회도 계속해서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복음이라는 상품을 팔기 위해서 서로 피 말리는 경쟁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 전체가 적자생존이라는 정글의 법칙 안으로, 마치 수렁에 빠져들 듯이 빠져들고 있는 마당에 2천 년 전 바울에 의해 기록된 로마서를 읽는다는 건 무의미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시대가 어수선할수록 우리는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현실을 부정하거나 간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현실의 중심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라도 그래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현실의 중심으로 들어간다는 말을 잘 생각해보십시오. 성서는 현실에 대한 정확한 통찰에서 나왔습니다. 예컨대 성서가 사탄을 말한다는 건 곧 인간의 죄에 훨씬 근원적인 힘이 작용한다는 의미입니다. 성서가 하나님, 그의 말씀, 그의 계시, 그의 통치를 말하는 이유는 그 방식이 아니면 인간과 세계를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은 바로 우리가 경험하는 이 현실의 가장 궁극적인 근거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신비한 삶과 역사를 해명할 수 있는 가장 궁극적인 근거입니다.
왜 하나님과의 평화인가?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반복해서 강조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그것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이렇게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졌으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과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는 곧 하나님과의 평화를 말합니다. 2절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으로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9절에서도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얻었다고 했으며, 10절에서도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결론 부분인 11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게다가 우리를 하느님과 화해하게 해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덕분으로 우리는 지금 하느님을 섬기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런 대목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라든지 하나님의 원수 같은 단어도 역시 역으로 하나님과의 평화가 우리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과의 평화, 또는 하나님과의 화해는 바울의 독창적인 생각은 아닙니다. 구약성서도 기본적으로 이 개념이 핵심이고, 모든 신약성서도 역시 그렇습니다. 성서기자들이 하나님과의 평화를 말하는 이유는 오늘 우리의 이 현실에 평화가 없다는 사실을 명명백백하게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 평화가 얼마나 심각하게 파괴되었는지는 제가 일일이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개인으로부터 시작해서 국가와 인류 전체가 평화를 살고 있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삶이 얼마나 평화로부터 떨어져 있는지를 보십시오. 개인에 따라서 차이가 있겠지만 하루에서 수십 번이나 마음이 요동치고, 불안해하고, 때로는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합니다. 현대인들의 많은 병이 신경성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결국 우리의 내적 평화가 훼손되었다는 증거입니다.
평화가 손상된 삶 앞에서 사람들은 두 가지로 대응하면서 살아갑니다. 하나는 그것을 전혀 문제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의 평화가 없고, 주변과의 관계를 평화 지향적으로 살아내지 못하면서도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런 걸 당연하다고 생각하거나, 오히려 그걸 자극하는 일도 많습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마치 싸우고 있는 동네 꼬마들을 더 싸우게 부추기는 형국입니다.
다른 하나는 나름으로 평화를 회복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인격을 고양하거나, 심리치료를 받습니다. 그리고 주변의 생활형편을 좋게 바꾸려고 합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성실하게 추구해야 할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우리가 평화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여러분의 인격이 고상해지면 평화를 얻을 수 있을까요? 예술을 사랑하고, 취미생활을 하며, 정신과 상담을 받으면 우리의 삶이 실제로 평화를 얻을 수 있을까요? 조금 나아지긴 하겠지만, 겉모양만 바뀔 뿐이지 중심은 그대로일 겁니다. 이런 건 지난 인류의 역사가 증명합니다. 지식과 정보가 늘어나고 복지가 향상되고 정치 환경이 좋아졌지만 오늘 현대인들의 삶은 여전히 불안합니다. 평화와는 거리가 멀다는 게 분명합니다.
성서는 평화를 전혀 다른 차원에서 생각합니다. 평화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경험하는 생명의 세계입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를 포함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바로 그분과의 평화가 없이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도 평화를 얻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이룬 사람은 참된 평화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그것이 곧 구원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났다는 바울의 진술(9절)이 바로 이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과 불화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생명 파괴를 가리킵니다. 이런 생명의 파괴에서 벗어났다는 말은 구원받았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무엇이 하나님과의 평화를 통한 생명의 깊이이며, 무엇이 불화에 의한 생명의 파괴인지를 구별할 줄 모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했으면서도 성서가 말하는 생명이 무엇인지 잘 모르기도 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냥 주어진 대로, 단순한 자기 경험에만 묶여서 삽니다. 이는 마치 시(詩)가 무엇인지 잘 모르면서 남에게 교양이 있다는 말을 들으려고 시를 읽는 사람과 비슷합니다. 예를 들어서 여기 죄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이 있다고 합시다. 성서가 말하는 죄와 죄의 용서는 생명과 관계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성서는 이미 우리의 생명을 파괴하는 죄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극복되었다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죄가 용서되었고, 그래서 생명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곧 기독교 신앙의 근본입니다. 그런 신앙의 깊이에서 일어나는 영적인 사건이 바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즉 하나님과의 평화입니다.
부름 받음의 은총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릴 수 있을까요? 성서는 이미 그 길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는 인정을 받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들어간다는 의미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드린다면,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죄 많은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에 처형을 당하셨습니다. 그가 십자가에서 쏟은 피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죄를 용서받고 의롭다고 인정받았습니다. 예수님에게 일어난 바로 이 사건이 바로 하나님과의 평화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이런 신앙을 언어도단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들의 몰이해는 이상할 게 하나도 없습니다. 이미 2천 년 전에도 예수의 십자가는 그런 취급을 당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그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은 유다인들에게는 비위에 거슬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 일입니다.”(고전 1:23) 이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유다인이나 그리스인이나 할 것 없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그가 곧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힘이며 하느님의 지혜입니다.”(24절) 교회 밖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과의 평화에 이르는 길이라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만 감추어진 비밀입니다.
여기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부르심을 받은 사람의 눈에만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이 눈에 들어옵니다. 예수님의 비유에도 있듯이 보물이 묻힌 땅을 발견한 사람은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재산을 팔아서 그것을 삽니다. 아마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의 눈에는 이 사람의 행동이 이상하게 보이겠지요. 이것은 분명히 은총입니다. 우리는 은총을 입어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군지를 알게 되었고,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건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자격증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학력이 높아야 한다거나 외모가 준수하거나 교양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뿐이고, 우리가 거기에 응답한 것뿐입니다. 내가 왜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서 예수를 알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라면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은총을 힘입어서 하나님과의 평화를 얻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요? 그것을 정확하게 알 수 있는 분은 오직 성령이시겠지요. 그것은 그야말로 영적인 세계이기 때문에 자로 눈금을 재듯이 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평화가 우리의 삶에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바울의 설명에 따르면 고통을 자랑하는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공동번역은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뻐합니다.”(5:3a)라고 번역했는데, 직역을 하면 고통을 자랑한다는 뜻입니다. 고통은 일반적으로 사람을 지치게 만들기 마렵니다. 그런데 그것을 자랑한다니요, 바울은 도대체 제 정신인가요?
바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낳고 그러한 끈기는 희망을 낳는다.”(3,4절) 여기서 그가 말하려는 것은 결국 고통이 희망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입니다. 조금 역설적으로 들리는 표현인데, 정확한 진단입니다. 이 세상에서 고통을 겪는 사람은 결국 저 세상을 향한 희망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이 2b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자랑한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자랑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고통도 자랑합니다. 바울에게는 이 세상의 삶이 어떻든지 그것을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부러 고통을 당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으로 살다보면 어쩔 수 없이 당하게 되는 고통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 고통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희망을 더 강렬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앙의 경지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는 삶입니다.
‘팍스 로마나’
제가 여러분에게 이렇게 설교를 하지만, 실제로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또는 그것을 추상적으로만 받아들이기도 쉽습니다. 우리 신앙의 현실에서 볼 때 이런 평화를 실질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겁니다. 여러분 자신도 이런 점에서는 좌절감을 느낄 때가 많을 겁니다. 개인적으로 아무리 신앙생활을 진실하게 하더라도 하나님의 평화를 거부하는 악한 힘이 우리를 한편으로는 유혹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억압한다는 게 그 이유입니다.
그 악한 힘이 초기 기독교 시절에는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였습니다. 기독교의 입장에서 볼 때 로마는 야누스처럼 양면의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로마는 식민 지배를 하고 있던 그 지역의 치안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기독교 선교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만약 그런 질서가 전혀 없었다면 기독교의 복음은 주변의 공격을 견뎌내기 힘들었을 겁니다. 다른 한편으로 로마는 기독교를 자신들의 제국에 위험스런 집단으로 몰아서 사정없이 파괴했습니다. 로마의 몇몇 황제에 의한 기독교의 순교 역사는 이미 잘 알려져 있습니다. 네로 황제는 로마의 대형 화재를 기독교인의 책임을 돌리기도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도미티안, 트라얀, 하드리안, 안토니우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등이 기독교를 박해했습니다. 그 기간이 기원후 50-300년에 이릅니다.
로마제국을 한 두 마디로 정의하기는 힘듭니다. 그들은 기독교가 시작되는 시기만이 아니라 유럽의 중세기까지 그 명성을 떨쳤습니다. 지금의 유럽 모든 문명은 로마에 기원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건축, 예술, 법, 문학, 그리고 종교에 이르기까지 찬란한 문명의 꽃을 피웠습니다. 이 모든 문명의 정신은 곧 로마의 평화(팍스 로마나)입니다. 로마의 평화가 지고지선의 이념으로 작동되는 나라입니다. 요즘도 많은 강대국들도 이런 로마의 평화 이념을 신봉하고 있습니다.
요즘 대한민국은 미국 쇠고기 파동으로 인해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국민의 80%가 이명박 정권과 부시 정권이 맺은 쇠고기 수출입 협정을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문제를 정치적 차원이 아니라 신학적인 차원으로 한 마디만 하겠습니다. 이명박 정권은 하나님과의 평화가 아니라 오히려 미국과의 평화를 지상목표로 삼는 것 같습니다. 그는 크게 착각하고 있습니다. ‘팍스 아메리카나’(미국의 평화)는 ‘팍스 크리스티’(그리스도의 평화), 즉 ‘팍스 데이’(하나님의 평화)와 대립적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 결과가 곧 오늘과 같은 졸속 협정과 미숙하고 독단적인 후속 조치로 인한 국가의 총체적 혼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게 된 우리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힘의 논리를 거부하는 삶이 그 대답입니다. 돈과 자본만을 진리로 내세우는 이 제국주의적 시대정신과 투쟁하는 것입니다. 로마의 총독 빌라도에게 십자가 처형 선고를 받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팍스 크리스티만을 지향함으로써 팍스 로마나를 극복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바로 전체 역사의 승리자이심을 믿습니다. 용기를 잃지 말고, 하나님과의 평화에 매진하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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