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은총,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얼굴
출 33:12-23, 창조절 여덟 번째 주일, 2017년 10월22일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내게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13.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14.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15.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 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16.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17.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 18.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19.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20.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21.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22.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23.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오늘 설교 본문의 바로 앞 구절인 출 33:11절에는 특이한 설명이 나옵니다.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셨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이나 엘리야 등등의 사람들도 하나님, 또는 천사들과 대화하는 일이 종종 있긴 했지만 모세는 독보적입니다. 모세 이야기에는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하나님 경험에서 가장 원초적인 것들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바로 그런 원초적 경험에 해당됩니다. 모세는 이제 시내 산을 떠나서 가나안으로 올라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하나님에게 두 가지를 요구합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구약성경의 하나님 경험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
모세의 첫 번째 요구는 하나님의 은총이었습니다. 출 33:12b절에서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으니...’라고 했고, 이어 13절에서 두 번이나 반복해서 은총을 구합니다. 다시 16절에서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라고 했으며, 17절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다.’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생각하는 은총은 하나님이 가나안까지 함께 가는 것입니다. 14절과 15절을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마치 어린아이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밤중에 나가기 무서우니 동행해달라는 투정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은 ‘그래, 함께 가줄테니 걱정하지 마라.’고 아이를 달래는 부모처럼 묘사되었습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만 살아갈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출애굽 과정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가 신처럼 지배하고 있던 애굽에 열 개의 재앙이 임하는 걸 봤습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이런 일들은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고서는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광야 생활에서 살아가기에 필수인 먹을거리와 마실 물까지 하나님이 해결해주셨다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온갖 시련을 거치면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시내 산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갈 길이 멉니다. 광야에서 여러 종족들과의 크고 작은 싸움이 벌어질 겁니다. 내부 분열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는 게 좋다거나 모세의 지도력을 부정하려는 집단도 나타날 겁니다. 광야를 어찌어찌 견뎌낸다고 해도 가나안에 정착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습니다. 그곳에는 당시로서는 고도로 문명화된 종족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들과 더불어서 살아가다보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은 손상당하기 좋습니다. 그렇게 될 바에야 차라리 애굽에 머물러 있는 게 나았을 겁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냉정하게 살펴보면 하나님의 기적적인 능력이 그들에게 늘 일어난 건 아닙니다. 실제로는 하나님의 능력을 실감할 수 없는 일들이 더 많았습니다. 출애굽 사건만 해도 그렇습니다. 구약성경은 그 사건을 대단히 놀라운 사건으로 묘사하지만 애굽의 입장에서 볼 때는 대수롭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애굽의 고대역사에 기록되지도 않았습니다. 가나안에서 살아가는 과정에서도 승리보다는 패배가 더 많았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적인 은총을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하나님보다는 오히려 국가의 힘을 키우는 게 급선무라는 목소리도 잦아들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의 운명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만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곧 오늘 본문에서 반복해서 나오는 은총 개념입니다. 삶과 생존의 능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지 자신들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구약성경은 모두 이 한 가지 사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창세기의 창조 사건도 근본적으로는 바로 이것을 가리킵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무(無)에서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으로 묘사됩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그분이 지으셨습니다.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인간의 본질은 바로 피조성입니다. 존재의 근거가 자기 내부에 놓여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사람은 모든 것을 외부로부터 받아서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태초에 세상을 만든 것으로 끝나지 않고 지금도 창조를 보존 유지 방식으로 이어지고, 종말에 완성될 것입니다. 그 사이에서 우리 각자는 살고 있으며, 모든 민족도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꿰뚫어본 이스라엘 사람들은 거대한 제국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천재지변을 일으키는 자연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두려워할만한 대상이지만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숭배하지도 않았습니다. 창조자이신 하나님만을 두려워하고 섬겼습니다. 하나님의 은총만이 자신들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는 궁극적인 토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지금 철부지 아이처럼 하나님께 요구합니다. 은총을 내려달라고, 가나안까지 동행해달라고 말입니다.
현대 지성인들 중에는 성경의 이런 신앙과 삶의 태도를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자기 인생의 주인이 바로 자기라고 생각합니다. 신의 은총이 아니라 자기의 의지와 능력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그래야만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이 볼 때 기독교 신앙은 유약합니다. 의타적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독선적입니다. 그들이 교회에 대해서 실망하고 더 나가서 무시할만한 모습들이 오늘의 기독교인들에게 나타나는 건 분명합니다. 그게 무엇인지 여러분이 다 알기에 제가 굳이 여기서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교회에 세상으로부터 비판당할만한 현상들이 적지 않다고 해서 하나님의 은총을 바라는 기독교 신앙 자체를 비판하는 것은 경솔합니다. 그들이 은총의 깊이를 모른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
모세의 두 번째 요구는 ‘주의 영광’을 보여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모세의 요구에는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의 궁극적이 관심이 담겨 있습니다. 은총을 허락받은 것으로 충분했을 텐데도 모세가 다시 영광을 보여 달라고 요구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의 영광을 보고 싶다는 말은 하나님을 직접 경험하고 싶다는 뜻입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사건을 경험했어도,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고 기근을 면했어도, 반석에서 물이 터졌어도, 십계명이 기록된 돌 판을 받았어도, 그리고 하나님과 친구처럼 대화를 나누었어도 그것만으로 절대적인 세계를 경험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모세는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세계를 직접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영광이라는 단어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종종 나옵니다. 귀한 모임에 초대를 받았을 때 ‘초대해 주셔서 저에게 영광입니다.’라고 인사를 합니다. 시나 소설 공모전에서 대상으로 입선된 사람은 ‘이런 귀한 상을 받게 되어서 영광입니다.’라고 소감을 말합니다. 성경에서는 이 용어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언급됩니다. 사람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사용됩니다. 히브리어로 영광은 ‘카봇’이고, 헬라어로는 ‘독사’입니다. ‘주의 영광’은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드러나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전승 중에서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예수의 탄생을 알린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천사들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라는 찬송을 부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곧 사람들에게는 평화의 근거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면 세상의 잡다한 것에 눈을 팔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에는 그 어떤 세상의 세력도 개입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거꾸로 그 어떤 것이 없어도 생명이 충만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주의 영광을 보고 싶다는 말의 실질적인 의미는 생명의 비밀을 완전하게 알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게 가능할까요? 물론 이 세상에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즉 생명의 비밀을 완전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요구, 그런 갈망은 필요합니다. 그런 갈망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시나브로 건조해지고 퇴락하고 지치고, 결국 작은 소용돌이에도 놀라자빠지는 신경쇠약에 떨어질 겁니다.
하나님은 ‘주의 영광’을 보고 싶다는 모세의 요구에 대해서 세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한 가지는 하나님의 정체성에 대한 해명입니다. 19b절에서 하나님은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구절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은혜와 긍휼이 하나님으로부터만 주어진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판단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자이고 우리는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근본 사태를 모르면 하나님을 향해서 불평을 터뜨리게 됩니다. 이는 마치 바둑 프로 기사의 수를 아마추어가 판단하면서 불평하는 거와 같습니다.
두 번째는 20절입니다. 하나님은 직설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했지만 여기서는 ‘하나님의 얼굴’로 묘사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얼굴은 똑같은 뜻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이 거룩하고 영광 가운데 계신 존재이기에 아무도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과 직접 만난 것처럼 묘사된 것들은 문학적인 은유이지 실제적인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있지만 삶과 인생이 무엇인지 완전하게 아는 게 아닙니다. 10대의 자신과 20대의 자신, 그리고 60대의 자신이나 80대의 자신 중에서 누가 실제로 자신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즉 생명을 직접 만날 수 없습니다.
세 번째는 23절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반석 틈에 숨겨두고 손으로 그를 덮어서 보호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옆을 지나가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반석 틈에 숨기신 이유는 하나님이 영광으로 지나갈 때에 목숨을 잃지 않게 하려는 데에 있었습니다. 이런 장면은 만화를 보듯이 눈에 선하게 그려집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가장 가까이 간 모세를 향해서 은혜와 긍휼을 베푸신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실제로 등이 있거나 얼굴이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설마 없겠지요.
하나님의 얼굴
하나님의 얼굴은 볼 수 없지만 하나님의 등은 볼 수 있는 것이 하나님 경험에서 최선입니다. 어디에 방점을 찍느냐에 따라서 관점에 차이가 있습니다. 얼굴을 볼 수 없다는 데에 방점을 두면 하나님 경험의 근본적 한계가 강조되는 것이고, 등을 볼 수 있다는 데에 방점을 두면 하나님 경험의 가능성이 강조되는 것입니다. 양쪽 모두 일리가 있습니다. 두 입장이 긴장을 보이면서도 동시에 두 입장이 하나로 어울려서 하나님 경험의 역동적인 차원이 열립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볼 때까지 생명 완성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을 것이며, 동시에 등을 통해서 하나님이 지금 우리의 삶에 동행한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런 믿음으로 애굽 시절과 바벨론 시절과 로마 시절을 버텨낼 수 있었습니다. 구약성경을 통해서 이런 믿음을 배운 초기 기독교인들도 순교의 역사를 버텨낼 수 있었습니다. 이런 믿음은 단지 지난 역사만이 아니라 오늘에도 여전히 필요한 것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구약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경험했습니다. 고후 4:6절은 이렇습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요 5:44절에서 예수님은 유대인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겠느냐.’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과 동일한 영광을 받아야 할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에도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기독교 신앙의 요체는 우리와 똑같이 한 인간으로 살았던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게 말이 될까요? 세상 사람들에게 이런 말이 설득력이 있을까요? 여러분은 이런 말에 동의하시는지요?
하나님의 영광, 즉 하나님의 얼굴은 생명의 본질을 가리킵니다. 그것을 본다는 것은 구원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구원을 지향하는 사람은 모세처럼 하나님의 얼굴을 보려는 갈망에 사로잡힙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는 그런 거 필요 없다. 지금 내 의지로 착하고 재미있게 사는 것으로 만족한다.’고 생각할 겁니다. 세상을 좀더 따뜻한 세상으로 만들고 좀더 정의로운 세상으로 만드는 데에 내 인생을 바치면 충분하다는 겁니다. 휴머니즘에 투철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는 별로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들에게 예수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사실은 거리가 먼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입장에서 그들을 설득할 수는 없습니다. 설득되지도 않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삶에서 의미 충만하게 살기만을 기대할 뿐입니다. 우리는 그들과 다른 삶을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여러 종류로 나타나는 휴머니즘으로 만족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생명의 더 크고 궁극적인 비밀이 예수를 통해서 주어진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요한복음 기자와 똑같이 ‘예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사실을 믿습니다.
무슨 근거로 예수가 하나님의 영광이며, 하나님의 얼굴이라고 우리는 주장하는 걸까요? 우선 우리가 세상에서 최선으로 행하는 것들이 완성된다고 해서 우리의 영혼이 만족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최근의 이슈인 적폐청산이 이뤄진다고 해도 실질적으로 대한민국 사람들의 영혼이 달라지는 일은 없습니다. 좀더 합리적이고 정의로운 세상이 되겠지만 여전히 사회 문제는 불거집니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보다 더 실질적인 개혁이 이뤄진다고 해도 완전한 교회는 요원합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혁명보다 더 철저한 혁명이 일어난다고 해도 죄와 죽음이 극복되는 세상은 불가능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모든 조건들이 성취되어도 근본에서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가정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자신의 뜻대로 가정이 움직이게 되어도 그것만으로 영혼의 만족은 불가능합니다. 티브이에 화면에 비쳐지는 행복한 부부와 행복한 가정은 대다수가 편집된 것이니 그걸 너무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저는 냉소주의 차원에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청산할 거는 가슴 아프더라도 청산하고, 개혁할 거는 하고, 혁명할 거는 해야겠지만 그것이 우리 삶과 인류의 궁극적인 목표는 아닙니다. 그 모든 것들은 다 지나가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예수 경험은 전혀 다릅니다. 그렇습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경험하기를 원했던 하나님의 은총과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얼굴은 바로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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