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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하나님의 영광이 답이다 (벧전 5:6-11)

하나님의 영광이 답이다

베드로전서 5:6-11, 부활절 일곱째 주일, 2011년 6월5일

     고난의 문제

     베드로의 편지는 전체적으로 고난당하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그 배경으로 합니다. 예컨대 벧전 3:14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며” 이 구절은 그들에게 고난, 두려움, 근심이 많았다는 뜻입니다. 벧전 4:16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오늘 본문은 그것을 더 노골적으로 표현합니다. 8b절은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로 다니면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하고, 9b절은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고난을 일상의 삶으로 경험하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향해서 베드로는 지금 영적인 아버지의 심정으로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여기서 고난은 세상살이 자체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돈이 없고, 취업이 안 되고, 배신당하고, 아프고, 원하는 일들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겪게 되는 고난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은 예수를 믿으나 믿지 않으나 누구에게나 똑같이 다가오는 것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 목적이 이런 어려운 세상살이를 편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주 세속적인 욕망을 믿음이라는 명분으로 실현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으로 일상 문제까지 해결된다는 논리의 삼박자 축복은 한국교회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는 예수님의 말씀을 세상살이의 어려움을 모두 해결해준다는 뜻으로 오해합니다. 그게 아닙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당시 유대 종교를 가리킵니다. 종교적인 율법이 삶의 짐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과 일상이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신앙을 통해서 일상의 문제가 전혀 새로운 차원으로 받아들여진다는 뜻이지 일상을 자기의 욕망대로 바꿀 수 있다는 게 아닙니다. 모두가 부러워할 만큼 잘 살게 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하나님의 복이라고 할 수 없고, 견디기 힘든 시련이 반복된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비유적으로 말해서 시인의 정체성은 좋은 시를 쓰는데 있지 돈을 잘 버는 데 있는 것은 아닌 것과 비슷합니다. 좋은 시를 많이 써서 돈도 벌면 좋겠지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시인은 돈 버는 것으로 만족해하지 않습니다.

     지금 베드로가 말하는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을 받은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었다는 사실에 놓여 있습니다. 이 사실이 당시 사람들에게는 눈엣가시와 비슷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율법을 절대화하던 유대인들은 그것을 상대화하고 예수 그리스도만을 절대화하던 그리스도인들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지중해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로마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무식쟁이, 또는 무신론자로 간주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나사렛 예수를 신으로 믿는 것까지는 그렇다 하더라도 다른 신을 인정하지 못하는 게 말이 안 됐습니다. 로마의 여러 신화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리스도교가 예수를 로마 헬라 신화에 나오는 여러 신의 하나로 주장했다면 로마와의 관계는 처음부터 좋았을 겁니다. 그리스도교는 그걸 거부했습니다. 더구나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황제에게만 붙일 수 있는 ‘퀴리오스’, 즉 ‘주’라는 단어를 황제가 아니라 예수님에게 붙였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이런 신앙은 로마의 황제 숭배와 완전히 대립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의 공공기관에 세워놓은 황제 신상에 절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무원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 이외에 여러 가지 이유로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받았고, 때로는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리스도교가 당시의 권력이나 시대정신을 거부했다는 뜻입니다. 마치 지금 여호와의 증인 교도들이 군복무를 거절하고 감옥에 가는 것과 비슷했습니다.

     오늘 한국의 그리스도교와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초기 그리스도교의 영적인 긴장을 잃었습니다. 시대와 잘 어울립니다. 팍스 로마나 이데올로기가 오늘에도 작동되는데도 아무런 고난을 겪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화뇌동의 조짐을 보입니다. 오늘 우리는 로마 황제를 숭배하고 있습니다. 무조건 물질적으로 잘살게 해주겠다는 선전에 쉽게 속습니다. 무한경쟁에 발 벗고 나섭니다. 남을 눌러야만 살아남는다는 약육강식의 논리에 매몰되어 있습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경쟁은 마치 헤비급 권투선수와 라이트급 선수가 싸우는 것과 같습니다. 학생들을 모조리 줄 세우는 방식으로 몰아갑니다. 경쟁의 압박감에 못 이겨 많은 청소년들이 목숨을 끊습니다. 지금 정부에서 경쟁하듯이 밀어붙이는 4대강 사업에서도 수많은 노동자들이 죽었습니다. 총체적으로 교회도 역시 이런 경쟁 구조에 빠져 있습니다. 목사들도 이런 경쟁 구조 속에서 영적으로 메말라가고 있습니다. 한기총을 비롯해서 모든 교단의 선거판이 혼탁해진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게 현실인데 어쩔 수 없지 않느냐, 하고 생각할 겁니다. 그렇습니다. 그게 현실이긴 합니다. 개인들이 거기서 벗어나기는 거의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당시에도 로마의 질서가 현실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거기서 적당하게 적응하고, 또는 출세하면서 살아갈 수도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들을 향해서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벧전 5:9a)고 권면합니다. 그들이 대적해야 할 대상은 마귀입니다. 그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면서 삼킬 자를 찾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노예로 만드는 시대정신(Zeitgeist)입니다. 오늘 우리가 경험하듯이 무한 경쟁에서만 삶을 확인하게 만드는 이념과 구조를 가리킵니다. 그런 힘이 바로 마귀입니다. 베드로는 그 마귀를 대적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

     어떻게 대적할 수 있나요? 대적해보려고 노력을 하기는 했을까요? 마귀가 무엇인지, 삼킬 자를 찾는다는 사실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셨나요? 베드로가 무턱대고 싸우라고 등을 미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그것은 사이비 이단이 됩니다. 베드로를 비롯해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막무가내로 세상을 부정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동키호테처럼 누가 적인지도 정확하게 모르고 창을 들고 말을 타고 돌진하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마귀를 대적해서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마귀의 힘은 그리스도인들을 능가합니다. 거기서의 싸움은 백전백패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경험이 있을 겁니다. 지금의 무한경쟁이라는 악한 구조를 여러분 스스로 극복해나갈 수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우리는 무능력한 사람들입니다. 더 노골적으로 말씀드리면 우리 스스로 알게 모르게 마귀의 추종자가 될 때도 있습니다.

     대적하라는 베드로의 말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맞서야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의 영혼을 겁쟁이로 만드는 마귀를 향해서 맞서야 하고 맞설 수 있습니다. 일단은 맞서 있어야 합니다. 궁극적인 승리는 마지막 때 일어나겠지요. 그 중간시기를 사는 우리는 일단 버텨내야 합니다. 그것마저 포기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맞서야 하고, 당연히 맞설 수 있습니다. 대적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 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이 사실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이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벧전 5:10) 이 문장에 중요한 단어가 4개나 나옵니다. 온전하게 하시고,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견고하게 하십니다. 마귀와 싸울 수 있는 힘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이런 힘이 있다면 우리는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겁쟁이가 되게 하는, 거듭해서 황제숭배로 돌아가게 하는 악한 세력과 맞설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게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나름으로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했지만 여전히 삶의 토대가 흔들립니다. 도대체 삶의 용기가 나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마귀와 대적하기는커녕 나 자신도 추스르기 힘들어집니다. 신앙생활이 권투나 유도처럼 겉으로 실력을 보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게 안 됩니다. 저 사람이 마귀와 맞설 능력이 있는지 아닌지 분간하기 힘듭니다. 하나님 경험이라는 게 눈에 확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적할 수 있는 힘을 주신다는 사실을 직접 실감나게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전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 대적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분에 대한 베드로의 설명을 들어보십시오. 그는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입니다.(벧전 5:10a)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갔다면 당연히 온전하고, 굳건하고, 강하고 터가 견고합니다. 대적할 능력은 하나님의 영광에서 나옵니다. 우리에게 대적할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는 말은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갔는지 안 들어갔는지 모르겠다는 뜻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관건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삶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이 멀게 느껴지시나요?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에서 ‘영광’은 하나님께만 해당되는 어떤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 자체, 또는 하나님의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물로 존재하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영광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세는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받은 뒤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간다는 것은 하나님과 일치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휩쓸린다는 뜻입니다. 만약 그것이 분명하다면 당연히 우리는 삶의 능력에 전적으로 사로잡힐 것이며, 삶을 파괴하는 마귀와 대적할 능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아직은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모세도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이 아니라 등만 보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가게 하셨다는 베드로의 말은 완료형이 아닙니다. 앞으로 들어갈 약속입니다. 그 약속의 보증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셨다고 말합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 사실에 자신의 미래와 운명을 걸었습니다.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간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곧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방식이고, 하나님의 계시이고, 하나님의 구원 통치입니다. 이 사실에 근거해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황제를 더 이상 ‘퀴리오스’라고 떠받들 수 없었습니다. 우리도 그들과 똑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신처럼 섬기는 자본과 권력과 명예를 퀴리오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비록 그런 삶의 태도로 인해서 고난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주눅이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도 안 됩니다.

     오늘 그리스도인의 삶이 실제로 풍요로워지는데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답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영광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우리의 영혼을 질식시키는 마귀와 대적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 고난을 가리켜 ‘잠깐’이라고 했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켜 ‘영원한’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잠깐입니다. 세상에서 획득할 수 있는 모든 소유와 권력도 잠깐입니다.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라는 행성도 잠깐입니다. 모든 것이 잠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만이 영원합니다. 거꾸로 영원한 것이 하나님이 영광입니다. 죽은 자로부터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그의 영광으로 인도합니다. 아멘.

베드로전서 5: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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