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9.28. (사 5:1-7)
종교와 정치
오늘 설교의 본문인 사 5:1-7절은 한편으로는 감미롭고, 다른 한편으로는 두렵게 들립니다. 1절을 보십시오. 마치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내는 연애 시처럼 보입니다. “임의 포도밭을 노래한 사랑의 노래를 내가 임에게 불러드리라. 나의 임은 기름진 산등성이에 포도밭을 가지고 있었네.” 이 시에서 임으로 불리는 사람은 실제로 애인일 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있습니다. 나의 임은 일조량도 많고 배수도 잘되는 산등성이의 포도밭을 정성스럽게 돌봤습니다. 얼마나 행복할지 상상이 갑니다. 그런데 이런 달콤한 행복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5절부터 포도원에 저주가 내립니다. 울타리를 걷어 짐승들에게 뜯기게 하고,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덮이게 하며, 가뭄이 들게 하겠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포도송이가 아니라 먹을 수 없는 들포도가 열렸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7절에서 이 시가 무슨 뜻인지를 설명합니다. 여기서 포도밭은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킵니다. 이사야가 나의 임이라고 표현한 포도원 주인은 물론 야훼 하나님입니다. 야훼 하나님은 포도원, 그 포도나무인 이스라엘을 사랑했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포도송이를 기대하듯이 야훼 하나님도 이스라엘에게서 결실을 기대했습니다. 그것은 공평과 정의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런 결실을 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의 궁금증은 야훼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원하는 것이 하필이면 공평과 정의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면 이에 합당한 제사를 드리고 성전을 수리하거나 리모델링 하고, 해외 선교에 박차를 가하면 충분할 텐데, 왜 정의를 요구하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정의는 종교적 주제라기보다는 오히려 정치적 주제처럼 들리는데 말입니다. 이사야가 정치와 종교를 구분하지 못한 게 아닐까요?
정치와 종교가 어떤 관계인가에 대해서는, 즉 정교일치냐, 정교분리냐에 대해서는 아주 오랫동안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한쪽에서는 정교일치를 주장했습니다. 그 전통은 313년 밀랑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로마 황제 시절부터 시작했습니다. 이런 전통은 황제와 교황으로 대별되는 권력이 지배하던 유럽 중세기에 계속 이어져왔습니다. 이 시대를 가리켜 암흑시대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여러 다른 원인이 있지만 정교일치도 한 몫을 감당했습니다.
이에 반해서 정교분리를 주장하는 목소리도 없지 않았습니다. 신학사적으로 본다면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의 나라를 이원론적으로 구분한 마틴 루터가 대표적입니다. 루터가 왜 정교분리를 주장했는지는 아주 분명합니다. 종교가 세상의 모든 일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신학자가 과학의 전문적인 분야를 간섭할 수 없습니다. 갈릴레이의 종교재판에서 보듯이 종교가 물리학에 간섭하는 일은 진리를 가로막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정교분리가 무조건 옳은 것도 아닙니다. 루터의 입장을 따라서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던 독일 교회는 히틀러의 폭압정치를 방관함으로써 현대 세계사에서 씻을 수 없는 과오를 저질렀습니다.
정교일치냐, 분리냐 하는 질문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이 경우에 따라서 종교 이데올로기로, 또는 교회 이기주의로 변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예컨대 군사독재 시절에 오랫동안 정교분리에 근거해서 순수한 신앙을 외치던 한국의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사립학교법이나 군대체복무법 같은 문제에서는 정치가들보다 더 정치적으로 접근했습니다. 그들은 툭 하면 시청 앞에서 모여서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면서 대한민국에 정의가 실종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수년 전에는 영락교회 예배당 강단 앞에서 십 수 명이 검은 양복을 입고 삭발을 하는 촌극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것도 기자들을 불러다 놓고 말이지요. 신앙행위가 아니라 정치행위입니다.
기원전 8세기
공평과 정의를 외치는 이사야도 역시 지금 정치를 하고 있는 걸까요? 대중들을 선동해서 자신의 정치적 이념을 확대하거나 개인적인 이득을 얻어내려는 걸까요? 그럴 리가 없다고 여러분은 믿고 있겠지요. 당연합니다. 똑같은 단어라고 하더라도 누가 했느냐에 따라서 다르듯이 이사야가 말한 정의라는 것은 정치적 선동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사야의 이런 외침에서 신앙적 진정성을 읽을 수 있을까요? 이스라엘의 역사 안으로 들어가 보실까요.
이사야가 예언자로 활동한 기원전 8세기 전반기는 아시리아 제국이 막강한 힘을 발휘하던 시절입니다. 이스라엘은 그 당시에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의 형편과 비슷합니다. 주변에 강력한 제국들이 포진해 있고, 남북이 갈라져 있는 형편이 말입니다. 몇 백 년 후에 우리의 후손들은 지금 우리가 이사야 시절을 되돌아보듯이 그렇게 되돌아보겠지요. 주변의 작은 나라를 압박하는 아시리아 제국에 맞서서 주변의 작은 여러 나라가 동맹을 맺어 대항했습니다. 이 연합 전선에 남유다는 빠졌습니다. 동맹국들은 기원전 733년에 동맹에 빠진 남유다의 수도인 예루살렘을 공격했습니다. 남유다의 왕인 아하스는 아시리아에게 원군을 청했습니다. 이 와중에서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에 아시리아에 의해서 망했습니다. 반면에 남유다는 아시리아와의 군사동맹 덕분으로 생존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대신에 아시리아에 많은 조공을 바쳐야만 했습니다.
이사야는 남유다 왕 아하스가 아시리아의 원군을 요청하려고 했을 때 크게 반대했습니다. 이사야는 나라의 운명을 아시리아 제국에게 맡기지 말고 야훼 하나님에게만 온전히 맡겨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그에게는 야훼 하나님의 뜻이 중요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언자 이사야와 정치가 아하스의 차이입니다. 만약 아하스가 이사야의 경고를 받아서 아시리아의 원군을 요청하기 않았다면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작은 나라들의 동맹이 더 강화되어서 결국 아시리아 제국을 막아낼 수 있었을지, 아니면 남유다도 북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아시리아에 의해서 멸망당했을지 아무 것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물론 결과적으로만 본다면 아하스의 외교적 선택으로 인해서 남유다가 아시리아에게 먹이지 않은 것 아니냐, 그러니 국제정치에서는 신앙보다는 외교적 감각이 더 중요한 게 아니냐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언자들의 주장은 지나치게 이상적이어서 현실 정치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저는 여기서 제가 잘 알지도 못하는 그 당시의 국제 정치 문제를 더 이상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다만 아하스와 남유다가 제국 아시리아에 빌붙어서 잠시 나라의 목숨을 연장시킬 수 있었을지는 몰라도 그것이 긴 역사에서 볼 때 결국 망하는 선택이었을지 모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남유다도 백여 년이 흐른 뒤에 바벨론에게 멸망당했다는 역사적 사실이 이에 대한 실증입니다.
여기서 더 중요한 건 개인도 그렇고 민족과 나라도 그렇고, 이들의 운명은 결국 야훼 하나님에게 달렸다는 예언자의 메시지입니다. 이사야는 그것을 오늘 포도밭을 비유로 설명했습니다. 포도밭에서 포도송이를 거두지 못하고 들포도만 거둔다면 포도밭은 더 이상 쓸데가 없으니 갈아엎을 수밖에 없습니다. 포도송이는 바로 공평과 정의입니다. 7b절을 그대로 읽겠습니다. “공평을 기대하셨는데 유혈이 웬 말이며, 정의를 기대하셨는데 아우성이 웬 말인가?” 공평과 유혈, 정의와 아우성이 대립해 있습니다. 일종의 언어유희입니다. 공의는 히브리어 ‘미슈파트’이고 유혈은 ‘미스파흐’입니다. 미슈파트는 공정한 법의 구현이고 미스파흐는 법질서의 파괴를 가리킵니다. 정의는 히브리어 ‘츠다카’이고 아우성은 ‘츠아카’입니다. 이사야는 지금 비슷한 발음이지만 정반대되는 의미의 단어를 통해서 남유다의 근본 문제가 무엇인지를 지적한 것입니다.
이사야만이 아닙니다. 대다수의 예언자들은 정의 문제를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관심 사항으로 가르쳤습니다. 예컨대 아모스 예언자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너희가 바치는 번제물과 곡식제물이 나는 조금도 달갑지 않다. 친교 제물로 바치는 살진 제물은 보기도 싫다. 거들떠보기도 싫다. 그 시끄러운 노랫소리를 집어치워라. 거문고 가락도 귀찮다. 다만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서로 위하는 마음 개울같이 넘쳐흐르게 하여라.”(암 5:22-24) 거룩한 종교의식에 앞서 이 사회에 정의를 세우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바로 예언자들의 이런 전통에서 서 있습니다.
무엇이 정의인가?
예언자들이 왜 이런 메시지를 전했을까요? 예언자들은 정치가들이 결코 아닙니다. 그들이 정치적인 이념을 드러내기 위해서 정의를 외친 게 아닙니다. 그들의 관심은 하나님, 즉 신학적인 차원이었습니다. 그들의 눈에 인간 삶의 파괴는 곧 하나님에 대한 거역이었습니다. 이건 성서의 가르침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초보적인 것입니다. 인간이 누굽니까? 하나님이 자신의 숨(루아흐)을 불어넣어 자기의 형상대로 지은 존재입니다. 모든 인간은 ‘임마고 데이’(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는 게 성서의 가르침입니다. 그 임마고 데이는 그 어떤 경우에도 훼손당해서는 안 됩니다. 일반적인 용어로 말하면 그것은 천부적 인권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권력이나 세력도 그것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세상은 그것은 파괴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이 사회가 공의로워야 하고 정의로워야 그것이 보존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모스와 이사야는 야훼 하나님이 공의와 정의를 바라신다고 외쳤습니다.
여기까지는 여러분도 모두 동의하실 겁니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는 서로 입장이 달라집니다. 정의로운 세상, 요즘 식으로 말해서 법질서를 세우는 일이 중요한 건 분명하지만, 도대체 무엇이 정의이고 법질서인가 하는 논란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서로의 세계관과 가치관이 다르니까요. 기독교 안에서도 목협이나 KNCC의 인권위에 속한 진보적 목사들과 뉴라이트에 속한 보수적 목사들이 서로 다른 주장을 합니다. 예컨대 앞서 거론했던 군대체복무 법안 건만 해도 그렇습니다. 평화를 실천하기 위해서 군대에 가는 대신에 사회 시설에 가서 군복무보다 더 긴 시간을 근무하도록 하는 법안이 오래 전에 국회에 상정되었습니다. 이것을 한국의 보수교회 대표기관인 한기총이 반대하고 있습니다. 이 법안이 여호와의 증인들을 위한 것이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비록 남북분단이라는 특별한 상황에 놓여 있다고 하더라도 평화주의자들을 범법자로 만들지 않는 것은 기독교 정신에도 상응하는 것인데, 이를 반대하다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이처럼 정의로운 사회가 무엇이냐에 대해 서로 의견이 분분하기 때문에 정의의 열매를 맺으라는 예언자의 말씀을 실제의 삶에서 어떻게 따라할지 기준을 잡기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복잡한 문제는 간단하게 생각해야 잘 풀릴 때가 있습니다. 정의를 세우는 일은 간단합니다. 구조적인 양극화를 줄여나가면 됩니다. 그것에 대한 의식을 심화해나가고 제도를 고쳐나가면 됩니다. 고대 이스라엘을 예로 들면 안식년과 희년제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7년이나 50년이 되면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갑니다. 가난해서 종이 되었던 사람도 자유인이 되고, 빚도 탕감되고, 땅도 제 주인에게로 돌아갑니다. 부의 집중을 막는 제도입니다. 그 방식을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이 손상되는 걸 막아보려고 했습니다. 어느 신학자는 가난한 나라의 모든 빚을 탕감해주자고 주장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런 주장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겠지요.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한 가지는 가난한 사람들의 문제를 그런 방식으로 해결해주면 게으른 버릇을 고치지 못한다는 것이며, 다른 한 가지는 결국 성실한 사람들의 수고와 노력을 무시하는 처사라는 것입니다. 그게 완전히 잘못된 생각은 아니지만, 상황이 어느 정도냐 하는 게 문제겠지요. 아무리 개인이 노력해도 해결될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이 나쁘다면,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이 손상당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면 탕감의 길밖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설령 탕감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들이 일어설 수 있도록 제도를 고쳐나가야 합니다.
지금 한국사회는 어떤 방향으로 나가고 있을까요? 양극화가 심해지는 방향인가요, 축소되는 방향인가요? 요즘 종부세로 논란이 많습니다. 저는 정치적으로가 아니라 신학적으로 바라봅니다. 종부세의 유지와 폐지 중에 어느 쪽이 양극화를 축소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제도일까, 하는 관점을 봅니다. 종부세만이 아니라 모든 세금이 그렇습니다. 이 문제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분명한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많은 세금을 내고 힘든 사람들이 적게 내는 것이 바로 양극화를 줄이는 길이 아닐는지요.
이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본질에서도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양극화 문제는 교회의 본질을 훼손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미자립교회의 목사는 영원히 그 신세를 면하지 못합니다. 여러 곳에 손을 내밀면서 생활비를 충당해야만 합니다. 반면에 헌금이 넘쳐서 주체하지 못하는 교회도 많습니다. 교회의 양극화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런 것을 전혀 문제로 느끼지 못하는 목사들과 신자들이 많습니다. 미자립교회는 목사가 게으르고 능력이 없어서 그래, 고생 좀 해야지 뭐, 하고 쉽게 말합니다. 자기들 교회만 잘 되면 충분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한국교회는 지금 교회 일치라는 교회의 본질이, 즉 교회의 정의가 근본적으로 훼손되었습니다. 그것이 복구될 낌새도 잘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늘 2천7백 년 전에 활동하던 이사야의 예언을 들었습니다. 이 예언이 저에게는 시간의 차이를 뛰어넘어 바로 지금 우리 한국교회와 한국사회에 주는 생생한 말씀으로 들립니다. 그래서 부끄럽고 두렵습니다. 공평과 정의가 땅에 떨어지고 있는데도 아무 것도 할 능력이 없어서 부끄럽고, 한국사회와 교회가 나락으로 떨어질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힘을 내야겠지요.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입니다. 그 말씀에 의지해서 하나님의 정의를 세우는 일에 최선을 다 하려고 합니다. 모든 것의 결과는 역사의 주인이신 야훼 하나님에게 맡기고요. 아멘!
0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