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
갈 4:4-7, 성탄 후 첫째 주일, 2014년 12월28일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성경 말씀을 이해하기 쉽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고, 거꾸로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쉽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성경을 잘 이해하는 것도 아니고,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모르는 것도 아닙니다. 오해하면서도 잘 안다고 착각할 수 있고, 말씀의 깊이로 들어갈수록 더 어렵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각각의 경우마다 다 다르겠지만 일반적으로만 본다면 성경 말씀을 깊이 있게 따라가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의 대부분이 신앙적인 메타포(은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이름이 없고, 하나님을 본 사람은 죽는다는 말이 이를 가리킵니다. 이런 신앙의 궁극적인 세계에 대한 설명은 메타포 외는 불가능합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갈 4:4-7절 사이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단어가 무슨 뜻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아들, 율법, 속량, 아들의 명분, 아들의 영, 아빠 아버지, 종과 아들, 유업 등등입니다. 대충 알아들을 수 있는 것도 있고, 전혀 손에 잡히지 않는 것도 있을 겁니다. 교회 경력이 짧은 분들만이 아니라 긴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저는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의 교인들에게 이런 단어와 문장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를 설명하겠습니다. 전체가 네 절입니다. 한 절씩 따라가겠습니다.
4절- 여자와 율법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쓰게 된 이유는 예루살렘 유대 기독교와의 신학적인 갈등에 있습니다. 당시 기독교의 주류는 사도들과 예수님의 동생들이 주축으로 활동하던 예루살렘 교회입니다. 이를 유대 기독교라고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었지만 여전히 유대교 안에 머물렀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본래적으로 팔레스타인(히브리) 유대인들이기도 하고, 당시 정치적 상황 때문에 유대교 전통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볼 때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바울의 선교전략과 신학은 옳지 않았고, 현실적이지도 못했습니다. 여기서 문제의 핵심은 토라와 할례, 즉 율법이었습니다. 유대 기독교는 기독교인들도 여전히 그것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에 바울은 그것을 거부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만 전념했습니다. 이런 충돌이 일어나면서 갈라디아 지역의 교인들은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바울의 가르침으로는 뭔가 충분하지 못하다는 느낌이 든 겁니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바울은 사안이 심각하다고 보고,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가 회람해서 볼 수 있도록 편지를 썼습니다. 그게 갈라디아서입니다. 이 편지에서 바울은 유대 기독교의 가르침을 ‘다른 복음’이라고 지적하면서(갈 1:6) 그런 것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저주가 내리기를 바란다고 비난했습니다(갈 1:8). 바울이 그렇게 흥분하면서 저주 운운한 이유는 유대 기독교의 주장이 결국 복음의 본질을 훼손시킨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왜 그렇게 판단했을까요?
바울은 위에 인용한 갈 4:4절에서 하나님이 아들을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다는 말은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은 방식으로 세상에 태어나셨다는 뜻이고, 율법 아래라는 말도 예수님이 역시 당시 유대인들과 똑같은 삶의 조건에서 살았다는 뜻입니다. 이 구절은 당시 이단 중의 하나인 가현설주의자들을 배경으로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한 나머지 예수님의 실제 삶을 인정하기 어려웠습니다. 예수님은 실제가 아니라 그림자처럼 가현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이 여자의 몸을 통해서 세상에 태어났고, 우리와 똑같이 율법, 즉 모든 세상살이의 원리에 따라서 살았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진술함으로써 이런 가현설과의 사이에 분명한 선을 그었습니다. 바울은 한편으로 유대 기독교와도 싸우고, 다른 한편으로 가현설과도 싸웠습니다. 당시에 바울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고생하고, 별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가 뿌린 복음은 훗날 세월을 거치면서 기독교의 주류가 되어 오늘날의 기독교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5절- 속량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은 5절에서 예수님이 율법의 조건에서 생활한 이유가 우리를 속량하려는 데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속량이라는 단어는 건져낸다, 구해낸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를 당시 구약성경을 잘 알고 있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통해서 정확하게 이해해했을 겁니다. 출애굽 사건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 제국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시켰습니다. 이집트에서 벗어나 미디안 광야로 들어간 고대 유대인들은 더 이상 이집트 제국의 질서와 파라오의 칙령을 따르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속량하셔서 그들의 신분이 완전히 바뀐 겁니다. 이제 바울은 출애굽 사건에서처럼 기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율법의 통치와 질서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졌다는 사실을 선포한 것입니다. 더 이상 율법에 묶이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도 예루살렘의 유대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토라와 할례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바울이 볼 때 이런 주장은 미디안 광야로 나온 유대인들이 이집트로 돌아가야겠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겁니다. 예수님을 통한 속량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이런 주장을 하는 겁니다.
율법으로부터의 속량이 무슨 뜻인지를 실질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율법의 지배, 또는 이집트 파라오의 지배는 현실의 삶에서 작동되는 절대적인 세력입니다. 그게 오늘날 무엇인지는 제가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대한민국에서, 그리고 온 세상에서 무엇이 그런 절대적인 세력인지를 보십시오. <미생>이라는 드라마가 인기리에 방영되었다고 합니다. 그 드라마가 말하지 않더라도 지금 우리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정년, 노후설계, 갑을 관계, 하우스 푸어 등등의 단어로 알 수 있듯이 돈에 지배받고 있습니다. 절대적인 빈곤에 빠진 이들이야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경제 수준이 괜찮은 개인과 나라마저 그렇다는 게 문제입니다. 현대인들은 일종의 핵우산처럼 그런 세력 안에 머물러야 그나마 살아갈 용기를 얻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런 지배로부터 속량 하셨다는 겁니다. 아주 실질적인 이야기입니다.
그 사실을 바울은 ‘아들의 명분’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루터는 ‘자녀의 자격’(Kindschaft)으로 번역했습니다. 고대 유대인 사회에서 아들, 또는 자녀는 종과 반대 개념입니다. 종과 자녀의 차이는 얼마나 잘 먹고 잘 사냐, 하는 것에서 있는 게 아닙니다. 실제로는 자녀의 삶이 더 힘들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자유입니다. 자녀는 무슨 일을 하든지, 힘든 일을 하더라도 자유롭습니다. 그를 강제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기독교인이 자녀의 자격을 얻었다는 것은 이제 율법과 로마법으로 대표되는 모든 강압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유대 기독교 대표자들은 현실적인 유대교의 힘과 로마의 힘을 감안해서 여전히 토라와 할례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를 묵과할 수 없었습니다. 이들의 주장은 다른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훼손하는 일입니다. 기독교인들을 여전히 종으로 남아 있게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들에게 저주가 임하기를 바란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6절- 아빠 아버지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자녀의 자유를 얻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렇게 믿는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겉으로 확실하게 드러나는 표시도 없습니다. 유대 기독교 대표자들도 바울을 향해서 그렇게 반론을 펼쳤을 겁니다. 율법의 지배로부터 완전히 자유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그 증거를 대라고 말입니다. 오늘도 기독교인들은 그런 반론을 만납니다. 당신들이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다는, 즉 자유로워졌다는 증거를 대라고 말입니다. 그런 증거를 대려고 여러 가지 노력을 합니다. 교회당도 건축하고, 신비한 환상을 보려고도 하고, 삶이 새로워졌다는 말도 합니다. 그런 것들은 증거가 되지 못합니다. 사실 우리에게 보이는 증거는 없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아빠 파테르)라고 부르게 된 것을 증거로 삼습니다. 아빠는 당시 유대인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아람어로서 아버지라는 단어의 호격입니다. 아버지는 헬라어 페테르의 번역입니다. 두 가지는 똑같은 뜻입니다. 갈라디아 지역의 신자들이 아람어를 쓰는 사람도 있고, 헬라어를 쓰는 사람들도 있어서 바울이 두 단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여성신학자들은 아버지라는 단어를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하나님을 남성으로 연상하게 하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연히 성을 초월합니다. 성경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표현한 이유는 당시 아버지 상(像)이 전적인 신뢰의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대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신뢰는 앞으로 굶지 않고 병들지 않게 해줄 거라거나, 출세하게 해 줄 거라는 차원이 아닙니다. 말을 잘 들으면 상을 주고 듣지 않으면 벌을 준다는 차원도 아닙니다. 죽음까지 책임진다는 사실에 대한 신뢰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버림받음을 가리키는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자신의 운명을 맡겼습니다. 자신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가 실패일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었지만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는 말씀과 함께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자신의 죽음과 운명을 다 맡길 수 있는 대상이라는 차원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불렀습니다.
바로 그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죽음의 질서로부터 생명의 질서로 자리를 옮기셨습니다. 종의 세계로부터 아들의 세계로 존재론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바로 이 예수님으로 인해서 이제 그를 믿는 자들도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해방시키시는 하나님을 온전하게 신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마당에 여전히 토라와 할례를 지키라고 하는 것은 어둠이 지나 태양 빛이 찬란하게 빛나는 낮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손전등을 준비해야 한다고 닦달하는 것과 같습니다.
7절- 상속자가 되다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당시에 유대 기독교의 주장과 바울의 주장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지지를 받았을까요? 당연히 유대 기독교의 주장입니다. 바울의 주장은 지금 기독교의 토대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소수의 목소리였습니다. 유대 기독교의 주장에 설득력이 더 큰 이유는 그것이 더 그럴듯하고 효율적이기도 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교회생활에서도 그런 것이 세련되어 보이고, 뭔가 있어 보입니다. 반면에 바울의 주장은 뭔가 구체적이지 않아 보입니다. 손에 잡히는 게 없어 보입니다.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사실이 손에 잡히지 않는 겁니다. 갈라디아 지역의 기독교인들도 바울이 전한 복음만으로 교회생활을 하는데 한계가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 싸우기도 하고, 스캔들도 일어났습니다. 그럴 때 토라와 할례를 함께 지켜야 한다는 유대 기독교 대표자들의 주장이 그들의 마음을 흔든 겁니다. 뭔가 겉으로 보이는 실적을 쌓고 질서를 잡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들에게 변덕이 많거나 신앙 자체가 없어서 그런 게 아니라 바울이 말하는 그 신앙의 깊이를 충분히 따라갈 수 없어서 한눈을 판 것뿐입니다. 이런 일들은 지금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바울이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서 말한 것도 그들이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을 겁니다. 뜬구름 잡는 것처럼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종이 아니라 이제 아들이 되었으니까 하나님을 통해서 유업을 받을 사람이, 즉 상속자가 된 거라고 했습니다. 종은 아무리 노력해도 상속자는 될 수 없습니다. 아들만 아버지의 상속자가 될 수 있습니다. 율법의 종이 아니라 복음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이제 하나님을 통해서, 또는 하나님의 상속자가 된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음의 질문에 대답해보십시오. 우리가 상속받을 그 유산이 무엇일까요?
유업, 또는 상속이라는 단어도 종교적 메타포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유산을 돈이나 부동산과 연관해서 생각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상속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에게 일어났던 그것입니다. 부활이 가리키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것은 창조의 하나님께서만 행할 수 있는 궁극적인 생명입니다. 그것을 기독교는 종말론적 생명이라고 말합니다. 그 생명이 마지막에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핵심은 바로 그 생명의 상속자가 우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라고 요구하고 싶으신가요? 그걸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천국에 다녀왔다고 하면서 천기누설의 포즈를 취하는 사람들은 사기꾼이든지 자기 망상에 빠진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상속받을 그런 생명은 실제로 일어나야만 알 수 있는 하나님의 고유하고 절대적인 사건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상의 근원적인 것은 늘 비밀입니다. 앞으로 45억년이 지난 뒤 태양계가 사라지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거와 같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그런 종말론적 생명 사건이 미리 당겨져서 일어났다고, 그래서 그를 통해서 생명의 상속자가 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한계 상황입니다. 여기에 못 미쳐도 안 되고, 더 나가도 안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종이 아니라 자녀가 된 것에 집중하는 삶의 태도입니다. 이게 왜 오늘날 우리에게 절실한 문제일까요? 현대인들은 세속적인 율법의 종으로 살아갑니다. 율법적인 업적이 없으면 스스로 견디지 못합니다. 그것에 일희일비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아무리 강해도 거기서 완전히 벗어나기는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나약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오늘 본문 6절에서 말하듯이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에 ‘아들의 영’을 보내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생명의 상속자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야말로 영적으로, 심층적으로, 존재론적으로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그의 삶에 자유의 영역이 확대됩니다. 어디까지? 죽음 너머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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