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화목하라!
고린도후서 5:16-21, 사순절 넷째 주일, 2013년 3월10일
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19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20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성서의 언어 세계는 여러모로 오늘 우리에게 낯설게 들립니다. 이는 마치 유행가에만 심취하던 사람들에게 고전 음악이 낯선 것과 비슷합니다. 또는 돈 버는 일에만 인생을 걸던 사람들에게 수도원 생활이 낯선 것과 비슷합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익숙한 것에만 관심을 보이기 마련입니다. 낯선 것에는 관심을 보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기는 하지만 그 세계를 알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십시오. 성서의 세계를 실제로 알고 싶어 하는지 아닌지 말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눅 14:15-24). 어떤 사람이 잔치를 베풀고 사람들을 초청했습니다. 사람들이 나름으로 각각 이유 있는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초청을 거절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밭을 사서 나가봐야겠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소를 다섯 겨리나 사서 나가봐야겠다고 했으며, 또 어떤 사람은 결혼했기 때문에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초청을 거절한 사람들이 이유로 든 모든 것들은 소중한 일상입니다. 아무도 이런 일상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모두 절절한 사연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상들이 결국 생명의 나라에 대한 관심을 방해합니다. 우리의 일상을 보십시오. 가정이나 직장, 그리고 여러 종류의 사회생활에서 서로 이해타산이 얽히고설킵니다. 자존심 상하는 말 한 마디를 들으면 며칠 동안 잠을 이루지 못하기도 합니다. 마음에 분노가 그치지 않습니다. 실제로 먹고 살기도 벅찹니다. 이런 상황에서 성서의 세계에 대한 관심을 보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그걸 넘어서려는 사람들입니다. 일상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것 너머의 세계로 가려는 사람들입니다. 일상의 표면에 떨어지지 않고 그 심연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일상에만 관심을 보이는 게 아니라 오히려 성서의 낯선 세계에 영적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입니다. 그게 영성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성서의 세계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오늘 설교의 본문도 그런 관점으로 보십시오.
‘카탈라게’
오늘 본문에 반복해서 나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화목’이 그것입니다. 18절에는 두 번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19절에도 두 번 나옵니다. 20절에는 “하나님과 화목하라.”는 강력한 권고문이 나옵니다. 화목이라는 단어는 요즘 잘 사용하지 않습니다. 공동번역은 이를 ‘화해’라고 번역했습니다. 헬라어로는 ‘카탈라게’입니다. 카탈라게의 뜻은 being put into friendship with God입니다. 하나님과의 우정 관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라, 화해하라, 프랜드십으로 들어가라는 말은 하나님과의 불화를 전제합니다. 하나님과의 불화는 우리가 생명의 원천으로부터 분리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의 불화는 하나님과의 단절입니다. 하나님과의 단절은 곧 생명과의 분리입니다. 이건 그렇게 종교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물리 생물학적인 차원에서도 옳습니다. 보십시오. 우리는 죽습니다. 어떤 처방으로도 그걸 피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건강식품을 먹고, 온갖 종류의 의료 혜택을 받는다고 해도 모두 죽습니다. 죽음이 이르기 전에도 우리는 지금 생명을 충분하게 누리지 못합니다. 불안이 우리의 무의식 깊은 곳까지 지배합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해도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더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힐 뿐입니다. 자기를 잃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더 깊어집니다. 그래도 또 다시 매달립니다. 악순환입니다. 그게 피조물인 인간의 실존입니다. 그것이 운명입니다. 이런 궁극적인 인간의 운명을 성서는 죄의 결과라고 설명합니다. 그 죄는 곧 하나님과의 불화입니다.
그런 문제는 심리학이나 철학, 또는 종교생활 등으로 해결할 수 있는 거 아니냐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런 훈련과 공부가 필요합니다. 특히 불교나 명상 센터 같은 곳에서는 마음공부에 매진합니다. 자기의 내면을 정화하는 공부입니다. 그걸 통해서 마음의 온갖 번뇌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게 과연 가능할까요?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래서 마치 인생을 통달한 도사 연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들을 추종하는 청중들도 있습니다. 얼마 전부턴가 한국사회에 ‘힐링’ 바람이 불었습니다. 힐링 캠프라는 티브이 프로그램도 있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번뇌가 조금 잦아드는 것은 분명합니다. 인격적으로 행동할 수는 있을 겁니다. 마음의 평정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 정도의 경지에 들어가기도 힘들뿐더러, 그걸 이루었다고 해도 그가 궁극적인 생명을 얻은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실존을 깊이 깨닫는 것에 불과합니다. 인생은 바람을 잡는 것처럼 헛되구나, 그러니 소풍처럼 편안하게 살아야겠구나, 하는 깨달음에 불과합니다. 이런 공부와 훈련은 아무리 깊어져도 인간 공부 그 이상은 아닙니다.
성서는 똑같이 인간 실존을 보고 있지만 그 중심을 전혀 새로운 차원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불화가 모든 것의 원인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은 생명의 원천입니다. 창조의 능력입니다. 하나님과의 불화로 인해서 우리는 생명을 잃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그 어떤 노력을 기울여도 참된 생명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참된 평화를 얻을 수 없습니다. 생명을 얻고 참된 평화의 세계로 들어가는데 관건은 하나님과의 화목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생명의 주인이 ‘나’ 자신이라고 생각되나요? 하나님 없이도 내가 얼마든지 자유롭고 평화롭게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닙니다. 그건 착각입니다. 성서는 인간을 피조물이라고 합니다. 존재의 근거가 자기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 있다는 겁니다. 숨을 공급받지 못하면 5분 이내에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인간은 카탈라게, 즉 하나님과의 화목을 통해서만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 질문은 하나님과의 화목이 어떻게 가능하냐 하는 것입니다. 구약성서가 제시하는 길은 율법 성취입니다. 구약성서는 아주 구체적인 방식으로 율법을 발전시켰습니다. 그것이 나름으로 근거가 있습니다. 무언가 보이는 방식으로 확신을 주기 때문입니다. 소나 양을 잡아서 번제를 드리면서 죄가 용서되었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당대의 최고 건축물인 예루살렘 성전은 실제로 하나님이 거하신다는 확신을 들게 했습니다. 귀한 종교 유산입니다. 귀한 정신문명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율법은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죽이는데 앞장서거나 최소한 방조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무죄한 자의 고난과 죽음을 가리킵니다. 율법은 결국 의를 이루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이걸 더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요? 오늘의 실정법이 의를 세우는지 허무는지를 보십시오. 세우기도 하지만 허물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룰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선하기는 하되 구원의 통로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게 오늘의 실정법을 포함한 율법의 본질입니다.
이 사실을 뚫어본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전혀 새로운 차원의 길을 제시합니다. 18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19절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여기서 두 가지 사실이 중요합니다. 하나는 하나님과의 화목은 하나님에 의해서 준비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는데 토대라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이긴 하지만 사람들이 행해야 할 의무들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을 위해서 사람들이 많은 법을 지켜야만 했습니다. 구약성서 기자들이 이해한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실패라는 사실은 드러났습니다. 사람에 의해서는 하나님과의 화목이 이뤄질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이와 달리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업적과 행위입니다. 화목의 주체가 사람에게서 하나님에게도 옮겨졌습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했던 것이 이제 하나님에 의해서 가능해졌습니다.
이런 설명을 어떤 분들은 단순히 교리적인 것으로만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실감하지 못하고, 다시 율법으로 돌아갑니다. 자기의 종교적 업적과 성취에 매달립니다. 오늘의 교회생활이 어떤지를 보십시오. 유대의 율법 종교와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 방향으로 계속해서 나가면 서로 경쟁하고 목적을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됩니다. 자신들이 주도적으로 구원을 성취해보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힙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도록 하자는 말을 하기도합니다. 그것의 좋은 뜻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엄격하게 말하면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실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이 하시는 일을 알아보고, 놀라워하고, 찬양할 수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사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화목에 이르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유대교를 극복한 기독교의 복음입니다. 바울은 이에 대해서 여러 편지에서 썼습니다. 다른 건 접어두고 오늘 본문의 설명을 좀더 따라가겠습니다.
17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바울의 글 중에서 이 구절보다 더 잘 알려진 것도 드물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의 화목에서 결정적인 사건이라는 말은 여기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단어와 직접 연결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말은 모양만 그럴듯하게 달라진 게 아니라 근본이 새롭게 창조된 것입니다. 이는 마치 고철 덩어리를 녹여서 멋진 예술품을 만든 것과 비슷합니다. 이 예술품을 보고 이전의 고철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이전 것은 물러갔고 새 것이 되었습니다. 기독교인은 전적으로 새로운 사람입니다. 질적인 변화입니다.
혹시 예수 믿어도 별로 달라진 게 없는데 어떻게 질적으로 변화되었다고 하느냐고 질문하고 싶으신가요? 혹은 스스로 많은 게 달라졌다고 생각하시나요? 그 둘 다 정확한 게 아닙니다. 새롭다는 말을 자꾸 사람들의 경험 범주에서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거친 행동이 좀더 순화되었다거나 말씨가 세련되게 변해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게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예수 믿지 않아도 가능한 일들입니다. 여기서 새롭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일어난 존재론적인 변화를 가리킵니다. 그것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한 것과 같은 차원에서 새로운 것입니다. 완전히 새로운 것입니다. 무(無)에서 유(有)를 찾을 수 없듯이 그와 비슷한 것을 우리는 이 세상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바울은 지금 예수 사건이 창조와 동일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경험한 것입니다.
예수 사건에서 일어난 창조는 부활을 가리킵니다. 부활은 단순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뜻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에게만 가능한 사건입니다. 세상이 끝나고 생명이 완성될 그 마지막 때 일어난 일을 하나님께서 선취적(先取的)으로 예수님의 운명에서 행하신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활은 창조 사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은 전적으로 새로운 생명입니다.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우리는 질적으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우리가 변한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변화된 예수님 안에 우리가 들어가는 것뿐입니다. 이 사태는 그 어떤 인간적인 조건에 의해서도 상대화하거나 부정될 수 없습니다. 세상이 창조되었다는 사실이 상대화되거나 부정될 수 없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화목은 바로 이 예수님에게 일어난 사건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복음의 세계 안으로 들어간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순식간에 사라질 것입니다. 저의 가족은 오는 금요일에 원당리로 이사를 갑니다. 숲속 언덕에 집을 지었습니다. 전원에서 살게 되어서 기대가 되지만 그 집도 곧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노력과 업적과 성취도 봄기운에 잔설이 녹듯이 사라질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모두 늙고 병들고 죽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명을 얻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과의 화목입니다. 그분과 친교입니다. 그 일을 하나님께서 스스로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셨습니다. 여러분은 그 사실을 실질적으로 믿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과 화목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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