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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하나님은 누구인가?

하나님은 누구인가?

(딤전 6:11-19)

 

    돈의 지배와 하나님의 지배

     두 주일 전의 설교에서 디모데서는 목회서신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목회서신은 목회활동에서 관심을 기울여야 할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돈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사는 그리스도인들도 돈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돈 문제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공교롭게도 지난주일 설교의 성경본문인 누가복음 16장도 돈을 배경으로 합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해서 섬길 수 없다고 했습니다.(눅 16:13) 오늘 설교의 성경본문인 딤전 6:11-19절도 돈이 그 배경입니다. 먼저 딤전 6:17-19절을 보십시오. 부자들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지에 대한 설명입니다.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않도록 가르쳐야합니다. 나눠주기를 좋아하고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고 했습니다. 본문 앞 구절인 딤전 6:3-10절도 부한 자에게 대한 가르침입니다. 9절에서 부자가 되려는 사람들은 시험과 올무와 욕심에 떨어진다고 했고, 10절에서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이며, 돈을 탐하는 사람들은 믿음에서 떠나게 된다고 했습니다. 굉장히 직설적인 표현입니다.

     이런 말씀이 여러분에게는 어떻게 들립니까? 여러 가지 대답이 가능합니다.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저런 가르침대로 살 수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돈이 완전히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한다고 해서 이상한 게 아닙니다. 또 어떤 분들은 부자가 될 필요는 없지만 세상에서 고생하지 않으려면 어느 정도는 돈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겠지요.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분들도 많을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나님을 잘 믿으면 부자가 되는 거 아니냐 하고 말입니다. 아주 노골적으로 기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 월 1천만 원 십일조 헌금을 드릴 수 있는 사람들이 10명만 나오게 해 주십시오.” 많은 돈으로 하나님의 일을 크게 하고 싶다는 마음을 담은 거라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있지만 돈과 재물에 노예처럼 매달린 생각이라면 아예 무시하는 게 좋습니다.

     돈이 지배하는 사회구조와 교회질서를 개인들이 넘어서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것은 인격과도 상관이 없습니다. 어쩌면 신앙과도 상관이 없을지 모릅니다. 인격과 신앙이 좋아도 돈의 지배를 피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11절에서 젊은 디모데에게 이런 것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라고 하면서 12절에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영적으로 파멸에 빠지지 않으려면 믿음으로 투쟁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돈의 지배를 받지 않는 일이 간단하다면, 마음먹는 것으로 해결된다면, 기도로 해결된다면 그렇게 ‘싸우라’고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돈을 우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에서는 돈이 못하는 일이 없습니다. 돈이 신처럼 숭배 받고 있습니다. 돈을 대항해서 싸우면 십중팔구는 집니다. 아니 백전백패라고 해야 할 겁니다. 우리의 싸움은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입니다. 다른 세계에 들어가야 합니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작은 것으로 싸우는 차원에서 삶의 참된 의미를 생각하는 어른의 세계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그런 세계로 나온 사람들입니다만 영적인 긴장감을 놓치는 순간에 다시 어린아이의 세계로 미끄러져 들어갑니다. 신앙의 근본에 두 발을 굳게 딛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통치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마치 전기에 감전되듯이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딤전 6:10절이 말하듯이 돈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동적으로 그렇게 됩니다.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돈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말은 그렇게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지배를 별로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형식적으로 교회에 다니는 것으로는 실제 삶에서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것이 보장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것은 곧 돈의 지배를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문제들이 사람에 따라서 조금씩 차이가 납니다. 어떤 분은 평소의 삶에서 하나님을 전혀 의식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이해타산과 자신의 감정을 만족시키는 것에만 몰두합니다. 어떤 분은 경건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지속되기도 합니다. 후자의 삶이 더 바람직하겠지요. 그렇지만 경건의 훈련이 세속적일 경우도 많습니다. 경건훈련을 통해서 자기를 성취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종교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경건훈련도 필요하기는 하지만 경건의 내용이 무엇이냐 하는 게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도 필요하지만 하나님이 누구냐를 아는 게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본문 15,16절에서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여덟 가지 속성으로 설명하겠습니다. 바울이 이것을 말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아는 데서만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선한 싸움을 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속성 여덟 가지

     1) 때가 이르면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아직은 나타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이 말이 이상하지요? 이상할 것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나타나십니다. 그 이전에는 부분적으로만 나타나십니다. 지금 우리가 세상을 부분적으로만 알듯이 말입니다. 바울은 고전 13:9, 10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지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상은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도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곧 죽게 될 것이고, 땅에 묻혀 썩고 원소로 변할 것입니다. 아직은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실체가 드러나는 순간이 바로 종말입니다. 그 마지막 때 우리도 하나님 안에서 완성될 겁니다.

     2) 하나님은 복되십니다. 이 말은 하나님으로부터만 복이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복은 복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걸 생각해 본적이 있으신가요? 우리가 복이라고 생각하고 매달린 것들은 경우에 따라서 우리에게 화가 되고, 기껏해야 순간적인 자극만 줄 뿐입니다. 하나님의 복은 이런 것과 차원이 다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은밀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복을 선물로 주십니다. 이런 말들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공허하거나 막연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복을 받는 게 좋지 확인할 수 없는 복을 기다리는 것은 별로라고 말입니다. 그런 생각은 하나님이 복되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복의 신비를 모른다는 증거입니다.

    3) 하나님은 유일한 주권자이십니다. 이 말은 하나님만이 참된 능력자라는 의미입니다. 성서가 기록될 때 사람들은 로마 황제를 주권자로 생각했지만 그것은 큰 착각입니다. 황제는 임시로 빌린 힘을 행사할 뿐입니다. 자신의 힘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면 그 순간에 그의 영혼은 죽습니다. 황제처럼 행세하는 이 세상의 힘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만 참된 능력이 있습니다.

     4) 하나님은 만왕의 왕이시고 만주의 주이십니다. 이 말은 더 긴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성서시대에 만인지상이었던 왕들 중의 유일한 왕이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의 왕들보다 상대적으로 더 높은 지위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 위에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5)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만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바꿔 말하면 영원하신 존재가 곧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모두 유한합니다.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는 죽습니다. 생명체만이 아니라 돌과 흙과 물도 역시 유한합니다. 지구의 나이는 대략 45억 살입니다. 앞으로 이런 정도의 세월이 지나면 지구는 태양과 함께 사라집니다. 하늘의 수많은 별들도 생겼다가 사라지곤 합니다. 모든 것은 죽습니다. 죽지 않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만 죽지 않습니다. 그분만 영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영원하다고 말은 할 수 있어도 그것이 무엇인지 완전하게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이 없는 영원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런 세상과는 질적으로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물속에 사는 고기들이 뭍의 세계를 완벽하게 알 수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죽음 너머에서 존재하시면서 이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죽음의 운명에서 건져내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6) 하나님은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십니다. 빛은 절대적인 세계를 가리키는 메타포입니다. 고대인들은 빛을 내는 태양을 절대적인 존재로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물리학적인 차원에서도 옳은 이야기입니다. 태양 빛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면서 동시에 아무도 태양에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우리로 세상에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근원이지만 우리가 가까이 가도록 허락되지 않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호흡처럼 우리와 가까운 분이지만 동시에 도저히 근접할 수 없는 태양과도 같은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와 하나가 되어주시면서 동시에 완전히 다른 분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존재가 가능할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는 빛이십니다.

     7) 어떤 사람도 하나님을 보지 못했고, 볼 수도 없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일곱 번째 속성은 하나님이 불가시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착각을 한 것이든지 속이는 것입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반면에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볼 수 있습니다. 공기가 보이지 않지만 현미경으로 보면 보입니다. 전기와 소리가 보이지 않지만 기계장치로 확인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만은 확인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감각능력을 초월해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죽는 존재는 죽지 않는 존재를 볼 수 없습니다. 여기 코끼리 한 마리가 있습니다. 세균 한 마리가 코끼리 등에서 붙어 있습니다. 세균에게 코끼리가 보일까요? 코끼리는 세균에게 불가시적인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보이게 존재한다면 얼마나 시시할지 모릅니다. 그런 분은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앞으로 나타나실 그분을 기대하십시오.

     8) 그에게만 존귀와 권능을 돌려야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속성이기도 하고, 또한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인이 취해야 할 태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만이 존귀와 권능을 받아야 할 분입니다. 다른 것들이 존귀와 권능을 받으려고 할 때 불행한 일이 벌어집니다. 존귀와 권능은 일종의 칼과 같습니다. 그 칼을 철부지 아이들이 사용하면 사고가 일어납니다. 한 국가의 대통령에게도 많은 권한이 주어집니다. 국가의 엄청난 세금을 집행할 수도 있고, 국가 기관의 책임자를 선정할 수도 있습니다. 자격이 안 되는 사람이 대통령의 권한을 쥐게 될 경우에 불행한 일을 피할 수 없습니다. 존귀와 권능은 오직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우리는 그분에게만 존귀와 권능을 돌려야 합니다.

     저는 위에서 디모데전서가 전하는 하나님의 여덟 가지 속성을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이 누군지 좀더 가까이 느낀 분들이 있을 겁니다. 다행입니다. 앞으로 신앙의 연륜이 깊어지면서 하나님의 통치를 더 가깝게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거꾸로 더 복잡해져서 뭐가 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거나 하나님이 너무 멀게 느껴진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왜 그럴까요? 한 가지만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에 대한 고정관념이 너무 강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동시에 세상의 삶에 대한 고정관념이 너무 강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아마 후자가 더 큰 이유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세상이 요구하는 조건을 채워야만 행복하다는 고정관점 말입니다. 그것은 설교 앞부분에서 말한 돈에 의한 지배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런 고정관념이 점점 강해지고 있습니다. 물먹는 하마처럼 우리 모두의 영혼을 잡아먹고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하나님은 관심의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설명이 멀리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이 젊은 목회자 디모데에게 공연히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긴장감이 없으면 우리의 영혼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은 돈의 지배로부터 하나님의 지배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선 하나님에 대한 관심을 높이십시오. 세속 사회에서 쉽지 않겠지만, 하나님 자체를 아는데 여러분의 삶을 투자하십시오. 시인이 시에 영혼을 기울이듯이 하나님께 온전히 영혼을 기울이십시오.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그럴 때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응답하실 것이며, 거기서 여러분의 영혼은 생기를 얻을 것입니다. (성령강림절 후 열여덟째 주일, 9월26일) 0926.hwp

 

 

 

 

 

디모데전서 6: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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