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긍휼하심
롬 11:1-2(전), 29-32, 성령강림 후 11주, 2020년 8월16일
신약성경은 전체가 27권입니다. 그중에 가장 중요한 책을 고르라면 여러분은 어떤 성경이 머리에 떠오릅니까? 망설여질 겁니다. 꼭 골라야 한다면 저는 로마서를 손에 들겠습니다. 4세기 위대한 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는 롬 13:12절을 읽고 크게 변화되었고, 16세기 마틴 루터는 영혼의 암흑기를 지내다가 로마서에서 복음의 빛을 발견했으며, 20세기 칼 바르트는 『로마서 주석』을 통해서 신학자로서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습니다. 로마서가 특별히 중요한 이유는 기독교 신앙을, 즉 복음을 유대교와의 관계에서 체계적으로 해명한 유일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설교 본문으로 선택한 말씀이 바로 그 로마서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10장에서 율법의 행위와 업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 이 믿음으로만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칭의(justification) 사건에는 착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냐, 지식이 높은 사람이냐 없는 사람이냐,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냐 율법 없이 사는 사람이냐 하는 구분이 없습니다. 인간의 업적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매우 과격한 주장입니다. 율법을 삶의 중심으로 삼았던 이스라엘은 바울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반대로 율법과 상관없이 살았던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였습니다.
이 대목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신 것일까요? 롬 11:1,2(전)절이 그런 상황을 가리킵니다. 답은 “아니오”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자신이 이스라엘 사람이고,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열두 지파 중에서 가장 용맹했던 베냐민 지파에 속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다시 밝혔습니다. 그는 확신에 차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 ” 바울은 무슨 근거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요?
이 문제를 정확하게 알려면 초기 기독교가 유대교와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를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서의 보도를 통해서 예수의 십자가 죽음의 책임이 유대인들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이 지난 2천 년 유럽 역사에서 지배적이었습니다. 히틀러가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죽인 데에는 유럽의 반유대주의가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유대인들이 로마 제국의 공권력에 의해서 억울하게 죽은 예수의 운명을 적극적으로 방어해내지 못한 책임은 면할 수 없겠지만 그 죽음의 장본인이라는 주장은 정당하지 않습니다. 로마 교회의 가장 중요한 신앙고백인 사도신경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한 책임을 유대인들이 아니라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로 돌립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하던 기원후 56년쯤에 기독교는 유대인들을 향한 선교보다는 이방인들을 향한 선교에 주력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을 완전히 배척하지는 않았으나 기꺼이 받아들이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은 기원후 70년에 일어난 예루살렘 파멸을 기점으로 더 악화해서 유대교와 기독교는 완전히 분리되었습니다. 1세기에 걸친 이런 과정을 보면, 그리고 바울이 이방인 사도로 인정받았다는 사실을 전제하면 당연히 하나님이 유대인들을 버렸다고 말해야 옳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근거가 무엇일까요? 여전히 유대교에 미련이 남아서 그럴까요? 아니면 로마에 사는 상당수의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전략적 차원에서 꺼낸 발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신학적이면서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유대교 신학에도 정통했습니다. 당시 유대교의 위대한 스승이었던 가말리엘에게서 배웠습니다. 그가 로마서만이 아니라 고린도에 보내는 편지나 갈라디아에 보내는 편지에서 어떤 사안을 말하든지 핵심은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지금 본문에서 유대인들 문제를 다루면서도 정작 말하고 싶은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롬 11:1,2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인 유대 민족을 버리지 않았다고 한 다음에 롬 11:2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부하는 유대민족을 하나님이 버리지 않았다는 바울의 확신에는 하나님에게 “후회하심”이, 즉 잘못하심이 없다는 사실에 근거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오래전 유대인들의 조상이라 할 아브라함을 선택하고 부르셨으며, 번성케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유대민족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은 부정될 수 없다고 바울은 생각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어지는 30절부터 유대인들의 불순종이,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임하게 되는 계기라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이방인은 원래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은 겁니다.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지 않았으면 이방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바울은 생각했습니다. 틀린 생각이 아닙니다. 예수의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 복음 전도자들은 초창기에 유대인들만을 선교의 대상으로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 복음을 받아들였다면 제자들과 복음 전도자들은 굳이 이방인들에게로 가지 않았을 겁니다. 바울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이방인들에게 임한 긍휼로 이제는 유대인들도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얻게 된다고 말입니다. 처음에는 이방인이 불순종했고, 뒤에는 유대인이 불순종했습니다. 그런 불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들 모두에게 긍휼을 베풀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은 잘못되는 일이 없습니다.
사람의 불순종과 하나님의 긍휼하심의 신비로운 관계를 바울은 마지막 32절에서 압축해놓았습니다. 다시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우리말 개역개정 번역 성경은 거칠게 들립니다. 공동번역으로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불순종에 사로잡힌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 모두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이미 앞에서 핵심적인 내용은 다 말씀드렸습니다. 설명이 더 필요한 부분과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야 할 부분만 조금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든 사람을 불순종에 사로잡히게 하셨다는 표현은 불순종의 책임이 하나님에게 있는 것처럼 들립니다. 아닙니다. 불순종은 자유의지를 지닌 사람 자신의 선택이자 책임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그런 선택을 강제로 막지 않으신 것뿐입니다. 아담과 이브의 선악과 선택을 하나님이 강제로 막지 않으셨던 거와 같습니다. 이와 비슷한 일들은 구약성경에 자주 나옵니다. 대표적으로 애굽의 바로는 모세를 통해서 전달된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했습니다. 노예처럼 살던 히브리인들에게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를 성경 기자는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다.”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불순종에 사로잡힌 자가 되게 하셨다는 문장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불순종했다는 의미입니다. 쉽게 바꾸면 모든 사람이 이기적으로, 자기중심적으로, 교만하게, 더 거칠게 표현하면 잘난척 하면서, 또는 자기에게 매달려서 산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불순종했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심판해야 합니다. 이런 심판에 대한 말씀은 구약의 선지자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선지자가 말하는 심판도 좋은 말씀이나 바울은 선지자들의 영적인 안목을 뛰어넘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불순종을 심판하지 않고 오히려 긍휼을 베푸실 기회로 삼으셨습니다. 이게 말이 되나요? 아예 처음부터 긍휼을 베풀어서 불순종에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게 옳은 거 아닐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런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보셨는지요.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무엇인지에 관해서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KJV을 비롯한 대부분의 영어 성경은 긍휼을 명사 mercy라고 번역했고, 루터 성경은 erbarmen이라는 동사로 번역했는데, 그 의미는 똑같이 자비입니다. 아무런 자격이 없는데도 특별한 대우를 받을 때 자비를 얻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은혜와 자비와 긍휼하심은 신학적으로 같은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를, 또는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에게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일상적인 말로 바꾸면 자신은 행복하게 살 능력이나 자격이 충분하다고 여기기에 행복하지 못한 겁니다. 거꾸로 자신이 불순종한다는 사실을 직면할 때 하나님의 자비를, 즉 궁극적인 위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 교회력에 따라 주어진 복음서 말씀은 마 15:21-28절입니다. 예수는 이방인들이 주로 사는 두로와 시돈 지역으로 갔습니다. 가나안 원주민인 한 여자가 예수를 향해서 소리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예수는 그녀에게 모욕적으로 들릴만한 발언을 하십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이런 표현은 일종의 속담이나 격언으로 보입니다. 이 여자는 대담한 발언을 이어갑니다.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발언이었습니다.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귀신 들렸던 그녀의 딸이 나았습니다. 가나안 토착 종교를 따랐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가나안 여자는 예수에게 자기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했고, 개 취급을 당해도 좋다고 말한 겁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에만 전적으로 의존하겠다는 태도입니다. 그런 태도야말로 예수가 말한 큰 믿음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이 이방인 여자는 믿는 자의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이와 반대로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자랑하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 앞에서 믿음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는 그들을 위선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들 앞에서는 예수의 선한 능력이, 즉 긍휼하심이 나타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말을 심리적인 열등감이나 자학으로 보면 곤란합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을 그렇게 평가합니다. 기독교인들은 무슨 죄를 그렇게 많이 지었기에 예배드릴 때마다 사죄 기도를 드리냐고, 인생살이에서 자신감이 부족한 거 아니냐고 의심합니다. 그런 흔적이 기독교인들에게 없지 않습니다. 삶을 두려워합니다. 지옥에 떨어질지 모른다고 걱정합니다. 그래서 많은 부흥 강사들이 거기 모인 신자들에게 “당신들은 죄인들이야,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져.”라고 외칩니다. 심리적인 압박감을 주는 겁니다. 신자들은 그런 분위기에 사로잡혀서 눈물 콧물 흘리면서 회개합니다. 감정이 솟구치면서 심리적인 카타르시스를 경험합니다. 순간적으로나마 기분이 좋아지기는 할 겁니다. 어릴 때는 아버지나 어머니가 큰소리만 쳐도 무서워하고, 또는 부모가 자기 기분에 따라서 던지는 "우리 이쁜 공주"라는 말만 들어도 기분이 좋아지는 경우와 같습니다. 나이가 들면 전후 사정을 다 파악하여 부모와의 관계가 성숙하게 형성되듯이 신앙적으로 어른이 되면 단순히 심리와 감정에 떨어지지 않고, 그런 현상이 뒤따라오기는 하나,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실질적으로 경험함으로써 삶이 깊어집니다.
우리가 성숙하게 경험해야 할 하나님의 가장 귀한 속성의 하나가, 아니 가장 궁극적인 속성이 긍휼하심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불순종을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얻는 계기라고, 하나님이 인류 역사를 그렇게 끌어간다고 대담하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E. 케제만은 『로마서』 주석에서 이 대목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은혜는 진노의 영역 속으로 뚫고 들어가며, 복음의 능력은 불순종 속에서 드러난다.” 저도 하나님의 긍휼하심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려고 노력합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이게 실제 우리의 삶에서 어떻게 경험되는지를 두 차원으로 나눠서 설명하겠습니다.
1) 하나는 사회적인 차원의 삶입니다. 여러분은 오늘의 세상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세상이 정의롭고 평화로우면서 바람직하게 작동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겁니다. 구석구석이 병든 듯이 보입니다. 모두가 싸우고 미워하고 파렴치하고 뻔뻔하게 사는 것 같습니다. 특히 최근 한국 사회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이후로 극과 극으로 대립하는 중입니다. 양쪽이 서로 미워하고 비난합니다. 지금의 문 대통령은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 대통령직을 수행하고 있는 셈입니다. 국민이 두 편으로 나뉘어서 감정적으로 격해있기에 아무리 잘해도 한쪽은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남북한도 여전히 극과 극으로 대립하고 있습니다. 해방 75주년인 올해는 분단 75주년도 됩니다. 이런 일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로 인해서 우리의 삶이 곤두박질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눈여겨봐야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경험할 기회이기도 합니다. 두 번째 차원의 삶을 말하면 이게 무슨 뜻인지 전달될 겁니다.
2) 우리 삶의 개인적인 차원에도 불순종이 일어납니다. 불행한 사건들이 피해가지 않습니다. 개인의 운명에 불행이 닥쳐도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삶의 정수를 경험하게 하십니다. 더 근본적이고 생명의 깊이로 들어가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앞을 비추는 등불과 같습니다. 등불은 낮보다 밤에 더 빛납니다. 모두 낮처럼 살면 좋겠으나 종종 밤 같은 순간이 오며, 궁극적으로 죽음이라는 완전한 밤이 옵니다. 그런 밤에 하나님은 더 밝은 빛으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일상에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전적으로 매달리고 있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재산과 명예와 건강과 취미와 자녀와 학력 등등에 매달리는 사람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인생의 밤이 와도 빛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이게 참으로 이상한 겁니다. 똑같은 불행을 겪는데, 또는 똑같이 늙고 똑같이 죽음을 맞는데, 어떤 사람은 빛을 더 또렷이 느끼고, 어떤 사람은 그냥 어둠에 떨어질 뿐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더 분명하게 느끼고, 또 어떤 사람은 자기 상실감에 떨어집니다.
우리 교회 김*연 집사는 지난 8개월간 대장암 수술과 항암 치료를 받았습니다. 이제 12차 항암 치료가 끝나서 얼마 후면 집으로 돌아올 예정입니다. 요양원에서의 경험을 그림과 글로 남겼습니다. 그걸 대구성서아카데미 사이트에 차례대로 올리고 있습니다. 김 집사에게는 겉으로 볼 때 어둠과 같은 시간이었으나 내면적으로는 긍휼하심을 얻은 시간이었습니다. 요양원 생활이 아니었다면 이런 경험은 주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뾰족이 입술을 내미는 진달래와 매화봉오리, 웃음 띤 바위가 어마어마한 존재로 자신에게 다가왔습니다. 김 집사의 글 중에 한 문장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너무 잘 아신다. 어쩜 이리 예민하도록, 딱 맞는 선물을 그때그때 주시는지. 하나님의 섬세하심에 탄복, 감사합니다,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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