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나라와 영의 나라
요 3:1-8
일반적으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게 대해서 별로 호의적이지 않았
는데,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니고데모 좀 달랐습니다. 요한복음 19장 38
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한 다음에 니고데모는 아리마
데 요셉과 함께 예수님을 장사지냈습니다. 어떤 인물이 대중적인 인기를
끄는 중에는 사람들이 모이지만 그런 힘을 잃거나 죽은 다음에는 모두
흩어지게 마련인데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도 하지 못한 일을
기꺼이 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이면서 동시에 산헤드린 회원이었을 가
능성이 많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으로 분위기가 험
악했을 그 당시에, 유대의 최고 법정에 속한 사람으로서 신성모독 죄로
처형당한 예수님의 시신을 직접 수습했다는 것은 아주 특이한 행동입니
다.
이 니고데모가 어느 날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성서 주석학자
들은 가끔 니고데모가 왜 낮이 아니라 밤에 찾아왔는가에 대해서 서로
다른 의견을 내놓곤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니고데모가 주변의 시선을
의식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일단 그럴 수도 있겠지요. 특히 오늘
본문 앞 단락에 보도되고 있는 예수님의 '성전청결' 사건을 감안한다면
그럴 만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종교적인 주제로 가르침을 받으려
면 사람들의 왕래가 뜸한 밤이 적당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주변에는 이런 저런 이유로 사람들이 많이 모였으며, 특히 제
자들이 늘 주변에 진치고 있었기 때문에 낮에는 두 사람이 깊숙한 종교
적 대화를 나누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어쨌든지 외면적인 관점으로만 본
다면 적대적일 수밖에 없는 두 사람이 아주 자리를 함께 했다는 것은 범
상치 않은 사건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 만남의 형식만 그런 게 아니라
그 대화의 내용이 아주 특이했습니다.
니고데모의 질문
우선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의 첫 질문을 보도된 그래도 봅시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
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고서야 누가 선생님처럼 그런 기적들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2절). 니고데모의 이 말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를 지금 우
리가 모두 밝혀내기는 힘듭니다. 여기서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라는
표현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식한다는 것인지 아니면 단지 하나님의
능력을 가진 분으로, 영적인 능력이 다른 이들에 비해 탁월한 예언자로
믿는다는 것인지 정확하게는 구별이 안 됩니다. 아마 니고데모는 예수님
에게 일어난 사건들을 통해서 예수님이 일반적인 선생이 아니라 하나님
과 영적인 관계가 아주 깊은 분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훗날이라도 니
고데모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보도가 복음서에 없는 것을 보면 아
마 예수님의 정체에 대한 확신보다는 단순한 호기심에서 찾아온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니고데모가 바리새인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 문장은 예수님에게 대한 최대한의 경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이후에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시신
을 수습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오늘 이 니고데모의 첫 마디도 역
시 호의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우리가 사람을 판단
할 때 그 사람 자체를 보는 게 아니라 그 주변상황을 통해서 선입견을 가
질 때가 많은데, 이런 선입견은 틀릴 때가 적지 않습니다. 저 사람은 전
라도 사람이다. 저 사람은 경상도 사람이다. 저 사람은 어떤 어떤 집단에
속한 사람이다. 대충 이런 식입니다. 오늘 니고데모가 비록 바리새인이
었지만 예수님에게 열린 마음으로 대하고 있으며 끝까지 호의적이었다
는 사실에서 우리는 어떤 사람이 속한 집단만으로는 그 사람 자체를 충
분히 이해하기 힘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질문을 해체시킴
니고데모의 호의적인 방문을 받고 그의 그런 생각을 전해들은 예수
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3절). 우선 이 말씀은 니
고데모의 질문에 직접적인 대답은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니고데모는 하
나님 나라를 볼 수 있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서 물은 것이 아니라
단지 예수님에게 하나님이 함께 한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질문 속에 숨어 있는 의도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대답한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겉으로 예수님에 대해서 언
급하고 있기는 합니다만 더 밑바탕에는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판단할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고서야 누가
선생님처럼 그런 기적들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에서 일
어나는 일이 바로 예수님에게서 일어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지 알고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사람은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늘 자기를 나타내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니고데모도 역시 어쩔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아마 예수님에게
서 이런 대답을 듣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 자네가 잘 보았네. 그
런 것을 꿰뚫어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네가 훌륭하구먼." 그런데 예수
님은 뜻밖의 대답을 하십니다.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
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
래, 자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제법 아는 것처럼 말하지만,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결코 그 세계를 알 수 없네." 그래서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질문에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고 전혀 의외의 '새로 남'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그 당시에 최고의 지성이면서도 사회 지도층 인사
인 니고데모의 생각을 근본적으로 깨뜨렸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자기들
나름대로 인식론적 전통과 역사적 경험을 축적해놓은 유대인들의 생각
에 따라서 판단되는 게 결코 아니라는 도발이었습니다. 오늘 니고데모는
아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말한 것인데 예수님은 그 당연하다고 생각
한 것이 당연하지 않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 나라를
아는 것처럼 말하고 판단하고, 그런 구도에서 세상을 해석하고 재단하는
그 태도 자체를 부정한 것입니다. 물론 니고데모가 예수님에게 한 말은
전혀 불순하거나 의도적인 악의가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앞서
말한 대로 호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예수님 자신에게 호의적이
었다고 하더라도 그런 사유방식의 토대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해
체하신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데리다와 푸코 같은 프랑스 철학자들
의 해체주의(Deconstruction)의 원조일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삶에는 이렇게 근본이 잘못된 일들이 하나 둘이 아닙니다. 우
리는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중국의 만리장성, 그 이외의 여러 불가사의한
건축물을 보면서 그것을 건축한 왕들의 업적에 감탄을 금치 못합니다만
그런 모든 어마어마한 건축물들이 거의 한 두 개인의 욕망을 채우기 위
한 수단이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오히려 인류역사의 부끄러움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저는 역사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런 문제에 대해
서 더 이상 깊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인식과 판단에 근본적
인 오류가 없는가에 대해서 늘 예민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점을 말씀드리
는 것뿐입니다. 모래 위에 세우는 집은 크면 클수록 더 위험하듯이 우리
의 부실한 인식론적 토대 위에는 우리의 노력이 크면 클수록 더 위험해
집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우리는 이런 신앙적 사유의 토대에 대해서 질문해야
만 합니다. 교회당을 크게 짓는다거나 교인수를 늘리기 위한 여러 가지
이벤트가 과연 정당한 토대에서 나온 것인지 말입니다. 간혹 교회당 헌
당식이나 장로, 권사 취임식 같은 행사에 참석하게 되면 그 모든 일들이
인간적 발상에 불과한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때가 많습니다. 그들은
외적인 교회의 힘을 확대시키는 것이 일단 하나님의 일이라고 전제합니
다. 따라서 그런 일은 희생적으로 많이 할수록 하나님을 위한 것으로 해
석됩니다. 물론 순수한 마음으로 자기 재산을 바치는 행위 자체를 냉소
적으로 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순진한 마음은 그것대로 평가되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근본적인 생각의 한계와 오류를 정당화할 수는 없
습니다. 이미 사도 바울도 전재산을 내놓는다고 하더라도, 또는 자기 몸
을 불사를 정도로 희생한다고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
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고전 13장). 이처럼 기독교 신앙은 인간의 생각과
행동의 동기에 대해서 아주 철저하고 엄격합니다. 늘 근본을 날카롭게
들여다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호의적으로 접근하는 니고데
모에게 웬만하면 좋은 게 좋으니까 대충 넘어가도 됐을 텐데, 토대가 부
실한 그의 선입관을 깨부수듯이 말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말장난하듯이
말꼬투리를 잡으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사람의 생각을 근본에서 판단
하신다는 것입니다.
영의 나라
자기의 중심을 들여다보고 말씀하시는 예수님 앞에서 니고데모는 약
간 당황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다시 묻습니다. "다 자란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올 수야
없지 않습니까?"(4절). 새로 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니고데모가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거의 어린아이 같은 수준에서 어머니 뱃속 운운하고 있습니다. 혹시 모
르지요. 니고데모를 비롯한 그 당시 최고 지성인들이 이 예수님의 말씀
을 실제로 이해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습니다. 어쨌든지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이 나타내려는 그 세계에 비해서 훨씬 떨어지
는 수준에서 다시 반문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정작 하고 싶었던 말씀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며, 영에서 나온 것은 영
이다."(5,6절). 여기서 예수님은 '새로 나는 것'에 대해서 좀더 구체적으
로 설명합니다.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born again) 않으면 하나님 나
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입니다. 새로 난다는 것은 니고데모가 어머니
뱃속으로 들어갈 수야 없는 게 아닌가 하고 약간 도발적으로 질문한 것
에 대해서 물과 성령으로 새로워지는 것이라고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습
니다. 물은 씻기는 작용을 하며, 성령은 생명을 끌어가는 작용을 합니다.
불필요한 것을 완전히 씻어내고 오히려 생명의 힘에 의해서 새로워지는
것이 곧 새로 남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성령입니다. 그 영에 의해서 새로
워지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앞서의 말씀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본다고 표현하는데 반해서 여기
서는 들어간다고 되어 있습니다. 사실 똑같은 뜻입니다. 어떤 세계를 공
간적으로 들어가고 나오는 게 아니라 그 세계를 보는 것이 곧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컨대 베르디의 레크엠을 충분히 들을 수 있고, 그래서 그 진
혼의 세계를 볼 수 있다면 그는 곧 그 세계에 들어간 것입니다. 영의 나
라는 곧 영에 의해서 새로워진 사람만 볼 수 있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6절에서 매우 분명한 어조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며, 영에서 나온 것은 영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
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영의 나라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영으로 새
로워진 사람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은 곧 하나님의 나
라가 영의 나라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육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결코 영
의 나라를 알 수도 없고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중요한 것으로 언급하신 이 영은 무엇인가요? 하나
님 나라의 본질이라 할 영을 우리가 어떻게 인식할 수 있을까요? 이 대
목이 바로 설교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입니다. 이 영은 우리가 대면해서
관찰할 수 있도록 일종의 객체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사유하는
우리의 전 실존을 포괄하면서 초월해 있는 존재의 근거이기 때문에 우리
가 실증적으로 묘사해낼 수 없습니다. 흡사 하나님이 절대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조심스럽게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게 제일 현명합니다.
영과 바람
"새로 나야 된다는 내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 바람은 제가 불
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듣고도 어디서 불어 와서 어디로 가
는지를 모른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누구든지 이와 마찬가지다."(7,8절).
영에 대해서 말씀하시던 예수님이 바람 현상을 끌어들인 것은 매우 자연
스러울 뿐만 아니라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헬라어로 '프뉴마'로 쓰
고, 원래 히브리어로는 '루아하'라고 불리는 이 영이라는 단어는 '바
람'이라는 뜻도 갖고 있습니다. 고대인들은 영을 바람이라고 생각했습니
다. 그도 그럴 만 합니다. 봄바람, 여름바람, 가을바람, 겨울바람은 이 세
상의 모든 생명을 주관하는 힘입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귀에는 들
리는 이 신기한 자연현상이야말로 이 세상의 생명을 끌어가는 힘에 틀림
없다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
도 하나님 자신의 '숨'을 불어넣으셨다고 했습니다. 그게 '루아하'입니
다.
예수님은 루아하의 현상을 설명하면서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분다"고
했습니다. 우리 인간은 아무리 바람의 방향을 잡아내려고 해도 소리만
들을 수 있지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물론 오늘 최첨단의 기상 관측기계
는 바람의 방향을 미리 잡아내기는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바람에
대한 자연과학적인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기상관측
에 대해서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바람의 시적인, 종교적인 메타포는 분
명히 바람 자신의 자유에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아무리 알아내려고 해
도 알 수 없는 그 바람의 자유입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바람의 자유와 영으로 새로 난다는 게 무슨 관
계가 있습니까? 예수님은 "새로 나야 된다는 내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미리 말막음을 했습니다. 어머니 뱃속을 연상하지 말라고 말입
니다. 갑자기 거룩해지고 경건해지는 그런 이상한 현상을 머리에 그리지
말라고 말입니다. 영으로 새로 난다는 것은 그게 아니라 바람처럼 자유
롭게 활동하시는 영에게 자기 자신의 삶을 완전하게 위탁한다는 뜻입니
다. 예수님은 이렇게 바람과 영을 연결해서 니고데모에게 설명했습니다.
영의 나라로 열린 마음
우리는 여기서 조금 더 생각을 발전시켜야 합니다. 도대체 바람처럼
활동하는 영에게 자신의 삶을 맡긴다는 게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일까
요? 지금 우리들도 툭하면 "우리의 뜻이 아니라 성령의 뜻대로 따르기를
원한다"는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이런 기도가 곧 예수님이 바람과 영을
하나로 묶어서 설명하고 있는 오늘 말씀과 상통하는 걸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이런 사실을 충분하게 인식하고만 있다면 말
입니다. 그러나 대개 우리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깊이까지 들어가지
않은 상태에서 상투적으로 기도할 뿐입니다.
이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오늘 본문의 앞부분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앞서 저는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일들이 일어난다는 니고데모의
진술에는 하나님의 일을 이미 익히 알고 있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설명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시기에 이들의 생각은 곧 근원을 알 수 없
는 바람을 잡으려는 노력에 불과했습니다. 자신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서
쌓아놓은 정신적, 문화적 전통과 업적이 바로 진리이며, 따라서 하나님
을 그 안에 담아낼 수 있으리라는 망상에 불과했습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예수님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
다. 무엇이 육이며 무엇이 영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생각에 갇혀
있는 사람은 여전히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인간의 생각과 거기서 나오
는 모든 문화와 전통을 뛰어넘어 자유롭게 생명의 역사를 이끌어 가는
영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 곧 영으로 새로 나는 것입니다. 조금 쉽게
설명해볼까요? 지금 우리는 돈이 많아야 행복하다거나 과학이 발전해야
잘 살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는 아들이 있어야 한다거나 그 자식
들이 출세해야만 행복할 것인 양 확신하고 있습니다. 물론 생각이 좀 있
는 사람들은 이런 문제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좀더 근본적인 차
원에서 본다면, 오늘 우리는 대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이런 형식의 삶
만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다른 방식으로 우리에
게 행복이 올 수는 없을까요? 우리의 계산과는 다른 계산으로 이 지구와
우주가 움직이고 있는 것을 아닐까요? 성서는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그래서 신비와 거룩이라는 단어로 설명하는 그 세계를 가리켜 하나님의
나라라고 합니다. 그것은 곧 영의 나라입니다. 이런 영으로 새로 난 사람
은 바람처럼 자유롭습니다. 생각이 굳어지지 않고 자유롭습니다.
<2003.9.7>
0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