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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마 16:21-28)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16:21-28, 성령강림후 제12, 2014831

 

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2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오늘 설교 제목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은 예수님이 제자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 가운데 나옵니다. 16:23절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향해서 사탄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게 아무리 비유라고 하더라도 모욕적인 발언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강한 어조로 어떤 사람을 책망한 일은 드믑니다. 사탄이 하는 일은 사람을 미혹하게 해서 시험에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시험한 마귀가 바로 사탄입니다. 베드로가 일부러 예수님을 넘어지게 했을 리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위한다는 일이 오히려 예수님을 넘어지게 하는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수제자로 인정받고 있는 베드로를 예수님이 옆에서 듣기에 민망할 정도로 책망하신 이유를 알려면 이 말씀에 앞서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말하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들은 소문을 있는 그대로 말씀드렸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 요한, 또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 또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기 열거된 인물들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최고봉에 섰던 이들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상당히 높이 평가한 것은 분명해보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인류의 운명을 바꾸게 될 대답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16).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라는 호칭은 앞에서 열거된 인물들과 차원이 다른 겁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발설하지 말라고 제자들의 입단속을 시키고, 이어서 자신에게 닥칠 운명을 제자들에게 설명했습니다. 그것이 오늘 설교 본문의 첫 구절인 마 16:21절입니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이 말을 들은 베드로는 반론을 펼칩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로 되어 있는데, 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문장은 하나님이 당신께 자비를!’이라는 표현에 가깝다고 합니다. 베드로의 안타까운 마음이 거기에 배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베드로를 심하게 책망하셨습니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일단 예수님께서 가야 할 인류 구원의 길을 말렸다는 게 베드로의 잘못으로 보입니다. 21절에 나오는 고난, 십자가,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요체입니다. 베드로가 이걸 부정했다는 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고난과 십자가는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부활까지 부정한 것처럼 묘사된 본문 이야기는 이상해보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저 말씀을 들었다면 아멘과 할렐루야로 받아들였을 겁니다. 세상의 악한 세력에 의해서 고난당하고 십자가에 달리시지만 결국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 승리를 하신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게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의 생각은 우리와 달랐습니다. 부활은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한 선지자들이 내세에 보상을 얻는다는 암시쯤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제삼일에...’라는 표현은 당시 이런 의미의 관용어였습니다.

 

사실 예수님 자신도 부활에 대해서 결정적으로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이지만 여전히 시대의 아들입니다. 그 시대의 생각을 완전히 뛰어넘어 모든 것을 다 아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 스스로 그걸 인정하셨습니다. 마지막 때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서 마 24:36절에서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에게 닥쳐올 무시무시한 운명을 피하게 해달라고, 그러나 하나님 당신의 뜻대로 하시라고 기도했습니다. 만약에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부활을 예수님이 미리 내다보셨다면 이런 기도를 드릴 까닭이 없습니다. 더 근본적으로 부활이 전제된 것이라고 한다면 십자가 사건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행위는 단순히 컴퓨터에 프로그래밍 된 것을 받아들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전체적인 맥락에서 볼 때 베드로가 항변한 것은 예수님에게 닥칠 고난과 십자가입니다. 그러니까 고난과 십자가는 당연히 예수님에게 나쁜 것이니까 제자로서 말리는 게 당연했고, 부활은 당시 아무도 알지 못했으니 베드로만의 책임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나를 걸려 넘어지게 한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왤까요?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이 자기에게 다가올 운명에 대해서, 즉 고난당하고 십자가에 처형당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세 번에 걸쳐 예고한 것으로 보도합니다. 오늘 설교 본문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당연히 그런 위기를 느끼셨을 겁니다. 그런 조짐이 이미 앞에서 여러 번에 걸쳐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처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면서 유랑 설교자로서 활동을 시작하신 곳은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상당히 거리가 먼 갈릴리입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자유롭게 회당에 출입하면서 제자들을 부르고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언제부터인가 회당 출입이 거부되었습니다. 회당 책임자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유대교 정통과 배치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요즘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가톨릭에서도 가톨릭교회의 권위에 비판적인 사제들은 인사 상의 불이익을 당합니다. 개신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학이나 법조계도 비슷합니다. 정부에 비판적인 검사는 한직으로 밀려나고, 좀더 심해지면 퇴출당합니다. 이게 권력의 메커니즘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동이 유대교에서 볼 때는 문제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일단 회당 출입을 막았습니다. 그 이후로 예수님은 회당 밖에서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이 예수님에게 많이 쏠렸습니다. 때로는 수천 명씩 몰려들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몰려들수록 유대교 당국에서는 예수님을 더 적대적으로 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26:1-5절에 따르면 당시 최고 종교 권력자들이 가야바 대제사장의 관저에 모여 예수를 죽일 음모를 꾸몄다고 합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 치명적인 위기를 예수님이 왜 눈치 채지 못했겠습니까?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예수님은 이제 가부간의 결정을 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자기가 걸어왔던 그 길을 계속 가야 하는지, 아니면 일단 작전상 후퇴를 해야 하는지를 말입니다. 두 가지의 길은 다 근거가 있습니다. 지금은 때가 아니니 잠시 갈릴리로 피했다가 때가 되면 예루살렘으로 들어간다고 해서 누가 뭐라 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도 아닙니다. 전략적으로 본다 하더라도 싸움에는 상대가 있는 법이라서 무조건 강경책을 쓰는 게 좋은 것은 아닙니다. 인도의 간디는 목숨을 건 단식을 통해서 영국과 싸워 대다수의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만약 간디가 일제와 그런 방식으로 싸웠다면 실패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영국은 국제 여론에 신경이라도 쓰는 정권이지만 당시 일본은 깡패 국가나 마찬가지여서 단식으로 죽든 말든 나 몰라라 했을 테니까요. 예수님은 분명히 많은 생각을 하셨을 겁니다. 예루살렘으로 들어갈 것인지, 아니면 갈릴리로 돌아갈 것인지, 정면충돌을 감행할 것인지, 우회의 길을 선택할 것인지,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전자를 선택했습니다. 그걸 제자들에게 몇 번에 걸쳐서 알렸습니다.

 

여기서 예루살렘 입성을 결정했다는 것은 자신의 운명을 자신의 계획과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맡기겠다는 의미입니다. ‘자신의 계획이 바로 예수님이 베드로를 책망하면서 말씀하신 사람의 일입니다. 이런 사람의 일은 합리적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도 원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평생 그런 일을 학습하면서 살아갑니다. 공부해야 하고, 돈을 벌어야 하고, 건강해야 하고, 친구들이 많아야 하고, 나름으로 노후 설계를 잘해야 합니다. 제가 당시 베드로의 입장이라고 하더라도 그와 똑같이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 사건을 말렸을 겁니다. 지금은 예루살렘 종교권력과 맞설 때가 아니라고 설득하는 겁니다. 갈릴리 호수 근처의 가버나움에 멋진 수도원을 짓고 책도 쓰면서 예루살렘 성전의 권위를 상대할 정도의 영적인 카리스마를 확보하고, 인적 물적 토대를 안정적으로 구축할 필요도 있습니다. 이게 다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길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고난과 십자가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즉 하나님의 일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잘한 판단일까요

 

그런데 따지고 보면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구분하기는 어렵습니다. 칼로 두부를 자르듯이 경계를 지을 수도 없습니다. 기도하면 자동응답처럼 답을 얻을 수 있는 거도 아닙니다. 신학공부가 깊어져도 완전한 해결책을 찾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교회를 떠나거나 선택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저 사람과 결혼할 것인지 아닌지도 손금 보듯이 알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도 시도 때도 없이 무조건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신 것은 아닙니다. 7장에 따르면 예수님의 형제들이 초막절을 맞아 예수님에게 와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라고 조언했습니다. 갈릴리에 숨어서 어떻게 큰일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형제들에게 아직 자신의 때가 오지 않았다고 하면서 그냥 갈릴리에 머물렀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언제인지,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지를 분간하기는 힘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는 베드로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이런 실수는 반복하게 될 겁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일일이 따져가면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도덕주의자, 율법주의자가 됩니다. 그렇다면 그 말씀은 무얼 말하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을 다시 잘 보십시오. 메시아가 고난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는 것은 그동안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반대되는 일이었습니다. 고전 1:23절에 따르면 십자가가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었습니다. ‘당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는 베드로의 언행은 정당한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의 상식과 경험과 판단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즉 사람들이 불편하게 생각하고 멀리 하고 싶어 하는 그것을 통해서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고난과 십자가가 오히려 구원의 길이라니, 그게 하나님의 일이라니, 이게 말이 될까요

 

이 질문은 마태공동체가 처한 현실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기독교인들이 왜 고난당해야 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오히려 잘살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현대 기독교인들도 비슷하게 생각합니다.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부자가 된다고 말합니다. 힘든 삶을 피하고 싶은 겁니다. 그게 인간의 자연스러운 생각입니다. 마태공동체에 속한 사람들도 오늘 우리와 똑같이 고난을 멀리하고 싶어 했습니다. 이런 고민을 하고 있던 그들을 향해서 마태는, 베드로를 책망한 다음 제자들에게 주신 고난과 십자가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합니다. 16:24,25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무조건 고난 받고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말씀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좀더 냉정하게 이 말씀과 우리의 현실을 보아야 합니다. 고난과 십자가 자체는 우리의 삶을 파괴합니다. 장애와 난치병 자체는 일상을 파괴합니다. 가난에 찌들면 삶의 질도 바닥으로 떨어집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학적으로, 금욕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평소에도 예수님은 일상을 부정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서 먹고 마시기를 즐겨하셨습니다. 저도 여러분들이 가능하면 경제적으로도 여유 있게 살고, 건강도 좋았으면 합니다. 문제는 고난과 십자가를 무조건 적대시하는 태도에 있습니다. 인생의 실패를 무조건 저주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위 본문은 고난과 십자가 자체가 아니라 생명을 얻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태도가 있습니다. 하나는 생명을 자기 자신이 성취해보려는 태도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온전히 의존하는 태도입니다. 그것을 본문은 정확하게 규정했습니다. 생명을 얻으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고, 주님을 위해서 생명을 잃으면, 즉 주님께 자신의 생명과 운명을 맡기면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어서 천하를 얻어도 그것이 자기 생명을 얻는 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생명은, 즉 구원은 하나님의 배타적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초석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님의 부활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께 자신의 운명을 맡기고 싶지만, 그래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고 싶지만 실제로는 잘 되지 않을 겁니다. 옳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쉬운 게 아닙니다. 따라서 생명을 얻는 것도 쉬운 게 아닙니다. 이해는 되지만 동의가 안 됩니다. 이는 마치 비행기가 안전하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알고 있어도 비행기를 탈 때마다 고소공포증으로 인해서 두려움에 떠는 경우와 비슷합니다. 사람은 크고 작은 여러 모양의 공포증이나 트라우마를 앓고 있어서 삶의 온갖 두려움을 떨치지 못합니다. 여기서 기독교인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자기 운명을 온전히 맡기지 못합니다. 걱정을 머리에 이고 삽니다. 그게 사람의 일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문제를 제가 해결해드릴 수 없습니다. 설교자로서 저는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그와 하나 되라는 말밖에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아빠를 신뢰하는 어린아이는 아빠가 자기를 공중에 던져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아빠가 자신을 안전하게 받아줄 거라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중에 던져 졌을 때 그 아이가 위험을 느끼고 자기가 살아보려고 발버둥 치면 정말 위험한 일이 벌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고유한 생명에 참여하게 된다는 그 믿음, 그 확신이 바로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 사실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살아가십시오.

마태복음 16:21-28
https://youtu.be/WQVlE8tbkt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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