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의 평화가 답이다
롬 5:1-11, 사순절 셋째 주일, 2017년 3월19일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11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요즘 저는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읽고 있습니다. 전체 15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4권의 부제는 ‘그리스도의 승리’입니다. 기원후 4세기 기독교가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서 로마의 국교가 되는 과정이 서술되어있습니다. 6권의 부제는 ‘팍스 로마나’입니다. 그 뜻은 ‘로마의 평화’입니다. 기원전 44년 3월15일 카이사르가 암살된 뒤에 후계자로 지명된 옥타비아누스는 정적 안토니우스를 제거하고 원로원에 의해서 아우구스투스로 추대 받은 뒤 로마를 명실상부한 황제 국가로 만들어 200년 동안 평화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그 시기를 가리켜 ‘팍스 로마나’라고 부릅니다. 이 용어는 로마의 평화로웠던 2백년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로마 제국의 통치 이데올로기를 가리킵니다. 이 시대가 기독교에서 중요한 이유는 기독교 형성 시기와 겹치기 때문입니다.
팍스 로마나
팍스 로마나는 정치 경제 군사적인 안정을 목표로 합니다. 당시 로마는 전무후무할 정도의 평화로운 시절을 보냈다고 합니다. 이민족의 침입도 없었고, 내치도 안정적이었고, 도시가 정비되고, 물자 교류도 활발했습니다. 로마 제국의 입장에서는 이런 시대가 황금기였을지 모르지만, 다른 소수 민족에게는 절망적인 시대였습니다. 예를 들어 유대인들이 대표적입니다. 그들은 몇몇 사건에 연루되어 로마와 전쟁을 벌였습니다. 기원후 70년에 티투스 장군에 의해서 예루살렘은 함락되었습니다. 도시 전체가 초토화되었습니다. 유대인 로마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당시 110만여 명이 죽었다고 합니다. 예루살렘 성전도 무너졌습니다. 그 이후 2천년 동안 유대민족은 나라 없이 세계 곳곳에 흩어진 디아스포라 신세로 지냈습니다. 팍스 로마나는 유대인들에게 끔찍한 시대였습니다.
또 하나의 끔찍한 사건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예배를 드릴 때마다 그것을 확인합니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입니다. 사도신경에는 예수님 외에 두 사람의 이름이 나옵니다. 한 사람은 마리아이고, 다른 한 사람은 빌라도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를 낳은 유대인 여자이고, 빌라도는 예수를 죽인 로마인 남자입니다. 빌라도는 당시 유대 지역을 관할하는 로마 총독이었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이 빌라도를 가능한 우호적으로 묘사하고 있긴 하지만 그가 예수에게 십자가 처형 선고를 내렸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당시 빌라도 재판의 마지막 장면을 요즘 식으로 묘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주문, 피고인 나사렛 사람 예수에게 십자가형을 선고한다.’ 빌라도의 이 판결은 단순히 자연인 빌라도의 책임에 한정되는 게 아닙니다. 로메 제국의 이데올로기인 팍스 로마나의 문제입니다. 기독교는 기원후 388년 로마 국교가 된 이후로도 계속해서 사도신경을 통해서 빌라도 문제를 짚었습니다. 기독교는 폭력적으로 팍스 로마나를 실현했던 이들과 대결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은 팍스 로마나가 작동되던 시대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것과 질적으로 다른 평화를 말합니다. 팍스 로마나가 아니라 ‘팍스 크리스티’, 즉 그리스도의 평화입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오늘의 제 2독서인 롬 5:1절을 공동번역으로 읽겠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졌으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과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로마서는 로마에 사는 기독교인들에게 보내는 바울의 편지입니다. 로마 기독교인들은 로마 문명에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로마법과 팍스 로마나와 콜로세움 원형경기장과 판테온 신전과 로마 사람들이 즐겨 읽는 소설과 연극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로마는 당시 가장 부유하고 교양이 넘치는 사람들이 살던 도시였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로마 제국의 중심 도시였습니다. 기독교는 당시에 신흥종교였습니다. 로마법에 의해서 십자가 처형을 당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로 믿는 기독교가 로마 교양인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기는 힘들었을 겁니다. 그들이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는 바울의 이 말을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로마 사람들만이 아니라 21세기의 현대인들에게도 ‘하나님과의 평화’는 낯설게 들립니다. 오늘의 문명이 여전히 팍스 로마나에 기울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우리나라는 대통령 선거에 돌입했습니다. 후보자들은 각각 백가쟁명 식으로 자신이 대한민국을 구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진정성이 있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의 주장들은 로마 정치가들이 이미 짚었던 것들입니다. 새로울 게 없습니다. 공화제와 제정(帝政)의 논란이 당시에도 반복되었습니다. 지금 대다수 나라는 공화제를 선택하지만, 그 공화제에서도 대통령제와 의원내각제, 또는 이원집정제의 논란은 여전합니다. 경제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파이를 키우는 게 먼저냐, 아니면 분배가 먼저냐, 또는 두 가지를 함께 끌어가느냐, 하는 논란이 분분합니다. 일자리를 어떻게 늘릴 것인지, 경제민주화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에 대한 의견도 서로 다릅니다. 북한과의 관계에서도 서로 대립적인 정책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각각 나름으로 대한민국을 잘사는 나라로 만들려는 노력들입니다. 그걸 크게 보면 팍스 로마나 체제이자 이념입니다. 이런 노력이 필요하고, 거기서 옳고 그름을 끊임없이 판단해야겠지만 이것으로 참된 평화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모든 사람들을 똑같은 무게로 만족시킬 수 있는 제도는 세상에 없습니다. 로마의 평화는 로마인들에게만 평화이지 다른 민족에게는 불화입니다. 기업가와 노동자를 똑같이 만족시킬 수 있는 경제 제도는 없습니다. 상대적으로 좀더 정의로울 뿐입니다. 둘째, 인간에게는 팍스 로마나의 방식으로 해결되지 않는 심연의 불안과 분열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게 사실은 더 핵심적인 문제입니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가 마련한 로마의 복지가 완전히 실현되었다 해서 로마 시민들이 행복한 건 아닙니다. 콜로세움 원형경기장에서 검투사들이 목숨 걸고 싸우는 걸 즐긴다고 해서 그들의 영혼에 평화가 보장된 것은 아닙니다. 다른 이들에 비해서 좀더 넉넉하게 살고 인격적이고 교양이 있다고 해서 그 심층의 불안이, 또는 심층의 공허가 사라지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 방식으로 그것을 잠시 잊을 뿐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떻습니까?
인간이 숙명처럼 안고 있는 심층적인 불안과 공허의 뿌리는 자기 정체성의 모호성에 자리합니다. 자기가 누군지가 손에 잡히지 않는 느낌이 그림자처럼 우리를 따라다닙니다. 외면적으로는 각자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긴 합니다. 가족 관계, 교회 관계, 직장 등등에서 자기를 확인합니다. 그런 관계는 다 일시적인 것들입니다. 가장 가까운 부부만 해도 그렇습니다. 함께 살고 있을 때는 각각 아내와 남편이지만 사별하거나 이혼하면 거기서 더 이상 정체성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인간이라는 정체성 자체가 그렇게 분명한 게 아닙니다. 천억 개의 별로 이루어진 은하계가 우주에는 또 천억 개 이상이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인 태양에 세 번째 행성으로 매달려 있는 지구에서 우리는 살고 있을 뿐입니다. 우주에는 인간과 다른 방식의 지적 활동이 가능한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런 걸 생각하다보면 인간의 정체성이 모호해집니다. 더 근본적으로 우리가 곧 사멸한다는 사실 앞에서 인간의 정체성은 더 불확실해집니다. 아무리 팍스 로마나를 실현한다 해도 참된 평화가 불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인생이라는 게 완전한 해결은 안 되니 그런 심층의 불안과 공허를 안고 가능한 마음 편하게 사는 것으로 만족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지성인들 중에서 많습니다. 예, 그렇게 살고 싶은 분들은 그렇게 살면 됩니다. 그러나 전혀 다른 인생이 있다는 걸 모른 채 그렇게 사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동굴 밖의 세계를 모른 채 동굴 안의 칙칙한 삶으로 만족하는 건 어리석은 것이 아닐는지요. 정확하게 말하면 그건 위선이고 자기 합리화입니다. 실제로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다른 길을 몰라서 체념하고 있다는 게 정확한 겁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는 바울의 발언은 그 심연의 분열과 공허가 해결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걸 교리적인 말로 바꾸면 죄의 용서입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분열입니다. 하나님은 생명 자체이니 죄는 생명과의 분열이자 생명과의 단절입니다. 죄로 인해서 우리는 심층의 분열과 공허를 극복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제 바울은 모든 인류가 꿈꾸는 팍스 로마나로도 해결이 되지 않은 죄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뜻으로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고 선포한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귀하고 시급한 소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팍스 크리스티
하나님과의 평화를 어떻게 누릴 수 있을까요?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이것도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대답입니다. 알고 있지만 그걸 삶의 능력으로 경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에게 질문해보십시오.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여러분은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고 있으신가요?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기쁨으로 살아가시는지요? 그게 잘 되지 않으니까 억지로라도 그렇게 해보려고 노력합니다. 두 가지 방법으로 노력합니다. 하나는 심리적으로 자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경건생활에 집착하는 겁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크고 작은 불만, 긴장, 두려움, 분노가 용암처럼 들끓지만 겉으로는 세련된 교양인이나 기독교인 행세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데에 머문 채 인생을 끝내고 싶은 분들은 없을 겁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을 보십시오. 세 단어가 하나로 묶였습니다. 주(主)라는 헬라어 퀴리오스는 로마 카이사르에게 붙이는 단어로서 생사여탈권을 가진 주인이라는 뜻이고, 예수는 자연인으로서의 예수를 가리키고, 그리스도는 메시야라는 뜻의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단어입니다. 이 세 단어를 문장으로 만들면 ‘예수는 주이며 그리스도다’입니다. 더 줄이면 예수는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예수가 구원자라는 말은 예수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게 한 장본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롬 5:11, 12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과의 화해는 하나님과의 평화와 똑같은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분열이 극복되어 생명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신약성경은 모두 이 한 가지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게 조금씩 다르게 표현되었을 뿐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 하나님과의 화해, 죄 용서, 구원, 새로운 피조물 등등, 모두 예수를 구원자로 경험했다는 사실에 대한 표현입니다.
오늘 제 3독서인 요 4:5-11절에는 그 유명한 사마리아 여자와 예수와의 대화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지역을 지나다가 수가 성 근처 우물가에 이르렀습니다. 물을 길러 온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 뒤로 두 사람 사이에 대화가 이어지다가 예수님이 이 여자에게 이렇게 말하는 내용이 14절에 나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이 구절은 사마리아 여자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닙니다. 당시 기독교인 모두의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영원한 생수라고 말입니다. 사마리아 여자에게 영생의 생수를 약속하셨던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내가 목마르다’(요 19:28) 토로하셨다고 요한복음 기자가 전합니다. 역설입니다. 육체와 영혼의 심층에서 목마름이 뭔지를 알았던 예수만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수를 주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가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게 하는 구원자라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여기에 어떤 증거가 있을까요? 무조건 믿으면 될까요? 기독교는 지난 2천년동안 주변으로부터 선의든 악의든 예수가 메시아인 증거를 대라는 요구를 받았습니다. 예수가 구원자라면 예수 이후의 세상이 뭔가 달라졌어야 하는데, 아무런 변화가 없지 않느냐, 하는 반론입니다. 일리가 있는 반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후에도 여전히 이 세상에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억울한 죽음도 많습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도 우리는 예수가 구원자이며, 그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이 대목에서 여러분은 세상과 역사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역사의 흐름을 원인에 의한 결과로만 본다면 예수가 구원자라는 사실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오히려 미래가 오늘을 이끌어간다는 시각이 필요합니다. 이런 시각은 마치 강물이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흐른다는 말처럼 언어도단으로 들립니다. 하나님이 창조자이고, 우리가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이것을 생각해보십시오. 일상적인 것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지금 우리는 대구샘터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10년 전으로 돌아가 보십시오. 시간표만으로 본다면 10년 전에 어떤 일들이 일어났고, 그 결과로 지금 대구샘터교회에 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거꾸로 지금 대구샘터교회 교인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이 10년 전의 사건을 가능하게 하는 힘의 원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미래가 더 본질적이라는 뜻입니다. 씨와 꽃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꽃으로 인해서 씨는 의미를 갖게 됩니다. 종말의 시각에서 예수에게 일어난 일은 인류 구원의 토대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부활에서 바로 이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구원이 앞당겨져서 유일회적으로 발생했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믿음으로 그들은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화해가 일어났다고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놀랍고도 대담한 선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로마의 평화가 절대 이념으로 작동되던 시대의 한 복판에서 바울이 전한 ‘하나님과의 평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바울과 같은 믿음과 그런 경험이 있으신가요? 각자 다를 겁니다. 아멘으로 대답하는 분들은 그런 길을 더 가면 되고, 머뭇거리는 분들은 다시 바울의 고백과 권면에 귀를 기울이기 바랍니다. 저는 설교자로서 여러분을 위해서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다만 로마 시대와 마찬가지로 돈과 권력이 평화의 주인으로 행세하는 21세기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울의 선포를 반복해서 전해드릴 수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생명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된 사람들이니,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며 남은 인생을 살아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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