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가까이!
히 10:19~25, 창조절 열한째 주일, 2021년 11월14일
저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성경 본문을 대할 때 처음이라는 심정으로 읽습니다. 낯설게 다가옵니다. 낯설기에 오히려 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거꾸로 너무 익숙하게 대하면 말씀의 깊이를 놓칠 우려가 더 큽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히 10:19~25절에도 낯선 단어와 개념들이 여럿 나옵니다. 제가 몇 단어를 짚을 테니까 여러분에게 어떤 느낌이 드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예수의 피, 성소, 휘장, 큰 제사장, 마음에 뿌림, 악한 양심, 물로 씻음, 믿는 도리, 그 날이 가까움, 등등입니다. 이게 다 본문에 나오는 단어들입니다. 머리에 선명하게 그림이 그려집니까? 저는 오늘 여러분을 이런 단어들이 가리키는 기독교 신앙의 세계로 안내하겠습니다.
예수의 피
히브리서 기자는 오늘 설교 본문 첫 구절인 19절에서 ‘예수의 피’를 언급합니다. 예수의 피로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고 말입니다. 여기서 성소는 예루살렘 성전이나 회당이나 성당이나 교회당 같은 건물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성소는 헬라어 ‘하기온’의 번역입니다. ‘하기온’의 원형인 ‘하기오스’는 거룩하다는 뜻도 있고, 구별되었다는 뜻도 있습니다. 따라서 ‘성소’는 세상과 구별된 하나님의 구원, 또는 하나님의 생명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 압축해서 말하면 성소는 하나님의 생명 사건입니다. 예수의 피로 하나님의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말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내용입니다만 문제는 이를 실제 삶에서 얼마나 실질적으로 경험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일단 여러분이 어디서 어떤 때에 생명을 경험하는지 살펴보십시오. 어떤 사람은 병으로 고생하다가 치료되었던 때를 기억할 겁니다. 난민들은 어느 나라에서 합법적으로 받아들여진 순간을 기억하겠지요. 인생살이가 좋아지는 걸 우리는 보통 생명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인생살이가 좋아져도 그것은 일시적이지 지속적이지 못합니다. 더 근본적으로 우리가 세상에서 경험하는 것들은 생명을 세우기보다는 파괴할 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오늘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보면 모두 이 사실을 인정할 겁니다. 무한경쟁의 메커니즘 안에서 숨을 제대로 쉬기 힘듭니다. 그런 경쟁에서 살아남았다 해도 우리 영혼이 안식과 평화를 얻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손에 넣어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의 피를, 즉 그의 십자가 죽음을 힘입어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20절에 의하면 예수의 피를 통한 길은 ‘새로운 살길’입니다. KJV은 “a new and living way”라고 번역했습니다. 새로운 길이며 살리는 길입니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십자가 죽음은 생명이 아니라 생명이 끊기는 사건입니다. 한 역사적 인물의 십자가 죽음을 구원의 길이라고 믿는 사람은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과 그 신앙을 이어받는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 외에 없습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구원의 새로운 길이라고 믿는 이유는 그 십자가 죽음이라는 사건에 하나님이 함께하셨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면 죽음도 생명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았다면 예수의 십자가는 단순히 유대 역사에 자주 등장했던 의로운 선지자의 죽음에 불과했을 겁니다. 하나님이 예수 십자가 죽음에 함께하셨다는 말은 죽어 무덤에 묻혔던 예수가 제자들에게 살아있는 존재로 경험되었다는 뜻입니다. 그 경험에 근거해서 그들은 사도신경과 니케아신조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하나님이 예수를 죽은 자로부터 사흘 만에 다시 살리셨다.’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일은 지난 인류 역사에서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었기에 새로운 길이라고, 사람을 살리는 길이라고 오늘 본문이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생명 구원 이야기를 단지 교리의 차원이 아니라 실질적인 삶의 차원에서 이해하려면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와 연결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전혀 새롭게 선포하셨다는 사실이 여기서 중요합니다. 예수 이전의 유대교 전통은 두 가지 절대적인 기준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제시했습니다. 하나는 제사장들이 감당한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의식이고, 다른 하나는 선지자들이 감당한 말씀 선포입니다. 그 두 전통으로 인해서 유대 민족은 다른 민족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영적이고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영토와 정치와 경제의 차원에서는 작은 민족이었으나 영적인 차원에서는 큰 민족이었습니다.
성전의 제사의식과 선지자들의 말씀 선포가 아무리 높은 수준의 영적인 삶을 성취하게 했더라도 유대 민족이 그것만으로는 생명을 온전하게 얻을 수 없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현대 선진국들이 아무리 복지제도를 다양하게 실행해도 그것만으로 인간이 온전한 행복을 얻을 수 없는 거와 같습니다. 그 과정에서 유대 민족은 율법주의로 떨어졌습니다. 복음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예수님과 매사에 충돌했던 바리새인들이 이런 율법주의를 대표하는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사회에서 인정받았고, 세리나 죄인처럼 그렇지 못한 사람은 소외되었습니다. 요즘 연봉에 따라서 평가받는 거와 같습니다. 다른 이들에게서 인정받아야만 생명에 가까이 간다고 믿는, 즉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 이런 세상에서는 상대적인 우월감에 만족하면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살 뿐입니다. 참된 안식과 자유를 얻지 못합니다. 오늘날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벌어졌던 매매행위에 반기를 들었고, 안식일에도 병을 고쳤으며, 세리와 죄인을 친구처럼 대했습니다. 사람이 만든 제도와 차별을 넘어서, 그리고 일상에 대한 인간적인 염려에서 벗어나 오직 하나님 나라만을 지향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인식할 때만 가능한 삶의 태도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태도가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가 십자가 죽음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에 관한 메시지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그의 운명을 파멸시키지 못했습니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현재 ‘살아있는’ 존재로 경험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이제 세상 사람들과 달리 ‘예수 안에서’ 하나님만을 믿고 사랑하며 희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초석은 바로 이 사실에 놓여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삶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먹고 마시며 숨을 쉬고, 노동하고 가족을 꾸리는 일은 똑같으나 삶의 방향이 완전히 다른 겁니다.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
히브리서 기자는 세상 사람들과 다른 방향으로 살아가는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삶의 태도를 22~24절에서 세 가지로 제시합니다. 우리말 성경으로는 문장의 뉘앙스가 살아나지 못합니다. KJV 영어 성경이나 루터 독어 성경은 비교적 정확하게 번역했습니다. 각 구절이 “… 합시다.”라는 표현으로 시작됩니다. 22절은 “하나님께 가까이 갑시다.”, 23절은 “확실하게 잡읍시다.”, 24절은 “서로 돌아봅시다.”라로 시작됩니다. 세 가지 권면 중에서 핵심 내용은 22절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이 문장을 원문에 따라서 정확하게 읽으려면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라는 표현을 앞에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을 강조하는 문장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게 확실하게 느껴지지 않는 분들도 적지 않을 겁니다. 인식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어떤 절대적인 세계로 들어가는 일은 설명을 듣는다고 해서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세상 이치도 어느 정도는 그렇습니다.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원리나 바이러스의 세계를 전문가의 설명만으로 일반인 모두가 깊이 깨달을 수는 없습니다. 그걸 깨달을 수 있는 전 단계에 들어서야 합니다. 한 걸음씩 그 세계 안으로 들어가야만 실체를 경험하는 겁니다. 세상 이치도 그렇다면 하나님의 세계야 오죽하겠습니까.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22절에서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우리말 성경은 마음과 믿음을 병렬로 놓았으나 헬라어 성경과 앞에서 언급한 KJV과 루터 성경은 ‘마음’을 ‘믿음 안’에 있는 문장 구조로 표현했습니다. KJV의 표현은 “with a true heart in full assurance of faith”입니다. 여기서 우선 중요한 것은 믿음에 대한 “full assurance”(헬-플레로포리아), 즉 충만한 확신입니다. 믿음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없으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여러분, 인생은 본래 믿음의 문제입니다. 아무도 자신 인생의 미래를 실증적으로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에서 배운 정보에 근거해서 어떤 길을 선택해서 사는 겁니다. 그런 선택은 믿음의 차원이지 실증의 차원은 아닙니다. 일류대학교를 나와서 높은 연봉을 받고 좋은 사람을 만나서 결혼하여 아들딸 낳고 살면 행복하리라고 기대합니다. 대한민국이 경제 대국이 되면 행복한 나라가 되리라고 예상합니다. 그런 기대와 예상은 확실한 게 아닙니다. 개인도 그렇고 국가도 그렇고 인류도 마찬가지로 그 미래는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보세요. 자연과학과 산업발전으로 인류가 잘 먹고 잘살게 되었으나 인류에게 재앙이 될 기후변화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교회가 양적으로 크게 성장하면 행복한 교회가 될지 아니면 불행한 교회가 될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인간 인식 능력은 본질에서는 크게 부족합니다. 피조물의 한계라서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오직 하나의 사실에 자신의 운명을 걸고, 즉 믿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을 얻게 되리라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이런 믿음에 대한 충만한 확신이 있어야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여기 기웃하고 저기 기웃하는 방식으로는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세상일은 모두 부질없으니 교회 생활에만 매달리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태도는 열광주의적 사이비 교도들에게서 주로 나타납니다.
세상일은 최소한의 상식에 맞춰서 여러분이 처리하면 됩니다. 정치적으로 진보를 택할 사람은 그렇게 하시고 보수를 택할 사람은 그렇게 하면 됩니다. 시와 음악을 취미로 해도 좋고, 여행을 취미로 해도 좋습니다. 아파트에 살아도 좋고, 시골 자연주택에 살아도 좋습니다. 결혼해도 좋고, 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런 문제는 교양과 상식에 속한 것이니 그런 차원에서 처리하면 됩니다. 죽음 이후까지 이어지는 자기 인생 전체를 거는 영혼의 문제에서는 예수의 피를 의지해야 합니다. 그런 믿음으로 충만(플레로마)해야 합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지난 2천 년 기독교 역사에 많았고, 지금도 많습니다. 이런 그리스도인의 충만한 믿음의 삶을 부끄럽다고 여기는 분들은 없겠지요? 세상의 처세술에 비해서 뭔가 부족하다고 여기는 분들은 없겠지요? 우리의 믿음과 확신과 삶에 근거가 없다면 세상의 각종 처세술은 더더욱 근거가 없습니다.
세례 영성으로
히브리서 기자는 충만한 확신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출발점을 세례라고 짚었습니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라는 표현이나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라는 표현은 다 세례의식을 가리킵니다. 이 두 문장 사이에 나오는 특이한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라는 표현이 그것입니다. ‘악한 양심’은 보통 ‘저 사람은 양심적이야.’라고 할 때 쓰이는 그런 ‘양심’은 아닙니다. 그런 양심은 세상 도덕 교사들의 몫입니다. 히브리서가 말하는 ‘악한 양심’은 자기 인생을 스스로 완성해야 한다는 강요에서 오는 두려움입니다. 행복 성취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세례받은 사람은 그런 두려움에서 벗어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이미 죽고, 그의 부활과 함께 다시 살았으니 세상이 말하는 행복한 조건을 채울 수 있는지 없는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믿음에 대한 충만한 확신 가운데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뿐입니다. 이런 삶의 태도 외에 더 의미 있는 삶을, 더 행복한 삶을 여러분은 알고 계신 게 있나요?
본문을 꼼꼼하게 읽은 분은 마지막 25절에 뜬금없어 보이는 표현이 나온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겁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이 그것입니다. 당시에도 모이기를 꺼리는 일단의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의 심정이 이해는 됩니다. 아무리 교회 생활을 오래 해도 신앙이 깊어지지 않으니 차라리 그만두는 게 낫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교회 모임에 나가는 시간이 아까운 거지요. 요즘에도 소위 ‘가나안’ 교인들이 많다고 하지 않습니까? 특히 젊은 지성인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를 나가지 않는 경향이 강합니다. 안타깝지만 오늘의 세상이 그런 추세입니다. 스마트폰 시대에, 그리고 경쟁이 더 심해진 오늘날, 그리고 한국교회가 세상에서 민폐를 끼칠 때도 많은 터라서 젊은 그리스도인들을 설득하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은 어떻습니까?
히브리서 기자가 함께 모이기를 폐하지 말라고 말한 이유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일에 수행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산티아고 순례처럼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는 수행 말입니다. 절대적인 대상을 향하는 삶에는 반드시 수행이 필요합니다. 신약성경도 그것을 자주 강조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수행을 일 년 열두 달 52주일 예배에 한 번도 빠지면 안 된다는 식의 율법으로 듣지는 마십시오. 그런 식이라면 예배도 습관이나 업적신앙으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예배와 그리스도인의 친교를 통해서 영혼이 깨어 있는 게 중요합니다. 자기가 지금 어디를 가고 있는지를 성찰하는 영혼으로 사는 겁니다. 자기가 이전보다 훨씬 더 자유로워졌는지, 참된 안식에 조금이라도 더 깊이 들어갔는지를 진지하게 질문하는 것입니다. 이런 영적인 태도를 오늘 본문 25b은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라고 표현했습니다. ‘그 날’이 가까이 왔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와야 하나님께 나아갈 마음이 들지 않겠습니다. 죽음이 바로 내일로 다가왔을지 모르는데, 어떻게 하나님께 가까이 가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실제로 삶을 살고 있을까요? 아니면 그럴듯한 세상 논리에 길든 건 아닐까요? 잠시 달콤한 맛만 제공하는 설탕물에 붙어 있는 꿀벌인지, 실제로 꽃의 꿀을 빨아들이는 꿀벌인지 자신 있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저 자신도 분명하게는 모릅니다. 다만 히브리서 기자의 강력한 권면에 따라서 수행하듯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그분이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키리에) 함께해주시기를(임마누엘) 간구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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