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막 8:27-38, 창조절 둘째 주일, 2015년 9월13일
27 예수와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길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28 제자들이 여짜와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29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30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고하시고 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32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3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37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예수는 누군가?’라는 질문은 기독교 신앙에서 핵심 중의 핵심입니다. 이게 당연한 말 같지만 실제로는 예수님에게 관심 없는 기독교인들도 적지 않습니다. 들은풍월에 만족해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대심문관’에서 묘사했듯이 예수 없이도, 아니 예수가 없어야 오늘의 교회는 잘 돌아갈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교회에 나오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1) 교회에 나오면 뭔가 구원에 가까이 다가간 듯한 기분이 막연하게 들 수도 있습니다. 2) 신자들끼리의 친교도 중요한 이유가 됩니다. 나이가 들수록 이런 경향이 강해집니다. 교회출입이 하나의 생활로 자리 잡는 겁니다. 3) 목사처럼 교회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직업적인 차원에서도 교회에 열심을 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들에게는 예수님이 누군지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복음서는 예수가 누군지에 대해서만 집중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제3 독서인 막 8:27절에서 예수님은 로마 황제를 기리는 도시 빌립보 가이사랴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당시에 예수님에 대한 온갖 풍문이 나돌았습니다. 제자들은 그런 풍문을 정리해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례 요한, 엘리야, 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 여긴다고 대답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세 명의 인물들은 유대인들에게 존경받는 이들입니다. 요즘도 마찬가지지만 유대 군중들이 예수님을 전체적으로 좋게 평가했다는 건 분명해 보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 자신의 생각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대표로 나서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29절의 말씀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그리스도는 히브리어 메시야의 헬라어 번역입니다. 메시야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인데, 이는 곧 구원자를 가리킵니다. ‘주는 그리스도’라는 베드로의 대답은 세례 요한과 엘리야와 선지자라는 유대 군중들의 대답과 차원이 완전히 다릅니다. 아주 위험한 발언입니다. 그리스도는 세상의 모든 세력을 상대화하기 때문입니다.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바둑 동호회원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바둑을 두면서 서로 실력을 뽐냅니다. 어느 날 새 회원이 들어왔습니다. 알고 보니 그 사람은 왕년에 프로 기사로 활동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등장으로 인해서 다른 회원들의 실력은 아무 것도 아닌 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말은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이 발생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등장으로 인해서 정치, 경제, 문화, 예술, 그리고 모든 종교 권력 등은 그 지위를 잃게 되는 겁니다. 세상의 진정한 변혁이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세상의 여러 권력이 그리스도를 용납할 수 없는 거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30절에서 제자들에게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사탄아!
예수님은 이어서 31절에서 자기에게 일어날 운명을 설명하셨습니다. 고난, 버림받음, 죽음, 부활입니다. 이 사실을 제자들은 이해할 수도 없었고, 받아들일 수도 없었습니다. 바로 앞에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베드로가 다시 나서서 그런 일이 예수님에게 일어나면 안 된다고 말렸습니다. 베드로의 반대에는 악의가 전혀 없습니다. 자신들이 믿고 따르던 예수님을 위하는 순전한 마음으로 말한 것입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이신데, 고난과 죽음이라니, 말도 되지 않습니다. 당신은 오히려 영광을 받아야 합니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를 크게 꾸짖었습니다. 33절 말씀입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사탄은 하나님에게 대립하는 세력을 가리킵니다. 이것보다 더 심한 비난은 없습니다. 예수님답지 않는 표현입니다. 내가 그 입장이라면 베드로를 잘 타이르고 말 것입니다. ‘자네가 나를 위해서 그런 말을 하는 건 고맙지만 나는 내 길을 가야하니 더 이상 나를 말리지 말게나.’ 예수님이 지나칠 정도로 강하게 비난한 이유는 이 문제가 자신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이와 비슷한 일이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에도 발생했습니다.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면서 기도할 때 사탄에게서 유혹을 받았습니다. 이 사건을 세 공관복음서가 다 전합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이 사탄의 유혹을 받았다는 사실만 짤막하게 보도하는(막 1:12,13) 반면에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그 내용을 자세하게 보도합니다. 마태와 누가에 따르면 이 유혹은 세 가지입니다. 1)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면 돌을 빵으로 변화시켜 보라. 2)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 3) 마귀에게 절하면 세상의 모든 부와 권력을 주겠다(마 4장). 당신이 메시아라는 증거를 보이라는 요구이자 유혹입니다.
여기서 열거된 세 가지는 세상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들리는 것들입니다. 인생의 모든 곤란한 일들을 초능력적으로 해결해줄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국가 지도자가 되려면 이런 능력이 있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면 이런 능력으로 세상을 구원할 수 있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도 그런 생각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삶에 지쳐 있는 민중들을 보면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 앞에 실제로 벌어지는 운명은 이런 세 가지 능력과는 반대되는 고난, 버림받음, 죽음이었습니다. 누구라도 이런 운명을 피하고 싶었을 겁니다. 예수님은 체포되기 직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께 기도할 때 자기 앞에 놓인 잔을 가능하면 치워달라고 했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할 때 받았던 유혹이 공생애 전체를 관통하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고난과 죽음이 예수님에게 일어나면 안 된다는 베드로의 말이 왜 인간적인 생각에서 나온 것일까요? 우리는 ‘그건 사람의 생각이지 하나님의 뜻이 아냐.’라는 말을 종종 합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실제로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서는 이 둘의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예컨대 어떤 젊은이가 은혜를 받았다 해서 신학교에 가는 것이 꼭 하나님의 일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가 어떤 사안을 결정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자기의 생각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가장 소박한 대답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이 없었으면 부활도 없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예수님의 인류 구원 사역도 물거품이 되었을 거라고 말입니다. 이런 생각이 교리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지만 옳은 것도 아닙니다. 이 문제를 좀더 근본적인 관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무(無)에서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그런 능력의 존재라면 굳이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이라는 과정을 거칠 필요 없이 말씀 한 마디로 세상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메시아사상이 바로 이것입니다. 메시아는 못하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전능자 메시아여야만 합니다.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에는 그런 메시아사상이 있습니다. 그런 사상이 종교형태로 나타나기도 하고, 정치와 경제와 사회문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와 로마의 카이저는 메시야, 즉 신(神)이었습니다. 그런 이들을 향해서 민중들은 열광적인 지지를 보냅니다. 그 지지를 바탕으로 황제들은 자기절대화의 길에 더 깊숙이 빠져듭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한민국에서 누가 메시아 대접을 받을까요? 재벌 총수로 대표되는 경제 권력자들일지 모릅니다. 그들은 한국경제를 좌지우지 합니다. 대통령부터 소시민까지 경제에 매달립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 자체를 매도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거기에 완전히 지배당하게 되어 결국은 자유와 평화를 다 잃어버린다는 데에 있습니다.
다시 우리의 질문으로 돌아갑시다. 예수님에게 고난과 죽음이 닥치면 안 된다는 베드로의 말이 왜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일까요? 여기서 논란의 핵심은 고난과 죽음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사람의 생각과 판단으로 제한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그리스도, 즉 메시아는 승리자이어야만 했습니다. 그것이 유대인들의 메시아사상입니다. 이런 메시아사상에는 고난과 죽음이 개입될 수 없습니다. 실패는 있을 수 없는 말이 됩니다. 베드로는 이런 생각으로 예수님의 운명까지 규정하려고 했습니다. 이런 행태는 아무리 선의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일이 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이 아닌 것은 사람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목숨을 얻는 길
예수님은 베드로를 책망한 뒤에 제자들에게 다시 말씀을 계속하셨습니다. 당신을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어서 36절에서 세상의 모든 것을 소유해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사탄이라 부르면서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꾸짖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의 일은 세상의 것을 소유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일은 자기 목숨을 얻는 것입니다. 목숨은 내적인 생명이라는 뜻의 헬라어 프시케의 번역입니다. 이 프시케야말로 참된 생명입니다. 베드로는 당시 유대인들의 메시아사상에 근거해서 세상의 것을 얻는 데에 마음을 두었습니다. 물론 그 세상의 것이 무조건 나쁜 거는 아닙니다. 오히려 좋은 것도 많습니다. 메시아가 초능력으로 유대인들의 정치 경제적인 해방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악을 박멸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지금도 원하고 있는 그런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방식으로 사람이 목숨을 얻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내적인 생명인 프시케를 얻는다는 말인가요?
이 질문은 내적인 생명이 무엇이냐, 하는 질문과 같은 겁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삶, 또는 생명은 건강하게 장수하며, 가족 우애가 깊고 세상에서 나름으로 업적을 남기는 것입니다. 이런 게 보장되지 않으면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불행한 이들은 지체 장애인들, 실업자들, 요즘 유럽에서 국제적으로 큰 문제가 되고 있는 난민들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품위를 잃지 않을 정도의 생활 조건이 필요하다는 건 분명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이런 삶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편안하고 넉넉하고, 존경받는 식으로 살았으면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것으로 목숨을 얻는 게 아니라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도(마 6:31 이하)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런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의 태도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성경의 가르침과 표현들이 손에 잡힙니까?
온 천하와 프시케
성경이 말하는 내적인 생명인 프시케는 하나님에 의해서만 실현되는 사건입니다. 사람은 그 어떤 방식으로도 그것을 성취할 수가 없습니다. 이게 인간의 숙명입니다. 하이덱거의 표현을 빌리면 인간은 세계-내-존재라는 특성을 지녔습니다. 이 세계 안에 들어와 있어서 그 구조 안에서만 생명을 경험합니다. 기독교 용어로 바꾸면 피조성입니다. 피조물은 자기 스스로 자기를 완성할 수 없습니다. 존재의 근거가 자기 내부에 있는 게 아니라 외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밥을 비롯한 모든 먹을거리는 밖에서 주어진 겁니다.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도 다 밖에서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직접 농사짓고, 의학을 발전시켜서 평균 수명을 늘려도 우리에게 생명의 능력이 있는 게 아닙니다. 모든 것의 바탕에는 자연과 세상이 놓여 있습니다. 자연과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만 생명을 생명 되게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은총으로, 선물로, 값없이,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참된 생명을 주십니다.
따라서 목숨을 얻는다는 것은 내가 생각하거나 믿고 있는 어떤 구체적인 형태를 얻는 게 아니라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 하나님을 완전히 의존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경험한 분도 있고, 그렇지 못한 분도 있을 겁니다. 그것은 말로 다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사랑이 언어를 뛰어넘는 사건인 것처럼 하나님과의 일치를 통해서 경험되는 내적인 생명인 구원도 그와 같습니다. 한정적이지만 저는 말로나마 설명해보겠습니다. 하나님과 하나 된다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 자기가 전적인 무(無)가 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참된 자유를 얻게 됩니다. 그 자유는 동시에 평화이고 안식입니다. 이를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기쁨을 얻게 됩니다. 저의 이런 설명으로 하나님의 생명이 무엇인지가 다 밝혀진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저의 경험과 설명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여러분 각자에게 생명 충만감을 허락하십니다. 그것은 ‘온 천하를 손에 넣어도’ 얻을 수 없는 생명 경험입니다. 하나님만이 고유한 방식으로 허락하시는 선물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간절히 원하고 계시지요? 이것 말고 여러분이 인생살이에서 더 원하는 것이 있으신가요?
이제 우리의 마지막 질문은 ‘목숨을 얻기 위해서 우리가 실제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입니다. 하나님과의 일치가 실제 우리 삶에서 어떻게 일어나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생명을 완성할 종말까지, 그리고 개인으로서는 죽음의 순간까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그 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즉 베드로가 오늘 본문에서 고백한 것처럼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곧 그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사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 삶의 압축이 바로 세례이며, 성찬입니다. 세례와 성찬은 여러 가지 순서로 진행되는 예배에서 확인됩니다. 세례, 성찬, 예배는 겉으로 평범해보여도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생각을 뛰어넘어 행하신 구원 사건을 상징적으로, 심층적으로, 그러나 동시에 실질적으로(real) 담아내고 있습니다. 영혼의 깊이와 무게로 이런 삶의 태도를 유지하는 사람은 온 천하로 대체될 수 없는 프시케를, 즉 내적인 생명을, 정말 우리가 기대할만한 것인 그 부활 생명을 하나님으로부터 종말에 얻게 될 것이며, 더 나가서 지금 이미 여기서 비밀한 방식으로 받아 누리고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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