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의 화해
고후 5:16-21, 사순절 넷째 주일, 2019년 3월31일
16.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17.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18.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19.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20.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21.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화해하라!
오늘 설교 본문에는 ‘화해’라는 단어가 반복해서 나옵니다. 우리말 성경으로는 ‘화목’으로 나옵니다. 공동번역은 ‘화해’로 표현하고 영어 성경은 reconciliation으로, 루터 성경은 Versöhnung으로 표현합니다. 영어나 독일어 표현은 모두 화목보다는 화해라는 뜻이 강합니다. 화목은 단순히 서로 뜻이 맞고 정답게 지내는 걸 가리키지만 화해는 불화했던 상황이 해결되는 걸 가리킵니다. 본문 2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제가 여러 번역본을 통합해서 정리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의 대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다음의 사실을 강력하게 말씀하셨기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여러분에게 호소합니다. 하나님과 화해하십시오!
하나님과 화해하라는 간곡한 호소가 현대인들에게는 와 닿지 않을 겁니다. 현대인들은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생각할 시간도 없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이 세상의 원리에 따라서 성취하는 데만 마음을 둡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도 하나님과의 관계보다는 하나님을 통해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데에만 신경을 씁니다. 개인에 따라서, 또는 사회에 따라서 그 현상이 심하게 나타기도 하고 약하게 나타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유달리 강하게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서 부동산 재테크가 그 중의 하나입니다. 좁은 집에서 살다가 넓은 집으로 옮기려는 마음은 이상한 게 아닙니다. 문제는 노골적으로 투기를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진행된 장관후보자 국회 청문회에서 그런 일들이 많이 드러났습니다. 집값을 안정시켜야 할 국토부장관 후보자가 집을 서너 채나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 외의 장관 후보자들도 비슷했습니다. 저는 그분들을 인격적으로 비난하는 게 아닙니다. 권력과 재력을 통해서 자신의 인생을 확대시키려는 이 시대정신이 대한민국을 총체적으로 부실하게 만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들만이 아니라 국민 일반이 대부분 그런 마인드로 살아가는 게 아닐는지요. 이런 분들에게는 하나님과의 화해라는 말이 공허하게 들릴 겁니다. 그런 말은 배부른 사람이나 하는 것이라고, 일종의 공자 왈(曰)쯤으로 듣겠지요.
바울의 호소인 하나님과의 화해는 인간의 삶이 생명의 근원과 불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생명의 근원은 영혼의 자리에 속합니다. 그 영혼의 자리는 세상의 것으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원하는 것을 성취한다고 해도 영혼은 만족하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끊임없이 비교하고 경쟁하고, 종종 다른 사람을 탓하게도 됩니다. 모든 게 못마땅합니다. 불안해집니다. 인간관계가 허물어집니다. 여기 교장과 교사가 있다고 합시다. 교장의 눈에 교사는 게으르고 무책임해보입니다. 교사의 눈에 교장은 너무 권위적이고 학생들을 이용하려고 합니다. 여기 카페 사장과 종업원이 있다고 합시다. 사장의 눈에 종업원은 성실하게 않고 손님에게 친절하지도 않습니다. 종업원에 눈에 사장은 인색하고 종업원을 종 다루듯이 갑질을 합니다. 어느 집단이나 이런 일은 일어납니다. 교회의 담임 목사와 부목사 관계도 비슷할 겁니다. 개인의 차이는 있습니다. 좀더 객관적으로 상황을 분석하고 교양 있게 말을 하고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의 심층에서는 그게 잘 안 됩니다. 영혼의 깊이에서 사람을 대하고 만족해하는 사람은 도사 수준에 도달한 사람일 겁니다. 우리 일상에서 영혼의 만족이 불가능한 이유는 생명의 근원이 훼손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걸 가리켜 성경은 하나님과의 불화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더 심각한 문제는 생명과의 불화가 우리의 노력으로 해결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인류는 교육에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똑바로 살지 못하는 이유는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서양의 근대주의가 인간 계몽을 구원의 방법으로 제시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아는 게 힘이라는 말은 지식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지나치게 많은 교육을 받았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도 지식과잉, 교육과잉의 시대를 삽니다. 특히 대한민국의 교육은 세계 탑입니다. 쉽게 생각해보십시오. 지식인과 무식한 사람과의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나요? 물론 차이가 있겠으나 그건 교양의 차이입니다. 영혼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지식인은 자기체면을 살피면서 자기 욕망대로 살고, 지식인이 아닌 사람은 노골적으로, 또는 거친 방식으로 자기 욕망에 기울어집니다. 저도 지식인에 속하지만 그것으로 제가 구원받았다고 말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도 지식인은 뭔가 달라도 다르다거나, 잘못 배우지 않고 똑바로 배우면 사람이 달라진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교육과 지식을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에서도 신학공부가 필수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지식은 생명 사건에서, 즉 구원 문제에서 무능력하다고 생각합니다. 교양이 우리를 구원하지 않습니다. 지식과 교양으로 생명과의 불화가, 즉 하나님과의 대립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더 직접적으로 말하면 지식과 교양으로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적인 교만에 떨어질 위험성만 높아집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렇다면 하나님과의 화해, 즉 생명과의 화해는 어떻게 가능할까요? 어떻게 구원이 가능할까요? 어떻게 영혼의 해방이 가능할까요?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자신이 화해를 이루셨다고 사실을 반복했습니다. 18절에 하나님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와 화목하게 하셨다는 표현이 나오고, 19절에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과 화목하게 하셨다는 표현이 나오며, 21절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셨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여기만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이라는 표현은 바울의 다른 편지에 자주 나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다는 말이 설득력이 있습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우리가 생명을 얻는다는 말이, 즉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말이 실제로 옳은가요? 여러분은 이 질문에 ‘그렇다.’는 대답을 할 수 있으신가요?
저는 설교할 때마다 회중들의 삶이 편안하게 앉아 설교를 들으면서 은혜를 받을 만큼 녹록하지 않다는 사실로 인해서 조심스럽습니다. 당장 말썽 피우는 자녀들로 인해서 노심초사하거나 남편의 사업 실패로 경제적인 위기에 떨어지거나 건강이 극도로 좋지 않은 분들도 있습니다. 교회 밖으로 눈을 돌리면 어려운 형편은 더 심각합니다. 이혼이냐 아니냐 할 정도로 부부사이가 나쁜 이들, 학교에서 왕따 당하는 학생들, 잠시도 쉬기 힘든 소규모 자영업자들, 가족이 호스피스 병동에 들어간 사람들, 노숙자 등등, 인생살이가 살벌한 이들이 많습니다.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그들에게도 여전히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해하는 게 중요하다고 제가 설교할 수 있을까요? 제가 인생살이의 모순과 당혹스러움을 알지도 못하면서 공연히 그럴듯한 말만 하는 건 아닐까요? 설교자로서 불안하기는 하지만 성령을 의지해서 좌고우면하지 않고 전하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저의 개인적인 생각이 아니라 신앙의 선배인 바울의 가르침을 전하는 거라서 다행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들에게 정말 중요한 말씀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해를 이룬다는 사실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새로운 존재라는 말을 이해해야만 하나님과의 화해라는 표현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를 바울은 오늘 설교 본문 앞 대목에서 언급했습니다. 17절이 바로 그것입니다. 여러분이 외워둬야 할 정도로 중요한 구절입니다. 들어보십시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새로운 피조물, 즉 새로운 존재(new being)라는 말도 당장 우리 마음에 와 닿지 않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새로운 존재라고 하지만, 교회 다니는 사람이 교회 밖의 사람과 완전히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 스스로도 예수 믿기 전이나 후나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지 못할 겁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가 된 기쁨과 자유를 누리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많지 않으며, 그런 경험이 있다고 하더라도 한 번의 경험으로 완성되는 게 아니니 조금 시간이 지나면 자기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라는 사실이 점점 희미해집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다.’는 말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이전 것은 16절이 말하는 것처럼 사람을 ‘육신을 따라’(카타 사르카) 아는 것입니다. 사르카는 육체를 가리키는 헬라어 사르크스의 변형입니다. 세속적으로 판단한다는 뜻입니다. 세속적인 판단에 따르면 명성을 얻고 재물을 얻는 것이 성공적인 인생입니다. 그게 없으면 불행해집니다. 명성과 재물은 다 필요한 것입니다. 문제는 모든 사람이 명성과 재물을 얻을 수 없기에 서로 경쟁할 수밖에 없고, 그 과정을 통해서 개인이나 사회의 삶이 파괴된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그런 방식으로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 이제 끝났다고 봅니다. 새로운 삶의 관점이 열린 것입니다. 이렇게 새롭게 열린 삶의 관점이 바로 하나님과의 화해입니다.
이런 새로운 삶으로의 전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한 이유는 그로 인해서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의가 되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 사실을 바울은 21절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를 죄로 삼으셨다는 말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가리킵니다. 이 문장에 기독교의 가장 원초적인 신앙이 담겨 있습니다. 죄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처형당하심으로써 그를 믿는 우리는 죄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는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강조하는 내용도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제가 여러 번 설교했습니다. 모든 설교는 이 사실을 해명하는 것입니다. 제 설교를 자주 들은 분들은 이게 무슨 뜻인지를 설명할 수 있을 겁니다. 오늘은 이것을 비유적으로 설명하겠습니다. 여기 중학교 한 반이 있다고 합시다. 반 전체 학생들이 어느 날 사고를 쳤습니다. 수업 중인데 단체로 학교 밖으로 빠져나와 다른 학교 학생들과 패싸움을 벌였습니다. 정학 처분을 받아야 할 상황입니다. 반장이 나섰습니다. 반장은 그날 학생들의 모의에 가담하지 않았고 오히려 말렸지만 불가항력이었습니다. 반장은 학교 당국의 대책기구 모임에 나가서 자신이 책임을 지고 자퇴할 테니 나머지 학생들은 구제해달라고 말했습니다. 반장의 행동이 학생들을 엄벌해야겠다는 학교 당국과 어쩔 수 없었다고 항변하는 학생들을 화해시켰습니다.
인생 실패 너머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 우리의 죄를 대신 감당한 것이라는 말을 실질적으로 생각하십시오. 삶에 대한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이런 말은 종교적으로 가벼운 수사로 떨어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그야말로 인생 실패입니다. 고전 1:23절이 말하듯이 십자가 처형은 유대인들에게 거리낌이고,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우리는 이런 인생에 떨어질까 노심초사합니다. 이런 삶의 태도가 바로 17절이 말하는 ‘이전 것’입니다. 이전 것이라고 해서 무조건 나쁘다는 뜻이 아닙니다. 새로운 것이 오기 전까지만 설득력이 있습니다. 새로운 것이 오면 빛을 잃을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이전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이전 것은 빛을 잃었습니다. 유대 종교 권력자들과 로마 정치 권력자들은 이전 것에 속합니다. 그것은 이미 지나갔습니다. 사람들이 인생 실패라고 보았던 십자가에 달린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우리는 이제 인생 실패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났습니다. 두려움에서 벗어난 것을 가리켜 죄가 용서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의가 된 것입니다.
그래도 자신은 인생 실패하기 싫다고 말할 분들이, 말은 하지 않아도 속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십자가 처형과 같은 찌질 하고 피곤하고 부끄러운 인생을 살고 싶지 않습니다. 저도 여러분과 마찬가지입니다. 제 자식들도 그렇게 살지 않았으면 합니다. 우리교회 교우들도 인생 실패라는 말을 듣지 않았으면 합니다. 저는 두 가지만 여기서 분명하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 인생 실패와 반대되는 인생 성공을 거두어도 그것 자체가 대단한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을 당할 때 가장 잘 나가던 두 인물을 손에 꼽을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유대의 최고법정인 산헤드린 공회 책임자이고, 다른 한 사람은 총독 빌라도입니다. 그들은 종교적인 진리를 세우고 정치적인 정의를 실현했다고 큰소리 치고 여기에 가담한 이들과 만찬을 나누면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겠지만 오늘날 아무도 그들의 행동을 의롭다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들만이 아니라 지난 역사에서 잘 나가던 다른 사람들도 시간과 더불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이런 시간의 힘 앞에서는 사람들이 판단하는 인생 성공과 실패가 무의미합니다. 모두 스쳐지나가는 바람과 같습니다.
2) 사람들이 인생 실패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 처형을 감당하셨다는 말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죄는 자기 인생이 실패할까 걱정하는 것입니다. 그런 걱정으로 인해서, 그리고 자포자기로 인해서 온갖 악행이 발생합니다. 그 어떤 인생에도 실패가 없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는 죄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이걸 사실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자기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다면 인생이 고달파도 두려워하지 것처럼 예수와 하나 된 사람은 인생 실패를 미리 겁먹지 않습니다. 실패하지 않으면 좋고, 실패해도 괜찮은 겁니다. 여기서 실패여부는 악행을 저질러도 좋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가 팔복에서 말하는 그런 운명을 가리킵니다. 가난하지 않으면 좋고, 가난해도 괜찮은 겁니다. 그 가난한 삶에 이미 예수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루터가 그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예수가 지옥에 계시다면 자신은 지옥을 택하겠다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행복하신가요? 생명의 영으로 충만하신가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말하고 싶겠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고정관념에 묶여서 생명 충만이 무엇인지를 미처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구구절절한 여러분의 인생에 맞춤형의 설교를 할 수 없습니다. 매주일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길을 간절한 마음으로 성령의 도움에 기대서 전할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과 화해하라는 바울의 호소가 여러분의 영혼에 거룩한 여운으로 자리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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