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ser::bec483ba-d204-47d4-afbd-8005746530c3

창조절

하나님과 금송아지 상 (출 32:25-35)

하나님과 금송아지 상

출애굽기 32:25-35, 창조절 일곱째 주일, 2011년 10월16일

 

     출애굽기 32장에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끔찍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세가 레위 지파를 시켜 한 나절에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 3천명을 살해한 이야기입니다. 동족 집단살해 사건은 성경의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고, 일반 역사에서도 웬만해서는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내전에서만 가능한 잔인한 일입니다. 이런 일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처하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일어났다는 건 좀 이상합니다. 더구나 이런 일을 주도한 인물이 모세였다는 것은 구약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는 우리에게 당혹스럽기까지 합니다. 모세가 누군가요? 모세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보다 앞서 살았던 아브라함이나 요셉도 모세의 영적 카리스마를 따라올 수 없고, 그보다 후대에 살았던 왕 다윗이나 선지자 엘리야도 모세의 권위에 미치지 못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애굽 탈출을 주도했고, 이스라엘의 모든 종교적, 정치적 삶의 기준인 율법의 체계를 세운 인물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보고 싶다는 말할 정도로 하나님의 뜻에 가장 가까이 이른 인물입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민족은 동일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 그가 일종의 친위대를 동원해서 자기 동족을 3천명이나 죽였다는 겁니다.

 

     송아지 상

     이 사건의 배경은 송아지 상 제작과 연관이 있습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율법을 수여받고 있을 때 산 아래서 사단이 벌어졌습니다. 모세가 산에서 내려올 기미를 보이지 않은 게 문제였습니다. 그럴 만도 합니다. 당시는 출애굽의 공포가 채 가시지 않을 때였습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도 극에 달했습니다. 모세가 말한 대로 광야를 가로질러 젖고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을지도 확신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요? 함흥차사인 모세를 무작정 기다리기에는 그들이 처한 형편이 너무 어려웠습니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애굽으로 돌아가는 게 낫다거나, 아니면 모세를 그냥 내버려두고 하루라도 빨리 길을 떠나는 게 좋다는 의견이 분분했겠지요. 성경이 자세하게 말을 하지는 않지만 백성들의 설왕설래가 많았을 겁니다.

     그들은 특이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금송아지 상을 만들자는 결정이었습니다. 출 32:1절에 따르면 백성들은 모세의 형 아론에게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고 요구합니다. 그것이 당시의 여론이었습니다. 아론도 백성들의 의견에 솔깃한 것 같습니다. 송아지 상 제작이 불신앙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백성들을 뜯어말렸겠지요. 일단 의견이 일치되자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습니다. 백성들이 귀고리 같은 금으로 만든 장식품을 모았습니다. 1997년 국가부도를 맞아 IMF 통제를 받은 대한민국의 금모으기 운동과 비슷합니다. 아론은 백성들이 모은 금붙이를 녹여 송아지 상을 만들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출 32:4) 금송아지 상 앞에 제단을 쌓고 백성과 함께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모두 즐기는 축제였습니다.

     금송아지 상 제작을 출애굽기 기자는 여호와의 분노를 자아낸 것으로 평가했습니다. 출 32:9절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은 목이 뻣뻣한 백성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이들을 진멸하기로 마음을 먹었다고 합니다. 모세는 중보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런 정도로 문제가 해결되었다면 금송아지 사건은 씁쓸한 해프닝으로 끝났을 겁니다. 모세는 산에서 내려와서 아론을 불러 책임을 묻습니다. 아론은 백성들에게 책임을 미룹니다. 모세가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만 했을까요?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자기 형을 처단하는 게 순리가 아니었을까요? 아니면 이미 여호와로부터 용서를 받았으니까 없었던 일로 넘어가는 게 지혜로웠을까요? 모세는 예상 밖으로 일을 처리합니다. 앞에서 짚은 대로 3천명의 불특정 대상을 죽였습니다. 그 대목에 관한 출애굽기의 묘사가 끔찍합니다. 모세는 레위 자손에게 이렇게 명령을 내립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자기 친구를, 각 사람이 자기의 이웃을 죽이라 하셨느니라.”(출 32:27) 죄의 경중을 따지지 않고 닥치는 대로 죽이게 한 겁니다. 이게 과연 여호와의 명령인가요? 모세가 착각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송아지 상 사건은 기원전 14세기의 광야시절보다 훨씬 후대인 기원전 10세기 초반에 일어난 남북 왕조 분열과 직결됩니다. 대략 400년 이상의 차이가 납니다.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암 대에 이르러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분열됩니다. 르호보암의 철권정치에 염증을 느낀 북쪽 10개 지파 사람들이 여로보암 장군을 중심으로 반역을 일으켜서 북이스라엘을 세웠습니다. 북이스라엘의 국력은 남유대보다 여러 가지 면에서 월등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약점이 있었습니다. 남유대의 예루살렘 성전이 북이스라엘에는 없었습니다. 여로보암은 자기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순례하러 다니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금송아지 상을 두 개 만들어서 하나는 벧엘에, 다른 하나는 단에 설치했습니다. 이제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까지 갈 필요 없이 자기들 땅에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여로보암은 자신이 만들어 세운 금송아지 상을 가리켜 말합니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왕상 12:28) 이 말은 아론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한 말과 놀라운 정도로 똑같습니다. 400년 이상이나 차이가 나는 두 사건의 본질이 똑같다는 뜻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금송아지 형상으로 만들려는 욕구가 광야시절부터 왕정시대까지, 더 근본적으로 보면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관통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구약성경을 읽는 우리는 이렇게 질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왜 그럴 수밖에 없었을까요? 그리고 이것이 한 나절에 3천명을 죽여야 할 정도로 심각한 죄였을까요?

 

     생명을 얻는 길

      우선 이스라엘 백성들의 금송아지 상 제작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 우상을 섬긴다는 생각으로 금송아지를 만든 게 아닙니다. 아론과 여로보암의 진술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늘 출애굽의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은 그대로 간직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진정성이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진정성만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사이비 이단들도 진정성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교회 지도자들의 행태도 비슷합니다. 자신들이 교회를 가장 뜨겁게 사랑하고, 헌금도 가장 많이 한다는 말을 내세웁니다. 세계의 많은 독재자들에게도 진정성은 있습니다. 제가 신학대학교를 다니던 1970년대 초는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 독재가 기승을 부리고 있을 때입니다. 그분에게도 대한민국을 가난에서 벗어나서 잘 살게 해야겠다는 진정성은 있었겠지요. 그런 마음으로 유신헌법, 긴급조치 등을 만들어 자신에 대한 비판을 완전히 봉쇄했습니다. 북한 정권도 비슷하지 않을까요? 습관적으로 아내를 구타하는 남자들에게도 나름으로 진정성이 있습니다. 금송아지 상 제작은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에서 나온 결과입니다. 칭찬 받을 일일지도 모릅니다.

     지난 9월25일 주일 설교인 <명령하시는 하나님>(출 20:1-11)을 기억하시는지요. 십계명의 4개 항목을 본문으로 한 설교입니다. 제2계명은 ‘새긴 우상’이나 ‘어떤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대목을 설명하면서 형상 제작은 하나님을 감각적인 대상으로 끌어내리는 것이라고, 즉 하나님을 사람의 경험 범주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금송아지 상은 바로 그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믿느냐 아니냐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믿되 하나님을 자신들의 감각적 경험 안으로 끌어들이느냐 아니냐 하는 차원의 문제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하나님으로 확인하려는 갈망에 대한 경고였습니다.

     이런 갈망을 벗어나기를 쉽지 않습니다. 쉬우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금송아지 상을 아예 만들지도 않았을 겁니다. 거기에는 인간의 실존이 연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천사처럼 살 수는 없습니다. 먹고 배설하고 사랑하고 친구를 사귀고 또는 싸우면 삽니다. 그런 것으로 자기를 확인합니다. 자기를 확인하는 길은 결국 물질의 소유이고, 사람들로부터의 인정이고, 노후 보장 등입니다. 반대로 이런 조건들이 갖춰지지 않으면 소외감을 느끼고 정체성 상실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확보하는데 모든 걸 투자합니다. 이런 것들이 잘 갖춰진 나라를 선진국이라고 말하고, 그렇지 못한 나라를 개도국이나 후진국이라고 부릅니다. 선진국은 삶이 풍요로운 나라로, 그래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나라로 인정을 받고, 후진국은 삶이 빈곤한 나라로, 그래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나라로 취급받습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런 평가를 받습니다. 금송아지 상을 만든 광야의 이스라엘과 여로보암의 북이스라엘도 우리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똑같이 행동한 것입니다. 아주 자연스러운 생각이고 매력적인 삶의 태도입니다. 이것이 인류의 숙명입니다.

     출애굽기 기자는 왜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를 산 것이라고, 그래서 모세가 3천명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는 말을 한 것일까요? 그 답은 분명합니다. 금송아지의 방식으로는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들 나름으로 생명을 얻기 위해서 금송아지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결국 생명과 관계가 없다는 말이 됩니다. 오히려 생명으로부터 더 소외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허무하기도 하고, 이해하기 어렵기도 합니다. 이런 이상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조금만 깊이 생각하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모든 소유와 업적을 삶의 중심에서 끌어안고 산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것들은 아침 안개처럼 사라질 것들입니다. 사라질 것이 우리에게 생명을 줄 것으로 믿는 사람은 사라질 것과 더불어서 사라질 것입니다. 금송아지 상과 더불어서 파괴되고 말 것입니다. 스티브 잡스가 남긴 유산이 6조원 이상이라고 합니다. 그 돈이 누군가에게 전달되겠지요. 아무도 그것을 계속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무언가를 소유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자기 본질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는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생명을 얻는 길은 단 하나입니다. 하나님과의 일치입니다. 하나님과의 일치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전폭적으로 자신을 맡기는 데서 이뤄집니다. 그 하나님의 구원 행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 사실에 자신의 실존과 운명을 거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사실이 막연하게 느껴지시나요? 현실로 다가오지 않으시나요? 그렇다면 우리는 여전히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제사를 드리면 축제를 열었던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들이 꿈꾸는 풍요의 상징인 금송아지가 아니라 저주의 징표인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가 인류 역사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거기서 종말에 빛처럼 환하게 드러날 부활생명이 시작되었습니다. 부활생명은 사람의 그 어떤 야망이나 그 어떤 포부나 감망, 그리고 그 어떤 인식이나 희망으로도 제한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고유하고 배타적인 구원 행위입니다. 무로부터 세상을 창조한 것과 동일한 궁극적인 생명 사건입니다. 바로 그 사실에 여러분의 온 영혼을 집중하며 살아가십시오. 하나님의 놀라운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아니 지금 이미 여러분은 그 생명을 얻었습니다.

출애굽기 32:25-35
mms://wm-001.cafe24.com/dbia/2011/dawp_1016.mp3
mms://61.111.3.15/pwkvod/dawp/dawp_111016.wmv
itms://itunes.apple.com/kr/podcast/id458569912

설교의 다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