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2.21(롬 16:25-27)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예언자로만 받아들일 뿐이지 그리스도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한다면 그가 온 뒤로 이 세상이 뭔가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했는데, 달라지지 않은 걸 보니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일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지만 이 세상은 그 이전과 달라진 게 하나도 없습니다. 불의가 판을 치고 의로운 사람이 고난을 받습니다. 선천적으로 장애로 태어나는 사람들도 여전히 많습니다. 학생들에게 민주적이고 전인적인 교육을 시키려다가 파면을 당하는 교사들도 나옵니다. 복음을 싸구려 약장수처럼 전해도 부흥하는 교회가 있는 반면에 신학과 영성에 근거해서 진실하게 전해도 생존하기 힘든 교회도 많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는 걸 보면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보내신 하나님은 이 세상의 변화에 아무런 관심이 없거나 아니면 무기력해 보입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어떤 이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혼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서 오셨지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오신 게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영혼 구원에 모든 힘을 쏟아 부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간혹 대도시 번화가에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팻말을 들고 확성기로 그 구호를 외치고 다니는 이들이 있는데, 이들이 바로 이런 영혼구원을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이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이 어떠하든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히틀러 시대에 독일 기독교인들 중에서 많은 이들이 히틀러의 정치 이념을 지지했습니다. 교회는 인간의 영혼만 구원하는 공동체라고, 즉 세상과 하나님 나라의 통치방식은 전혀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가능했습니다.
진지하게 질문해보십시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누굽니까? 우리는 왜 예수님을 그리스도, 즉 메시아라고 믿습니까? 우리는 지금 무슨 근거로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다시 오신다고 믿습니까? 우리는 지금 구체적으로 무엇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우리가 기다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다면 세상에 어떻게 변한다는 겁니까? 이런 질문은 중요합니다. 저는 매 순간마다 이런 질문에 파묻힙니다. 그런 질문 없이 우리가 어떻게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오늘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런 데에 관심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 건 신학자들에게나 필요한 것이지 일반 신자들에게는 쓸 데 없다고 생각합니다. 대신 ‘지금 여기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의 확신을 얻어 행복하게 사는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이것은 도덕적이고 실존적인 신앙경험입니다. 물론 이런 신앙은 없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경험하고 구원을 경험하며, 도덕적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인들을 비롯해서 지난 2천년 역사를 살아온 모든 기독교인들은 어느 한 순간에도 그런 개인의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이 세계에 임하는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다.”는 사도신경의 첫 항목이 바로 이것을 말합니다. 하늘과 땅, 그것의 창조자, 그것의 완성자를 믿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이 어떻게 될 것인가는 바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다시 오실 때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진다는 묵시적이고 종말론적인 신앙입니다. 생명이 완성되는 하나님의 시간에 대한 강렬한 기다림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바로 그 순간을 기다리면서 영적 순례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은 바로 그런 순례자들의 후손들입니다.
대림절 넷째 주일을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여러분은 무엇을, 누구를 구체적으로 기다리고 있습니까? 그 대답을 대개는 알고 있을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통치가 이뤄지는 세상,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지금은 그것이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무죄한 자가 고난을 받기도 하고, 불의한 자가 득세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직접적으로 통치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재림하는 그 순간부터 이 세상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에 들어갑니다.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게 되는 그때에 생명이 완성됩니다. 지금 우리가 잠정적으로만, 부분적으로만 참여하고 있는 생명이, 그래서 여전히 불안한 생명이 완성됩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바로 이 사실에 자신들의 운명을 걸었습니다. 그들이 순교의 자리에 나설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사실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 16:27절이 말하는 하나님의 ‘영광’이 바로 생명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27절 말씀을 직접 읽겠습니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 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이런 문장은 그 내용이나 형식의 차원에서 로마서 1-15장과 다릅니다. 성서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롬 16장은 바울의 편지가 아니라고 합니다. 특히 16:25-27절은 2세기 초 어느 기독교 공동체에서 시작한 송영이라고 합니다. 그 송영이 바울의 편지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로마서 16장의 마지막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비록 바울이 직접 쓴 내용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초기 기독교의 고유한 신앙을 그대로 담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데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이 송영이 말하려는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에게 영광이 영원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바랄 뿐만 아니라 그것이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이 완성된다는 뜻입니다. 이게 옳은 주장일까요? 우리는 우선 생명의 완성과 하나님의 영광이 어떻게 연관되는지,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아니, 하나님만이 생명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그 이외의 존재는 결코 생명의 창조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 하나님에게 최고의 기쁨은 바로 생명이 완성되는 것, 즉 자신의 창조 행위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완성이라는 말이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군요. 하나님의 생명 창조는 원래 완전한 거였으니까요. 물론 하나님의 창조는 완전했습니다. 그러나 완결된 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여전히 창조가 계속되고 있으며, 종말에 완결될 것입니다. 물론 창세기의 보도에 따르면 모든 창조가 아름다웠으며, 완벽했다고 합니다. 완벽한 창조의 세계는 아담과 이브의 타락으로 파괴되었습니다. 우리의 운명은 실낙원입니다. 창세기의 이런 묘사는 물론 신화적인 겁니다. 그 신화는 이 세상의 어떤 실체를 지적합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완성되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그것은 종말에 완성된다고 말입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영광은 온전히 실현됩니다.
이런 설명이 어떤 분들에게는 추상적으로 들릴지 모르겠군요. 지금 먹고 사는 일만 해도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하나님의 영광이니, 생명의 완성이니, 하는 말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생명을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2008년 한 해도 정신없이 살았을 겁니다. 어린이들은 많이 자랐고, 나이 든 사람들은 그만큼 늙었습니다. 돈을 번 사람도 있고, 잃은 사람도 있습니다. 살림살이가 나아진 사람도 있고, 어려워진 사람도 있습니다. 모든 게 귀한 삶입니다. 한 해가 거의 끝나가는 지금, 지난 한 해를 돌아보니 어떻습니까? 정말 만족하게 산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겁니다. 계획했거나 또는 우연하게 좋은 일이 일어나서 기분이 올라간 적이 있었지만 기쁨과 평화가 가득하다고 느낀 순간은 별로 많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그 어떤 위대한 업적을 성취했다 하더라도, 아무리 고상한 방식으로 마음 수련을 쌓아도 이런 한계를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아니, 한 가지 방법은 있습니다. 알코올이나 마약에 중독되는 겁니다. 그런 상태가 지속될 수만 있다면 우리는 허무를 느끼지 않을 겁니다. 무언가가 우리를 꽉 채우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살겠지요. 그러나 그런 생명 충만감은 결국 우리를 근본적으로 파괴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이비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방식으로도 우리가 완벽하게 만족할 수 없는 이유는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우리가 소유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생산해낼 수 없습니다. 이런 말을 상투적인 것으로 듣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잘 믿으라는 말이군, 교회에 잘 나오라는 말이군, 하고 그냥 지나치지 마십시오. 그 신앙 언어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의 신앙은 빈껍데기만 남습니다. 성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을 피조물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 근거를 우리 내부에 갖고 있지 못합니다. 밖에서 주어질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숨(루아흐)을 불어넣자 살아있는 영이 되었다는 창세기 기자의 진술이 바로 그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숨을 공급받아야만 살아날 수 있는 인간이 어떻게 자기 자신 안에서, 자기가 생산한 것으로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제한적인 생명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언젠가 때가 되면 완전한 생명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완전한 생명 안으로 들어가는, 그 생명과 하나 되는 사건이 곧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하는 오늘 본문의 송영은 곧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충만하기를 바란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기를 바란다는, 그런 일이 이미 일어났다는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송영을 부른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미 생명의 완성을 맛보고 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들이 이미 생명의 완성을 맛보았다는 말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들이 죽지 않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이 전혀 불안해하지 않았다는 말도 아닙니다. 그들은 실제로는 우리와 똑같이 늙고, 죽고, 허무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아니라 예수의 운명을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의 본질로 들어갔다고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생명에 완전히 들어갔다고 말입니다. 그것을 가리켜 ‘들림 받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신화적 표상으로 ‘승천’이라고 합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그분이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의 능력을 갖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저는 설교 앞머리에서 우리와 똑같이 구약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있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일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이 세상에 정의와 평화가 완벽하게 실현시킬 수 있어야만 메시아로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라니, 그들에게는 초기 기독교인들의 주장이 어불성설이었습니다.
세상의 권력이라는 차원에서만 본다면 예수님은 능력적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권력 앞에서 오히려 무기력했습니다. 그것의 단적인 예가 십자가 처형입니다. 십자가는 유대인들에게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었습니다.(고전 1:23) 예수님의 제자들과 추종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순간에 비겁하게 행동했다는 복음서의 보도는 사실에 가깝습니다. 그들도 그 당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십자가에 달려 죽은 사람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뒤로 역사는 사람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렀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생각과 계획을 뛰어넘으십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님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부활의 실체로 나타났습니다. 누가 이것을 조금이라도 예상할 수 있었겠습니까? 제자들도 자신들이 지금 무엇을 경험하고 있는지 잘 몰랐습니다. 훗날 천천히 그것의 실제적인 의미를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십자가는 구약성서를 통해서 이미 예언된 메시아의 길이었으며, 부활도 역시 하나님의 전권적 개입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 깨달음의 과정을 기록한 것이 바로 신약성서를 구성하고 있는 복음서와 편지들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모든 것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것”이라고 묘사했습니다.(롬 16:2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천 년 전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예수님의 운명과 그에게서 일어난 사건에서 생명의 완성을 경험했습니다. 얼마나 놀랍고 황홀한 경험이었을까요? 그래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이 세세무궁하게 되었다고 노래했습니다. 이들의 영적인 경험에 오늘 우리가 동참하고 있는지, 그래서 우리의 입에서도 이런 송영이 울려나오는지 궁금합니다. 그런 경험과 송영이 없다면 우리는 영적으로 아주 궁핍한 사람들입니다. 값진 보화를 갖고 있으면서도 그걸 깡통 속에 넣어놓은 채 즐길 줄 모르는 사람과 같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초기 기독교인들의 영적 경험과 똑같은 경험을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여러분들에게 구체적인 방법을 말씀드릴 자신이 없습니다. 이는 마치 위대한 시인이 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드릴 수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다만 이렇게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정말 새롭게 세상과 역사를 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늘 새롭게 우리에게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고정관점에 묶여 있어서 새롭게 볼 수 없습니다. 어쩌면 새롭게 보고 들을 수 있는 것도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일지 모릅니다.
오늘 2008년 대림절 넷째 주일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믿습니까? 빈말은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종교적인 교양인이 되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 게 아닙니다. 그분이 오셔야만 생명이 완성된다는 사실에 더 집중하십시오. 그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신비의 계시’를 따라서 생명의 완성자가 되신 분이십니다. 우리 함께 2세기 초 기독교인들의 송영에 따라서 이렇게 노래를 부릅시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이 세세무궁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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