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영과 양자의 영
롬 8:14~17, 성령강림 주일, 2022년 6월5일
성령 공동체
교회 안에서 사용하는 단어 중에서 가장 이해하기 까다로운 단어는 ‘영’입니다. 보통은 성령이라고 부릅니다. 다르게도 표현합니다. 진리의 영,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생명의 영, 오늘 설교 본문에 나오는 표현으로는 종의 영, 양자의 영, 우리의 영(프뉴마 헤몬)도 있습니다. 모든 표현의 중심에는 ‘프뉴마’라는 헬라어가 들어 있습니다. 프뉴마는 사전적 의미로 spirit, inner life, power, wind, breath, ghost 등등입니다. 도대체 영은 무엇일까요? 성령을 받으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 14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영에 이끌림을 받는 사람일까요? 성령에 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보신 적이 있나요? 성령은 우리의 일상과는 전혀 상관없는, 순전히 종교적인 개념에 불과할까요?
신약성경에 따르면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성령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 출발이 성령강림 사건이었습니다. 행 2장에 따르면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 이후 제자들과 다른 추종자들을 포함한 120명의 사람이 예루살렘에 있는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모였습니다. 그때 성령이 임했다고 합니다. 세계 교회가 지키는 성령강림절인 오늘이 바로 그 사건을 가리키는 날입니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한 현상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바람 같은 소리이고, 다른 하나는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입니다. 이 현상은 사실적인 게 아니라 은유적인 겁니다. 바람과 불은 자연 현상에서 가장 신비롭고 강력한 능력입니다. 공기가 없으면 바람도 없고, 탈 것이 없으면 불도 없습니다. 그것 자체로는 없으나 가장 강력한 힘으로 주변 세계를 바꾸는 힘이 바로 바람과 불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바람과 불같은 강력한 어떤 힘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는 처음부터 성령 공동체였다는 뜻입니다. 대구샘터교회는 성령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 교회 안에, 그리고 우리 교인들 사이에 바람과 불처럼 강력한 능력인 성령이 임하신다는 증거가 있을까요?
「개역개정」 성경은 오늘 설교 본문이 포함된 단락에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는 소제목을 붙였습니다. 루터 성경은 ‘Das Leben im Geist’(영 안에 있는 생명)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두 소제목이 가리키는 바는 성령이 곧 생명의 영이라는 사실입니다. 생명은 죽음과 반대이니까 죽음의 힘을 압도하는 능력이 곧 성령인 셈입니다. 이런 정도만 알아도 우리는 성령의 핵심에 가까이 간 겁니다. 즉 성령은 생명의 영입니다. 다음 질문은 무엇이 생명인지, 무엇이 살리는 것인지에 관한 것입니다. 그래야만 생명의 영이, 또는 생명의 힘이 무엇인지를 아는 게 아니겠습니까? 오늘 설교를 듣는 분 중에서 ‘남보다 더 많이 먹고 남보다 더 호화롭게 사는 것’을 생명에 이르는 길이라고 여기는 분들은 없겠지요.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월든』은 많은 이들에게 영적 감동을 준 책입니다. 20대 후반의 소로우가 월든이라는 호숫가 숲에서 손수 오막살이를 짓고 작은 텃밭을 가꾸면서 살았던 경험을 잔잔하게 풀어놓은 산문집입니다. 중간에 자기 철학과 인생관에 관한 이야기도 나옵니다. 예를 들어 그는 신문을 보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신문에 나오는 내용은 새로운 소식이 아니라 늘 그렇고 그런 낡은 이야기의 반복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사는 21세기에는 그런 현상이 더 심해졌습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으로 인한 정보 과잉, 그리고 언론의 상업화 등으로 인해서 우리가 정보를 필요 적절하게 이용하는 게 아니라 거꾸로 우리가 정보에 이용당한다고 해도 잘못이 아닙니다. 젊은 소로우는 오늘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잘 먹고 잘사는 삶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내면의 기쁨을 추구했습니다. 그의 삶이 오늘 우리에게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그가 실천했던 삶의 방식을 무의미하다거나, 그의 삶이 재미없었겠다거나, 또는 불행했을 것이라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살리는 영
오늘날 물질적으로 엄청나게 풍요로운 시대를 사는 우리가 별로 생명 충만하게 살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의 인격이 뒤떨어지기 때문이 아니라 생명이 기계적인 방식으로 완성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에 놓여 있습니다. 행복한 조건을 나열한다고 해서 행복해지지 않는 거와 같습니다. 성경은 성령이 우리를 ‘살린다.’라고 말합니다. 성령에 의해서만 우리의 생명이 충만해진다는 뜻입니다. 이 사실을 바울은 오늘 본문에 앞서 나오는 롬 8:11절에서 다음과 같이 짚었습니다. 이 구절은 여러분이 외워둬도 좋은 정도로 중요한 말씀입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하나님의 영이 우리 죽을 몸도 살린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스도인들이야 ‘아멘!’으로 화답하겠으나 교회 밖 사람들은 어처구니없다거나 자기와는 아주 상관없는 말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리스도인이라 하더라도 실감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실감하지 못하기에 우리 예수 믿는 자들이 실제의 삶에서 믿지 않는 사람과 별로 다르지 않은 거 아니겠습니까.
11절에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라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그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영으로 우리도 생명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실제 우리의 삶에서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 듯이 보입니다. 우리는 종종 병들고, 실망하고, 늙고, 때로는 우울해지고, 그리고 죽습니다. 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삶의 무게에 짓눌려서 숨 가빠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분들에게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라는 말씀은 공허하게 들립니다. 아니면 ‘죽은 다음에 천국에 간다.’라는 말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느 정도 믿음이 돈독한 분들은 우리가 죽어도 언젠가 예수와 더불어 부활할 것이라고 믿기는 할 겁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우리의 죽을 몸이 산다는 말이 실제로 무슨 뜻인지를 우리는 아직 다 알지 못합니다. 부활의 실체를 우리가 다 알지 못하듯이 말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모르는 게 아니라 그 세계는 신비이기에 세상에서 경험하는 일상의 논리로 설명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더 깊이 있게 배워야 합니다. 영적으로 어른이 되면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본문 14절에서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살린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조금 더 풀어서 설명했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여기서 하나님의 영은 곧 성령입니다. 그 성령으로 인도받는 사람이 곧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곧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생명 창조주이시고 생명 완성자이시니까 그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된다면 당연히 생명을 얻습니다. 그 생명은 단순히 여기서 숨을 쉬고 밥을 먹고 배설하는 차원만이 아닙니다. 그런 생명 형식이 끝나는 죽음 이후에도 말살되지 않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말도 사실적인 게 아니라 은유적인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과 결속되었다고 말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성경이 말하는 생명을 소유의 차원에 아니라 관계의 차원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종의 영, 양자의 영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말을 색다른 개념으로 더 깊이 있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 종이 아니라 양자가 되었다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발견한 복음의 핵심입니다. 15절을 들어보십시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여기서 영이 두 가지로 나옵니다. 하나는 종의 영이고, 다른 하나는 양자의 영입니다. 종의 영은 우리를 무서워하게 만드는 영입니다. 다른 말로는 롬 8:6절이 말하는 육신의 생각입니다. KJV은 육신의 생각을 carnally minded(세속적으로 기울어진 생각)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육신의 생각을 무조건 파렴치하고 부도덕하다고 보면 안 됩니다. 바울의 관점으로 보면 이것은 고상하고 세련된, ‘있어 보이는’ 율법주의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무언가 업적을 보이는 삶의 태도입니다. ‘자기의(義)’에 몰입하는 겁니다. 모범적인 삶의 실천으로 남이 알아줄 만한 업적을 쌓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육신의 생각을 죽음이라고 보았습니다. 사람은 육신이 약해서 율법을 완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할 수 없는 일을 억지로 하다 보니, 위선에 떨어지거나 교만에 떨어지는 겁니다. 바울이 직접 경험한 것들입니다.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지 못해서 벌 받을지 모른다는 불안이 그의 영혼을 지배한 것입니다. 율법 완성에 집중하면 할수록 더 힘들었습니다. 이런 ‘강박’이 죽음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를 이렇게 몰아가는 세력이 바로 ‘무서워하는 종의 영’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세속의 차원에서 이런 무서워하는 종의 영에 사로잡힌 게 아닐까요?
종의 영과 반대되는 영은 ‘양자의 영’(the Spirit of adoption)입니다. 혈통으로 자식은 아니나 법적으로 자식이 되는 것입니다. 14절이 말하는 ‘하나님의 아들’이나 16절이 말하는 ‘하나님의 자녀’와 같은 의미입니다. 양자의 영을 받은 사람은 이제 종으로서의 두려움에서 벗어납니다. 종은 아무리 훌륭하게 일을 처리해도 자녀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인정받아야만 합니다. 그런 인정받는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양자의 영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인정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종은 열심히 일하고, 양자(養子)는 그냥 놀고먹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쩌면 양자가 된 사람은 이전보다 더 열심히 일할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건 두려워하느냐, 그 두려움에서 벗어났느냐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세상살이에서 인정받지 못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셨나요? 인생의 점수를 얻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셨나요?
성령이여 오소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라는 형식은 갖추었으나 실질적인 내용은 없을 수 있습니다. 자녀가 아니라 여전히 종으로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역설적으로 종은 그런대로 훌륭합니다. 종으로 인정받기 위해서 애를 쓰니까 말입니다. 우리는 ‘자녀’는 아니고, ‘종’도 못되고, 오늘 본문에 나오지 않은 ‘고아’처럼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절대적으로 신뢰할 대상도 없으며, 나름으로 자기 인생 철학 가운데서 모범적으로 살려는 의지도 부족하고, 그냥 홀로 외롭게 고아처럼 각개전투하듯이 삽니다. 오늘날 이 세상은 그런 고아들이 몰려다니면서 행패를 부리는 곳인지 모릅니다. 대한민국 정치판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분한 것도 많고, 짜증 나는 일도 많고, 자기를 알아주지 않아서 섭섭한 일도 많습니다. 아주 작은 일로도 화가 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누려야 할 평안과 자유는 오간 데 없고, 그리고 주인의 뜻을 살펴야 할 종으로서의 책임감도 충분하지 못합니다. 순전히 ‘자기’라는 작은 세계 안에 갇혀서 그게 온 세상인 줄로 여기면서 삽니다. 그런 방식으로 자기를 어느 정도 성취했다고 해서 행복할까요? 하나님의 아들과 딸에게만 가능한 그런 생명을 고아처럼 살면서 맛볼 수 있을까요? 여기서 ‘고아’는 비유로 쓴 단어니까 오해는 마십시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더는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아야겠다는 생각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그런 일에 인생을 소비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하나님의 아들과 딸에게 일어나는 일이라는 사실 안으로 깊이 들어갈 뿐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일상에서 그런 일이 무엇인지 살펴보십시오. 그걸 매 순간 느끼는 사람이 있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실제의 삶에서는 종이나 자녀나 크게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똑같이 배부를 때도 있고 배고플 때도 있고, 몸이 아플 때도 있고, 외로울 때도 있고, 농사일로 고단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 일상을 종과 자녀는 각각 다르게 받아들입니다. 종에게는 그런 모든 일이 의무이지만 자녀에게는 권리이자 특권입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자녀로서의 삶은 쉽지 않습니다. 우선 ‘종으로서의 삶’과 ‘자녀로서의 삶’이 겹쳐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빠 아버지’를 부르짖는다고 표현했습니다. 부르짖지 않으면 자녀로서의 삶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울부짖는 방식으로 짧은 인생을 사셨습니다. 체포당하던 날 밤 겟세마네 동안에서 기도하실 때 “아빠 아버지여!”라고 외쳤습니다. 그런 운명이 얼마나 처절했던지 마지막 순간에 그는 하나님에게서 버림받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부르짖지 않으면 자녀의 삶은 불가능합니다. 쉽게 종으로 떨어집니다. 종의 삶이 쉽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게 힘든 또 하나의 결정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이 종말론적인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저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은 하나님과의 결속을 가리키는 은유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아직 하나님과 완전하게 결속되지 못했습니다. 그 사건은 종말에 완성될 겁니다. 현재는 종처럼 삽니다. 자녀의 신분으로 종처럼 살고 있습니다. 이 둘 사이에서 벌어지는 충돌과 긴장을 견디지 못하기에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게 힘든 겁니다. 노골적으로 설명하면, 죽는 순간에 참된 안식과 평화를 얻는다는 사실에 모든 인생을 걸 수 있을 때만 하나님의 자녀로 살 수 있는 겁니다. 이게 그리스도교가 가르치는 종말론적 희망이고, 구원입니다. 그 종말이 오기 전에 우리는 현실의 어려움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의 마지막 절인 17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에 이르기 위해서 고난도 함께 받는다고 말했습니다. 아직은 우리에게 영광이 임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 영광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를 믿음으로써 그 영광이 약속으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런 영광에 도취해서만 세상을 살지는 못합니다. 모든 인생살이 문제가 깨끗이 해결된 듯이 허공에 뜬 채로 살지 못합니다. 그런 열광주의 신앙이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종종 나타나긴 했습니다. 그게 답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온갖 비루한 일들이 벌어지는 땅에 두 발을 단단히 뿌리 내려야 합니다. 미래의 영광과 현재의 고난 사이에 놓인 종말론적 긴장감을 확실하게 붙들어야 합니다. 예수 제자로서 이렇게 살도록 우리는 이끄는 힘이 바로 하나님의 영이고, 양자의 영이며,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입니다. 우리 자신만의 힘으로는 죽었다가 깨도 이 긴장감을 온전히 버텨낼 수 없습니다. 고대 그리스도인들이 “Veni Sancte Spiritus”(오소서 성령이여!)라고 기도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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