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마음을 두라!
데살로니가전서 2:1-8, 창조절 여덟째 주일, 2011년 10월23일
오늘 설교 본문인 살전 2:1-8절은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첫 번째 편지의 한 대목입니다. 데살로니가서는 바울의 남아있는 편지 중에서 가장 오래된 편지입니다. 기원후 50년경에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사도행전의 설명에 따르면 빌립보에 이어서 두 번째 설립된 교회가 바로 데살로니가입니다. 그 설립과정이 행 17장에 간략히 소개되어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를 중심으로 한 선교사들이 데살로니가에 도착했습니다. 바울은 관례대로 안식일에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서 성경을 강론했다고 합니다. 그 성경은 물론 구약성경입니다. 아직은 39권으로 완성된 것은 아니고, 그중의 일부입니다. 그걸 중심으로 강론하면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경건한 헬라인들과 귀부인들이 그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렇게 복음 공동체가 천천히 그러나 역동적으로 자리를 잡아갔습니다. 그곳에 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바울의 선교활동을 방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위험에 처한 바울과 실라는 어느 날 밤에 데살로니가를 빠져나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다시 가보고 싶었지만 사정이 여의치 못하자 디모데를 대신 보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소식을 디모데에게서 전해들은 바울은 편지를 썼습니다. 그것이 데살로니가전서입니다.
유모의 심정
이 편지를 쓰던 당시의 바울이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그것을 대변하는 단어가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유모’의 심정입니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7절) 여기서 유모와 대비되는 단어는 사도입니다. 사도에게는 권위가 필요합니다. 대학교에서 교수의 권위가 필요하고, 법정에서도 판사의 권위가 필요한 것과 비슷합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사도는 복음을 선포하고 교회를 치리할 수 있는 리더십이 보장되었습니다. 바울도 그런 권위를 내세울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를 쓰는 바울은 당연한 사도의 권위마저 포기하고 유모와 같은 자세를 취했습니다. 유모는 자기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아이들을 돌보는 사람입니다. 단순히 돌보는 게 아니라 어머니와 같은 입장에서 돌보는 겁니다. 유모의 심정으로 바울은 데살로니가 신자들에게 복음만이 아니라 목숨까지도 주고 싶다고 했습니다.(8절) 비장감이 묻어납니다.
바울이 이렇게 격정적인 문장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이유는 데살로니가 신자들이 ‘고난’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돈이 없다거나 몸이 아프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구체적인 대상으로부터 받은 박해를 가리킵니다. 살전 2:14에 따르면 유대 지역에 있는 교회가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았듯이 데살로니가 교회도 역시 동족에게서 고난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15절에서 유대인들을 강한 어조로 비판합니다. “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16절은 더 구체적입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을 비롯한 초기 이방 선교사들이 이방인에게 전도하는 걸 가로막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입니다. 여기서 돌이키지 않는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유대인의 박해로 인한 그리스도인들의 고난은 당시 초기 그리스도교의 전반적인 상황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도 그렇고, 바울도 역시 고난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그걸 본문 2절에서 이미 구체적으로 짚었습니다.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했고, 다른 곳에서도 많이 싸웠다고 합니다. 그 싸움의 대상은 물론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이 왜 곳곳에서 복음 전도자들을 박해했을까요?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잘 섬기던 사람들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유대인들은 더 열광적으로 유대교를 믿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볼 때 유대교의 핵심인 율법으로부터 벗어난 이방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잘못입니다. 그들은 율법 없는 하나님 신앙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도교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하는 것까지는 용납할 수 있어도 율법을 상대화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을 따라다니면서 괴롭혔습니다. 바울의 가르침을 헐뜯었습니다. 이런 일을 거의 직업처럼 행하던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유랑 설교자들로서 데살로니가 교회에 와서도 바울의 가르침을 문제 삼으면서 자신들의 주장을 펼쳤습니다. 바울은 이런 유랑설교자들과 경쟁관계에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흔들리지 않을까,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행히 디모데를 통해서 데살로니가 교회가 ‘주 안에 굳게’(살전 3:8) 섰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안심할 수 있었지만, 모든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앞으로 거짓 유랑설교자들이 데살로니가에 또 올 겁니다. 실제로 그런 일은 그 뒤로 반복해서 일어났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만이 아니라 여러 교회에서 일어났고, 그 강도도 더 강해졌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더 이상 혼란을 겪지 않게 하기 위해서 자칭 정통인 척 말하지만 실제로는 거짓 설교자들인 그들의 가르침과 자기의 가르침이 어떻게 격이 다른지를 설명해야만 했습니다. 일종의 자기 변호입니다.
아첨과 탐심
바울은 우선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음을 위탁받았다고 말합니다.(4절) 이 말은 자신의 선교사 자격을, 설교자 자격을 유대교의 총본산인 예루살렘 성전에서 교권을 행사하고 있던 대제사장들이나 여러 고위급 인사들로부터 받은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어서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앞의 말과 비슷한 비슷한 이야기인데, 대단히 과격한 발언입니다. 유대교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명령을 받겠다는 뜻입니다. 이런 주장은 위험합니다. 모든 사이비 이단 교주들의 행태가 이와 비슷합니다. 오늘이라도 어떤 사람이 소정의 신학공부와 목회 훈련을 거쳐서 교단으로부터 목사로 안수를 받지도 않은 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목사 행세를 한다고 합시다.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볼까요? 바울의 태도가 이와 비슷합니다. 오해받거나 무시당하기 맞춤합니다.
사실 바울은 유대교 당국자들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과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사도권에 대해서 열등감을 느끼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바울은 예수님 생전에 예수님을 한번도 만나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 사람은 사도의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자칭했습니다.(롬 1:1, 고전 1:1... 참조) 사도들은 이방인 선교에 소극적이었던 반면에 바울은 적극적이었습니다. 특히 토라와 할례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도 지켜야 한다고 가르쳐야 하는지, 아닌지에 관해서 서로의 입장이 달랐습니다. 바울은 결국 유대교만이 아니라 유대인 그리스도교로부터도 배척을 받았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바울이 입장이 아주 어려웠습니다.
복음 사역을 하나님으로부터 위탁받았다는 바울의 주장이 옳은지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증거가 무엇인가요? 바울은 자신이 인간적인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제시합니다. 간사함, 부정, 속임수와 관련이 없고(3절), 아첨의 말을 하지 않았고, 탐심의 탈을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5절) 이어서 사람에게서 영광을 구하지 않다고 합니다.(6절) 그의 말은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들어와서 복음을 혼란하게 만든 사이비 방랑설교자들의 정체를 간접적으로 짚은 겁니다. 그들은 신자들이 듣기 좋은 아첨의 말을 자주 했습니다. 청중들은 그런 말을 듣기 좋아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경우로 말한다면 값싼 은혜, 값싼 구원이 그것입니다. 삶은 여전히 세속적이면서 종교적인 무늬만 그럴듯하게 하는 가르침입니다. 그들은 당연히 탐심으로 설교하고 목회를 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물질적인 대가를 받으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구했습니다. 사람들의 환호를 받는 데 마음을 썼습니다. 오늘 사회로부터 많은 지탄을 받고 있는 한국교회도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아첨과 탐심이 교회의 구석구석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안타깝지만 교회가 기복적이고, 세속적이고, 권력 지향적이고, 이기적이라는 비난을 부정하기 힘듭니다. 바울은 사이비 방랑설교자들과 달리 자신은 아첨하는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않았다고, 그것을 하나님이 증언한다고, 그리고 데살로니가 신자들이 알고 있다고, 그것이 바로 자신의 복음사역에 하나님으로부터 위임을 받은 증거라고 데살로니가 신자들에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바울이 호소하고 있는 이 대목은 중요하긴 하지만 참된 사역자와 거짓 사역자를 구분하는 절대적인 기준은 아닙니다. 아첨과 탐심이 어떤 건지 구별해내기도 어렵습니다. 어떤 종교지도자나 정치지도자의 말이 아첨인지 아닌지를 여러분이 구분할 수 있을까요? 지금 10월26일 보궐선거로 전국이 떠들썩합니다. 특히 서울시장이 그렇습니다. 오세훈 전 시장의 정치적 판단 잘못으로 막대한 돈이 들어가는 투표를 이미 한번 치렀고, 이번에 또 치러야 합니다. 지금 서울시민들은 왜 투표를 하게 되었는지를 별로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지 지금 후보로 나온 사람 중에서 누구의 말이 아첨인지 아닌지를 구분할 수 있습니까?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지만 정확하게는 하기 어렵습니다.
지금 바울은 자기가 아첨을 말을 하지 않았고, 탐심의 탈을 쓰지 않았다는 것을 자랑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신앙의 결과입니다. 그것은 열매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신앙의 근본입니다. 나무가 중요합니다. 바울은 지금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음을 위탁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아첨과 탐심을 예로 들었습니다. 4a절을 정확하게 읽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바울에게는 하나님께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복음 사역의 토대입니다. 이런 사람은 당연히 아첨의 말을 하지 않고, 탐심의 탈을 쓰지 않습니다. 사람의 영광을 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아니 이런 사람만이 억울하게 박해를 받아 고난을 당해도 하나님의 복음을 바르게 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인정받았다는 말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을까요? 여러분들이 더 생각해야 할 질문들입니다. 이런 질문을 하나로 묶어 대답을 한다면 하나님께 온전히 마음을 두는 것입니다. 이게 쉽지 않습니다. 사람은 주로 사람에게 마음을 쏟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고 무지하게 노력합니다. 모든 삶의 에너지를 거기에 쏟습니다. 그게 얼마나 허망한지 아시지요? 그게 결국 우리로 아첨과 탐심으로 빠지게 한다는 사실을 아시지요?
하나님께 마음을 두려면 우선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 사건에 영혼을 집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행하신 일이 무엇인지 깊이 있게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단순히 정보로 아는 차원이 아닙니다. 앎이 삶과 일치되는 큰 깨우침의 차원을 가리킵니다. 거기서 여러분은 생명의 빛이 영혼을 비춘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놀랍고 신비로운 경험입니다. 그 경험으로부터 여러분은 박해와 고난과 오해와 의심이 가득한 세상을 뚫고 나갈 영적인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온전히 마음을 두십시오!
0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