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구원을 보리라!
눅 3:1-6, 대림절 둘째 주일, 2015년 12월6일
1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2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3 요한이 요단 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4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5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6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2015년 한 해가 이제 한 달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빠르게 지난다는 걸 이렇게 일 년의 마지막 달이 되면 누구나 실감합니다. 국내외에 금년에도 크고 작은 일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기분 좋은 일들도 물론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일들이 더 많았습니다. 국내외를 가릴 거 없이 조용할 날이 없었습니다. 2천 년 전 예수님이 태어나고 자라고 활동하던 시대도 비슷했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로부터 시작해서 전쟁, 테러, 종교와 정치의 결탁, 대제사장 세습 문제 등등, 지금과 별 다를 게 없는 사건과 사고가 일상처럼 일어났습니다. 오늘 제3 독서인 눅 3:1,2절에는 당시 역사의 중심에 섰던 인물들이 열거됩니다. 로마 황제 디베료, 유대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 갈릴리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 이두래 분봉왕 헤롯 빌립, 아빌레네의 분봉왕 루사니아, 그리고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입니다. 당시에 정치와 종교 영역에서 이름은 날리던 실력자들입니다. 이들이 다 예수님의 운명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습니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 시기가 대략 기원후 30년 어간입니다.
이사야와 요한
예수님보다 먼저 활동하기 시작한 인물은 세례 요한입니다. 누가복음 기자는 세례 요한에 관해서 많은 이야기를 전합니다. 출생 이야기부터 예사롭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출생하듯이 세례 요한은 가임 기간이 지난 여자 엘리사벳의 몸을 통해 예수님보다 여섯 달 먼저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보다 먼저 출가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습니다. 요한은 대중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습니다. 요단강에 나가서 그에게 세례 받으려는 사람들이 줄을 섰습니다. 예수님도 그에게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요한은 불을 토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사람들로 회개하라고 다그쳤습니다. 그의 강력한 카리스마에 사람들은 요한이 그리스도, 즉 자신들을 도탄에서 구해줄 메시아가 아닌가 하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그는 동생의 아내인 헤로디아와 결혼한 헤롯 안티파스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다가 결국 참수형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누가복음은 3:4절에서 선지자 이사야의 말을 인용하면서 세례 요한을 가리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규정했습니다. 이게 잘 맞아떨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세례 요한은 주로 요단 광야에서 지냈습니다. 마태복음의 설명에 따르면 요한은 광야에서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다고 합니다. 광야는 문명과는 거리가 먼 곳입니다. 권력과도 거리가 멀었습니다. 흙, 돌, 먼지, 하늘, 구름, 야생화와 들짐승이 연상되는 지역이 바로 광야입니다. 사람이 살만한 곳은 아닙니다. 누가 그런 곳으로 가겠습니까? 주로 범법자들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유행하던 수입 영화는 총잡이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총잡이로 살다가 살인범이 되면 광야로 도망가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로마 식민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에 무력으로 저항하기 위해서 광야로 나가는 혁명가들도 있었습니다. 기독교 역사에는 사막의 교부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긴밀한 관계로 들어가기 위해서 사막이나 광야로 나갔습니다. 광야로 나간 사람은 백척간두와 같은 상황에 몸을 던진 겁니다. 더 이상 물러날 데가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영혼의 소리를 듣고 그 들은 소리를 외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인 세례 요한에 대해서 오늘 본문 눅 3:4-5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이 말씀은 누가복음 기자가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인 사 40:3-5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사야는 세례 요한보다 6백년쯤 전인 기원전 6세기에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그 시대가 이스라엘 역사에서는 매우 비참할 때였습니다. 보통 바벨론 유수라고 합니다. 기원전 587년에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서 무너졌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고대 역사에서 패전국은 ‘제로’(zero)로 떨어지고 승전국은 ‘섬’(sum)을 얻습니다. 예루살렘에 살던 지도급 인사들은 모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왔습니다. 그들이 그곳에서 어떤 굴욕을 당했을지 긴 설명이 필요 없을 겁니다. 거기서 생존하려면 바벨론의 질서에 순종해야만 합니다. 생활에서 실제로 당하는 어려움도 어려움이지만 하나님의 선민으로 자처하던 사람들이 바벨론의 우상을 섬겨야만 하는 상황이 더 큰 어려움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사야는 자신들이 곧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돌려보내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사야는 시적 언어로 ‘왕의 행차’처럼 묘사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사로잡혀 온 자신들이 긴 행렬을 이루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장면을 왕의 행차로 묘사한 것입니다.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 있는 바벨론에서 사해 근처의 예루살렘으로 가려면 지금의 시리아와 이라크 지역인 광야를 통과해야 합니다. 거기에는 아직 길이 없습니다. 그러니 길을 내야 합니다.
그 지역에 포로 귀환 행렬을 위해서 길을 낸다는 것은 거대한 프로젝트입니다. 지금의 토목 기술로도 오래 걸리는 사업인데, 2천6백 년 전이니 전국가적 역량을 투자해야만 할 겁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이들에게는 그런 역량이 없습니다. 길을 내라는 것도 시적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실 일을 준비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은 무엇인가요? 이사야는 그것도 시적인 언어로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읽었지만 다시 읽어도 감동이 줄어들지 않는 문장이라서 제가 한 번 더 공동번역으로 읽겠습니다. “모든 골짜기는 메워지고 높은 산과 작은 언덕은 눕혀져 굽은 길이 곧아지며 험한 길이 고르게 되는 날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진다는 말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당시 세계는 바벨론 제국의 질서에 의해서 작동되고 있었습니다. 힘이 있는 사람은 높은 자리에 서고, 없는 사람은 낮은 자리로 내려가야 합니다. 황제로부터 시작해서 저 아래 노예까지 위계질서가 탄탄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모두가 높은 자리로 올라서기 위해서 애를 쓰지만 그게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게 아닙니다. 이미 높은 자리에 올라간 사람은 아래 사람이 올라오는 걸 ‘사다리 걷어차기’ 식으로 방해합니다. 이런 제국의 질서에서도 살만한 사람은 다 삽니다. 이런 질서가 자기의 삶에 더 좋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골짜기 밑바닥까지 내려간 사람에게 이 세상은 지옥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 바닥인생에 떨어지지 않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인간다운 삶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런 상황을 그냥 두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사야는 광야에서 외치는 사람의 입을 빌려 이 바벨론 제국의 모든 억압적이고 악한 질서를 하나님이 허물어뜨린다고 외쳤습니다.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 진다고 말입니다. 모든 이들이 그런 순간을 볼 것이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기자가 이사야 선지자의 이 예언을 인용한 이유는 자기가 살던 시대가 바벨론 포로 시대와 다를 게 없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의 시대는 로마 제국이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었을 때입니다. 이스라엘도 로마의 식민 통치를 받았습니다. 빌라도 총독은 전권을 손에 쥐고 유대를 통치했습니다. 어둠의 시절입니다. 로마가 요구하는 것을 순순히 따르면 최소한 생존은 보장되겠지만 그걸 거스르면 잔혹하게 제압당해야만 했습니다. 그것의 가장 극단적인 경우가 예수님이 당하신 십자가 처형입니다. 누가복음 기자는 지금 이 세상이 완전히 새로워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누가복음 기자는 이사야의 설교를 인용하긴 했지만 모든 걸 이사야 선지자와 똑같이 생각하는 건 아닙니다. 바벨론에서 예루살렘까지 길이 뚫려 포로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이사야는 여호와의 영광이라고, 즉 하나님의 구원이라고 생각한 반면에 누가복음은 예수님을 바로 하나님의 구원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는 말씀은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구원, 즉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라는 의미입니다. 난지 팔일밖에 되지 않는 아기 예수를 예루살렘 성전에서 본 시므온은 눅 2:30절에서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다.’고 외칩니다. 이 주제는 신약성경 전체가 핵심적으로 전하려는 메시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구원이라고, 즉 예수 그리스도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실현되었다고 말입니다.
이런 주장에 근거가 있을까요? 우리는 이런 문제를 대할 때 냉정해져야 합니다. 예수 이후 세상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보십시오. 보는 관점에 따라서 다르긴 하겠지만 별로 달라진 게 없습니다.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산이 낮아지고 굽은 길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해지는 것처럼 인간 세상이 정의로워질 것이라고 했는데,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인간 세상은 여전히 그대로입니다. 이사야 시대의 바벨론 제국이나 예수 시대의 로마 제국과 별 다를 게 없는 또 다른 제국과 그런 질서가 지금도 이 세상을 당근과 채찍의 원리로 지배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거대 기업이 제국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여전히 산은 높고 골짜기는 깊은 세상입니다. 대한민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죽 했으면 ‘헬 조선’이라는 말이 나왔겠습니까. 이처럼 이 세상에 달라진 게 없는데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구원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기독교인 개인의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뒤로 달라진 게 있나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을까요? 더 도덕적이고 더 양심적이고 더 자기희생적인 사람들일까요? 아무도 여기에 ‘그렇다.’는 대답을 하기 어려울 겁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이나 안의 사람들이나 겉모양만 보면 다를 게 별로 없습니다. 한국교회 전체를 놓고 봐도 여전히 깊은 골짜기와 높은 산이 그대로입니다. 엄청나게 큰 교회와 최소한의 생존도 어려운 교회가 똑같이 예수 믿는 사람들의 교회라는 사실은 블랙코미디입니다. 저는 한국교회의 이런 부익부빈익빈 현상을 볼 때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눅 16:19-24)가 생각납니다. 부자 교회는 지옥에 떨어지고 말 겁니다. 아니 현재 이미 지금의 한국교회 상황 자체가 지옥과 다를 게 없습니다. 자신이 지옥처럼 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게 바로 지옥이니까요.
별로 달라진 게 없다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말씀을 폐기처분해야만 하는 걸까요? 아닙니다. 구원은 인간이 구원받아야 처지라는 걸 전제합니다. 이사야 시대는 그것이 바벨론 포로였습니다. 바벨론 제국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되어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처럼 얼마 후에 바벨론이 패망하자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축하고 다윗 왕조를 재건했지만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세상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습니다. 바벨론을 이어서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가 제국으로 등장하면서 주변의 작은 나라를 지배했습니다. 그런 역사가 지금까지 계속 반복합니다. 이런 방식의 구원은 일시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기자를 비롯해서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근원적인 구원을 경험했습니다. 그 어떤 조건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구원 경험이었습니다. 누가복음 기자는 이사야가 말한 그 예언이 예수님에게 이르러서 온전하게 실현된 것으로 보고 사 40:5절을 인용해서 과감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눅 3:6).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
예수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누가복음 기자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볼 것이라고 선포한 것인가요? 더 근본적으로,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는다는 게 구체적으로 무슨 뜻일까요? 여러분이 이미 알고 있을 답을 제가 설명할 테니 맞는지, 확인해보십시오. 우선 예수님의 운명에서 핵심적인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달리셨고,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우리는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 이것이 곧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행하신 구원입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기독교인들은 없지만 실제로 이해하고 경험하고 누리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떻습니까? 죄와 죽음의 절망에 여전히 묶여 있나요? 벗어났나요? 대답해보십시오. 너무 직설적인 질문이라서 대답하기가 불편할 겁니다. 그러나 저는 이게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는 자기 자신이 자기를 완성하려는 욕망이고, 죽음은 죄의 결과로 벌어지는 하나님과의 단절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로 이런 욕망에서 빠져나올 수 있으며, 예수의 부활로 생명 자체이신 하나님과 하나 된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기독교인 이전에 인간으로서도 인간답게 살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죄와 죽음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죄와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자유로워졌느냐는 질문 앞에서 선 듯 ‘그렇다.’고 답변하지 못하는 분들을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그런 주제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이 없는 분들이고, 다른 하나는 오래 신앙생활을 했는데도 그 문제가 잘 해결되지 않아서 힘들어하는 분들입니다. 앞의 분들에게는 제가 할 말이 없습니다. 영혼이 온통 세속적인 것에 빠져 있어서 영혼에 관계된 것은 무슨 말을 해도 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후자에 속한 분들에게만 제가 필요한 대답을 드릴 수 있습니다. 죄와 죽음의 문제가 속 시원하게 해결되지 않는 이유는 여러분들에게 특별히 신앙적인 진정성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은 한두 번의 경험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평생, 즉 숨이 넘어가는 순간까지 붙들고 있어야 할 신앙적인 화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화두를 붙들고 꾸준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은 마치 알에서 깨어난 어린 새가 날갯짓을 연습하다가 어느 날 저 절벽 아래나 높은 나무 아래의 허공으로 자기 몸을 날리듯이 하나님의 무한한 품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게 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는 오늘 본문의 말씀이 현실로 경험되는 순간입니다. 그 순간이 바로 오늘이기를, 그래서 대림절의 기쁨과 평화가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하기를 빕니다.
0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