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출 3:1-10)
부르심의 정체
구약성서에서 모세만큼 유명한 인물을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의 출생에 얽힌 에피소드도 유명합니다. 그는 우여곡절 끝에 생명을 건질 수 있었고 파라오 공주에게 입양되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에서 소수민족으로 박해를 당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인 모세가 박해자 파라오의 왕궁에서 왕자 대접을 받으며 살다가, 살인 사건에 연루되어 미디안 광야로 도망갔습니다. 거기서 모세는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데릴사위가 되어 양을 키우며 살았습니다.
어느 날 양을 끌고 광야 서쪽으로 가다가 그는 하나님의 산 호렙에 당도했습니다. 아마 그 산은 미디안 종교의 성지였을 겁니다. 미디안 제사장인 장인에게서 그 산에 관해서 여러 번 들었겠지요. 그 산에서 모세는 이상한 것을 보았습니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떨기나무가 타지는 않았습니다. 성서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런 현상은 초자연적인 게 아니라 ‘엘모의 불’이라고 해서 일반적인 것이라고 합니다. 폭풍우 치는 날 교회 탑이나 선박의 돛대와 같은 뾰족한 물체의 끝부분에 대기 전기가 방전되면서 나타나는 불꽃입니다.
이야기는 계속 이어집니다. 하나님은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야, 모세야!” 하고 부르셨습니다. 모세는 초등학생이 대답하듯이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모세의 소명은 사무엘의 소명과 비슷합니다. 성전에서 제사장 엘리와 함께 생활하던 어린 사무엘은 한 밤중에서 자기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사무엘은 당연히 엘리가 부르는 것으로 생각해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대답하고 엘리에게 달려갔습니다. 이런 일이 세 번이나 반복하자 엘리는 하나님이 부르는 것이라는 사실을 사무엘에게 가르쳐주었습니다.(삼상 3:1 이하)
모세와 사무엘 이야기만이 아니라 성서에는 하나님이 사람을 부른다는 표현이 흔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갈대아 우르와 하란을 떠났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도 받았습니다. 이사야를 비롯한 구약의 예언자들은 한결같이 말씀을 선포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들은 사람들입니다. 신약성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중에 “사울아, 사울아!”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부르신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이런 성서의 보도 앞에서 우리는 마음이 편치 못합니다. 왜 저 사람들만 특별한 경험을 하고 나는 아무런 경험이 없나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대다수의 신자들은 이런 이야기를 자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으로 읽습니다. 성서가 남의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정반대로 이런 성서의 이야기를 실제로 경험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지난밤에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말입니다. 교회 주차장으로 사용할 땅을 사라는 말씀을 들었다거나 아프리카에 선교사를 파송하라는 말씀을 들었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주장이 옳을까요?
하나님은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말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에게는 그런 언어가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언어로 직접 대화할 수 있는 대상으로 삼는 것은 하나님을 인간으로 끌어내리는 태도입니다. 그것을 전문적인 용어로 신인동성동형론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아, 모세야, 사무엘아, 하는 부르심에 관한 이야기는 거짓말이라는 걸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고대인들의 글쓰기 방식입니다. 그들은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이걸 이렇게 비유적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영화 “카핑 베토벤”(2006년)에서 베토벤은 젊은 제자 안나 홀츠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모두들 내가 침묵 속에 사는 줄 알아. 그렇지 않아. 내 머릿속에 소리로 가득 차 있어. 절대 멈추지 않아. 나의 유일한 위안은 그걸 쓰는 거야. 신이 내 마음을 음악으로 감염시켰어.” 위대한 작곡가들은 지금 젊은이들이 엠피쓰리를 작동시켜서 나오는 소리를 듣듯이 소리를 듣는 게 아닙니다. 훨씬 근원적인 경험입니다. 소리의 존재론적 세계 안으로 들어간 것뿐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성서의 보도는 하나님의 세계로 들어갔다는 사실에 대한 문학적 표현입니다.
부르심의 목적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었다는 주장에는 환청의 위험성이 있습니다. 거짓 시와 참 시를 구분하기 어려운 것처럼 거짓 부르심인 환청과 참된 부르심인 소명을 구분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거짓 예언자와 참 예언자가 치열하게 투쟁했다는 사실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으며, 이스라엘 민족이 반복적으로 우상숭배에 빠졌다는 사실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거짓 예언자들도 자신들이 하나님에게서 말씀을 들었다고 주장했습니다. 대다수의 거짓 예언자들에게는 진정성이 있었을 겁니다. 환청을 들은 사람이 자기 경험을 분명하다고 생각하듯이 말입니다. 히틀러도 자신의 연설을 진리로 확신했으며, 당시 수많은 독일 지식인을 비롯한 민중들이 그를 추종했습니다. 오늘 한국의 정치는 어떨까요? 아니 한국교회 강단은 어떨까요? 환청이 소명으로 둔갑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소명인지 환청인지는 결국 역사가 증명하겠지요. 우리는 한 순간만 살기 때문에 그것을 완전하게 분간하기 어렵지만, 최소한이나마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부르심의 내용을 알아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평화와 생명으로 인도하는 부르심인지, 아니면 전쟁과 폭력과 적개심으로 끌어가는 선동인지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모세가 경험한 하나님의 부르심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향해서 네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니 신발을 벗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보는 게 두려워서 얼굴을 가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내가 내 백성들이 애굽에서 고통하는 것을 보았고 그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들을 애굽의 손에 건져내서 가나안 땅으로 데려갈 계획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일을 맡아야 할 사람이 바로 모세였습니다. 10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모세에게 임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애굽에서 고통당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해내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고통당하는 사람들, 그들의 부르짖음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9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으며 고통당하는 백성을 해방시키는 일이 바로 이 부르심의 목적이었습니다. 이것이 옳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합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에 성공했으며, 가나안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모세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참된 소명이었다는 게 분명합니다.
이 부르심 앞에서 모세는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요? 모세는 그 소명을 피했습니다. 그가 단순히 겸손하거나 말을 잘 하지 못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 일 자체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애굽이 어떤 나라인가요? 당대 초일류 제국이었습니다. 파라오는 태양의 아들로 신격화되었습니다. 그들의 문명과 문화는 오늘의 선진국보다 월등했으면 월등했지 전혀 못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나라를 대항해서 싸운다는 것은 어떤 영화 제목처럼 ‘임파시블 미션’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모세는 결국 그 부르심에 순종했습니다. 불가능한 싸움을 받아들였습니다.
영웅주의를 넘어서
모세니까 그런 하나님의 부르심을 감당할 수 있지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은 어림도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래서 이런 본문을 대할 때마다 우리에게는 한편으로는 신앙적 열등감이 작동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모세처럼 위대한 일을 해보겠다는 야무진 꿈이 작동되기도 합니다. 양쪽 모두 역사의 실체를 오해하는 데서 벌어지는 현상입니다. 그 오해는 영웅주의 사관입니다.
영화 <십계>에서 모세는 영웅으로 그려집니다. 홍해를 가르는 장면과 십계명이 각인된 돌판을 받는 장면이 압권입니다. 그런 영화에는 감독의 상상력이 가미되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출애굽기에 묘사된 모세도 물론 영웅적인 면모가 없는 건 아닙니다. 수십만, 또는 수백만 명에 이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끌고 광야를 횡단한 모세에게는 남이 따르기 힘든 카리스마가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대개 후세 기록자들에 의해서 영웅적으로 묘사된 것입니다. 그에게 특별한 점이 없었다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영웅적이었다고 보는 시각을, 영웅사관을 버려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모세의 모습이 재미있게 그려집니다. 앞서 잠깐 언급한 것처럼 그는 하나님의 소명 앞에서 계속해서 발뺌을 합니다. 지팡이가 뱀이 되는 초자연적 현상을 보기도 하고, 손에 나병이 생겼다가 사라지는 현상을 보기도 했지만 여전히 불안해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말을 못한다는 핑계를 댔습니다. 하나님은 누가 입과 말을 지었는지 생각해보라고 일렀습니다. 그래도 모세는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하고 끝까지 소명을 거절하려고 했습니다. 급기야 하나님은 화를 내시며 형 아론이 말을 대신해 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뒤로 모세가 자기의 소명을 받아들였다는 명시적인 언급은 없고, 대신 장인 이드로에게 애굽에 있는 형제들이 살아 있는지 알아보러 다녀오겠다는 말만 합니다. 좀 소심한 인물로 보입니다. 원래 그랬는지 아니면 40년 동안 목자로 살다가 그렇게 변했는지 모르겠으나 그는 정말 평범한 인물이었습니다. 이런 인물이 이스라엘 역사에서 최고의 영웅으로 부각되었습니다. 그를 통해서 일어난 출애굽과 광야횡단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성서적 전통에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놀라운 영적 감동을 제공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서 기자가 말하려는 핵심이 무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 사건의 주체는 영웅 모세가 아니라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입니다. 모세를 부르신 이는 하나님입니다. 앞으로 모세가 감당해야 할 일은 이미 하나님이 계획해 놓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난 받으며 부르짖고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먼저 보고 들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려오겠다는 계획을 이미 하나님께서 주도하셨습니다. 모세가 한 일은 하나님의 일에 어쩔 수 없이 따라갔다는 것입니다. 성서의 역사에 참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유일한 관심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지키시고 인도하신다는 사실에 집중했습니다. 여기서 모세는 자기에게 맡겨진 역할을 성실하게 감당한 것뿐입니다. 하나님이 연출하는 연극에서 ‘롤 플레이(Roll play)를 잘 한 거지요.
예수의 역할
오늘은 사순절 첫 주일입니다.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인 지난 2월25일부터 부활주일 전날인 4월11일까지 주일을 뺀 40일간의 절기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면서 부활의 희망을 새기는 절기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부활절이 가장 중요하다면 그것에 이르는 길목이라 할 고난주간이 포함된 사순절 역시 중요합니다. 부활의 영광은 십자가의 수난을 전제합니다. 그것이 왜 중요한가요?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무조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주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런 차원에서만 본다면 십자가 신앙은 주술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알라딘의 램프처럼 십자가가 인간을 구원한다고 말입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의 신앙, 그의 삶을 배제한 체 십자가 사건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것의 시작은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소명은 십자가 처형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가능하다면 이 잔을 내게서 물리쳐주십시오. 모세가 자기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다고 한 것처럼 예수님도 그런 생각을 왜 하지 않았겠습니까. 예수님은 자기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를 바란다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길을 받아들였습니다. ‘롤 플레이(Roll play)를 순종하는 태도로 감당하신 것입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예수님이 연극을 했다는 게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다는 뜻입니다. 만약 그가 그것을 거절했다면 인류 역사는 어찌 되었을까요? 율법의 세월이 계속되었겠지요. 아직 부활의 생명을 알지 못했겠지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한 모세는 결국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켰으며,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한 예수님은 결국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부르심을 경험했습니까? 어떤 소명으로 살아가시나요? 소명은 무슨 소명, 그냥 열심히 살면 되지, 하고 생각할 겁니다. 그렇게 살 수 있다면 그렇게 살아보십시오. 우리의 삶이 얼마나 깊은 허무와 절망으로 빠지는지 알게 될 겁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소명이 없으면 생명과 결합될 수 없습니다. 생명의 원천으로부터 부름을 받지 못했으니 생명과 끊겨 있는 것이지요.
어떤 사람들은 소명을 받았으니 목사나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착각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모든 직업 자체가 소명입니다. 독일어로 직업을 뜻한 ‘Beruf’는 불림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구두수선공, 선생, 의사, 가정주부 등, 모든 삶의 현장이 하나님의 소명입니다. 그 현장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경험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소명은 십자가의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서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했습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을 흉내 낼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맞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우리가 순종해야 할 소명, 즉 우리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각자 소명에 눈을 뜨십시오. 각자의 십자가를 피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이 기획하고 연출하시는 구원 드라마에 참여할 것입니다.(09.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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