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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라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라

(눅 8:26-39)

 

귀신들린 사람

     성경에는 귀신들린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종종 나옵니다. 오늘 우리는 그런 사람을 미쳤다고 말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흔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시절에 경주에서 살았습니다. 경주감리교회를 열심히 다녔습니다. 경주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마암을 고쳐!” 하고 외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정신 나갔다고 말했습니다. 더 어렸을 때는 서울의 삼선동과 천호동에서 살았습니다. 옷과 머리를 풀어헤치고 실성한 듯이 거리를 쏘다니던 사람들을 자주 보았습니다. 요즘은 그런 사람들을 거리에서 만나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대개는 정신병원에 들어갔거나, 수용시설에 감금되어 있을 겁니다. 실제로 60, 70년대에 미친 사람이 지금보다 많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때는 1950년에 일어난 6.25 남북전쟁의 후유증이 계속되고 있었을 때입니다. 전쟁은 많은 사람들을 극한의 정신적 혼란을 겪게 합니다. 지난 60, 70년대의 월남 전쟁과 2003년의 이라크 전쟁에 참가한 미국 군인들 중에서 이런 크고 작은 정신병 증세를 보이는 이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끔찍한 사태를 경험한 이들이 어떻게 제 정신을 갖고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금년은 6.25 남북전쟁 발발 6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한반도에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더 이상의 전쟁은 막아야 합니다. 전쟁은 우리 모두를 미친 사람으로 만듭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눅 8:26-39절에도 귀신 들린 사람이 나옵니다. 그 사람은 갈릴리 호수 남단에서 남동쪽으로 56km 지점에 있는 거라사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정신이 나가면 옷을 벗고 공동묘지에서 지냈습니다. 정신이 들면 동네로 들어왔겠지요. 예수님은 그에게 이름을 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군대라고 대답했습니다. 군대는 헬라어로 ‘레기온’이라고 하는데, 여단급 군대입니다. 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 사람은 어렸을 때 그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 군대를 통해서 악몽을 경험한 뒤로 정신이 이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람의 정신이 나가는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요즘 정신의학계에서는 주로 뇌의 문제로 접근합니다. 뇌가 고장 나는 이유는 또 살펴보아야겠지요. 유전적인 문제도 있겠고, 환경의 문제도 있을 겁니다. 한 순간의 큰 충격을 받아서 그렇게 될 수도 있고, 점진적인 과정으로 그렇게 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그걸 의식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습니다.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정신이 나간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의 경계선을 정확하게 긋기도 힘듭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람처럼 옷을 벗고 공동묘지에서 살면 미친 사람이고, 단정하게 옷을 입고 집에서 살면 정상이라고 말할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단지 밖으로 드러난 모습에 불과합니다. 정상적인 생활을 하더라도 악한 영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는 귀신들린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람은 군대라는 악한 귀신에 사로잡혔습니다.

     이 귀신 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지배하는 더러운 귀신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눅 8:29) 그 뒤로 예수님과 이 사람의 대화가 계속됩니다. 이 사람을 지배하는 더러운 귀신은 예수님 앞에서 더 이상 행패를 부릴 수 없다는 사실을 직감했습니다. ‘무저갱’으로 보내지 말라고 간구했습니다. 마침 그곳에 돼지 농장이 있었습니다. 귀신들이 돼지에게로 들어가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은 허락했습니다.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자 돼지 떼가 비탈길로 내리달려 호수에 빠져 몰사했다고 합니다. 이런 장면은 만화 같습니다. 귀신이 공간 이동이 가능한 실체처럼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런 묘사를 반드시 사실적인 것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성서기자는 우리의 삶을 파괴하는 어떤 존재론적 힘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뿐입니다. 작곡가들도 음악적인 영감이 자기에게 들어왔다거나 나갔다고 말합니다. 돼지는 유대인들이 혐오하는 동물이었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돼지와 함께 호수에 빠져 몰사했다는 사실은 유대인들에게 아주 자연스럽기도 하고 감동적으로 전달되었을 겁니다.

 

예수가 불편한 사람들

     돼지를 치던 사람들은 이런 소동을 보고 놀라서 동네로 도망쳤습니다. 사건 자체가 놀랍기도 했지만, 돼지를 지키지 못한 책임도 컸습니다. 그들은 동네로 들어가서 사건의 전말을 알렸습니다. 사람들이 사건 현장으로 달려왔습니다. 그들은 귀신 들렸던 사람이 이제는 정신을 올바로 차린 걸 보았습니다. 귀신 들렸던 이 사람은 옷을 제대로 차려 입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발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이것을 본 동네 사람들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을지는 불문가지입니다. 복음서 기자는 그들이 두려워했다고 합니다.(35 후) 두려워할 만합니다. 그들의 세계관과 전혀 다른 일이 벌어졌으니까요. 그들은 귀신 들린 사람이 거칠게 행동할 때 쇠사슬과 고랑으로 묶어두었습니다. 귀신들린 사람이 사회 질서를 파괴한다고 생각하고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려고 했겠지요. 그들은 쇠사슬과 고랑으로 사회를, 자신들의 자녀들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들의 판단은 옳은 걸까요? 쇠사슬이 필요할 경우도 있지만 그것이 남용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오늘도 그런 경우는 반복됩니다.

     우리나라에 양심적인 군입대 거부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런 저런 이유를 대고 교묘하게 합법을 가장한 채 국방의무를 피한 사회 지도급 인사들과는 달리 종교적 양심으로 군대를 거부한 사람들입니다. 주로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종파에 속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비폭력 평화주의에 근거해서 군대를 거부합니다.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의 실정법에 따라서 모두 쇠사슬에 묶였습니다. 몇 년 전에 이들을 구제하기 위한 군대체복무를 위한 법개정 운동이 일어났었습니다. 군대에 가는 대신 더 긴 시간을 사회시설에서 봉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자는 취지였습니다. 이를 적극적으로 반대한 분들이 한국의 대형교회가 중심이 된 ‘한기총’이었습니다. 저는 그들과 똑같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웠습니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거나, 더 나아가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인지 의심스러웠습니다. 그들의 태도는 귀신 들린 사람을 쇠사슬로 처리한 거라사 사람들과 다를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귀신들린 사람이 정신을 바로 차린 현장을 목격했다면 당연히 모두 기뻐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행하신 예수님을 크게 환영하고 보답해야만 했습니다. 거사라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떠나주기를 간구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불편하게 생각했다는 말이겠지요. 무엇이 불편했을까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쇠사슬의 논리가 더 이상 용납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전쟁 불사론은 평화주의를 불편하게 생각합니다. 어느 집단이나 매파는 비둘기파를 불편하게 생각합니다. 다른 하나는 귀신들린 사람이 다시 제 정신을 차렸다는 사실 자체입니다. 사람은 어떤 집단을 미워하는 것으로 심리적 카타르시스를 경험합니다. 중세기의 마녀사냥이나 십자군 전쟁이 모두 이런 증오심을 바탕에 둔 사건들입니다. 크고 작은 이런 일들은 오늘도 반복됩니다. 그들에게 예수님과 예수님의 가르침은 불편합니다.

     예수님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열광한 것 같지만 사실 예수님은 고향에서도 별로 인정을 받지 못할 정도로 당시의 세상과 충돌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낭떠러지에서 떠밀릴 뻔한 적도 있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집이 있지만 당신은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한탄하신 적도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쫓기다가 결국 십자가 자리까지 쫓겼습니다. 예수님은 거라사의 교양 있는 시민들에게 섭섭하다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순순히 배를 타고 떠나셨습니다. 마침 그 순간에 군대 귀신이 들렸다가 예수님에게서 치료를 받아 정신을 올바로 차린 이 사람은 예수님을 따라가고 싶어 했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거라사의 똑똑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불편하게 생각했는데, 그들에 의해서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던 이 사람은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누가 미친 사람이고 누가 제 정신으로 살아가는 사람일까요? 누가 더 이성적인 사람일까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지금 예수님을 믿으니까 자신들은 당연히 예수님을 거부한 동네 사람이 아니라 정신을 바로 차린 사람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당연히 그래야만 합니다. 그러나 교회에 나와서 교회가 요구하는 경건생활을 유지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무시하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는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저는 앞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행한 반 기독교적인 일들을 말씀드렸습니다. 십자군 전쟁, 마녀사냥, 평화주의자들에 대한 박해입니다.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은 아프리카 흑인들을 노예로 부렸습니다. 백인 귀부인들이 남자 흑인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옷을 갈아입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흑인들을 자신들과 똑같은 인간이 아니라 개나 소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독실한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확신하고 있는 세계관들과 삶의 방식들이 얼마나 반(反)생명, 반(反)기독교적일 수 있는가를 생각하면 두렵기 짝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종말론적 심판을 믿는다면 지금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돌아봐야 합니다. 겉으로만 예수님을 믿을 뿐이지 속으로는 그를 불편하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가 하고 말입니다. 겉으로는 정신이 말짱한 것 같지만 온갖 세속적인 정신에 귀신들린 사람은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따라오겠다고 하는 귀신 들렸던 사람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를 집으로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따라오겠다는 그를 귀찮게 생각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일부러 부르기도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로 따라나설 수는 없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각자는 자신이 살아야 할 몫이 따로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이 맡아야 할 몫이 다른 데에 있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말하라.”(39 절a) 누가복음 기자는 이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고 말합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말씀과 이 사람의 행동을 약간 다르게 표현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말하라고 했지만, 이 사람은 ‘예수님’이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온 성내에 전파했다고 합니다. 복음서 기자에게는, 그리고 초기 기독교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일이 바로 예수님의 일이었습니다. 이 사람의 사명을 통해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사명을 확인했습니다. 그 사명은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전도의 사명

     귀신들렸던 사람이 다시 돌아가야 할 거라사의 상황은 별로 좋지 않습니다. 그곳 사람들은 이 사람에게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마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과 비슷합니다. 이유가 어디 있든지 안티 기독교 운동이 벌어지기까지 하는 상황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큰 일을 전할 수 있을까요? 제가 보기에 상황은 두 번째 문제입니다. 우선적인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큰 일에 대한 경험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경험이 있다면 그는 상황이 어떻든지 당연히 본문의 이 사람처럼 그것을 전할 것입니다.

     누가복음 기자가 전하고 있는 ‘하나님의 큰 일’이 무엇일까요? 답은 이미 나왔습니다. 이 사람이 레기온이라는 더러운 군대 귀신으로부터 해방된 것입니다. 그의 운명이 얼마나 비참했을는지는 긴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분명합니다. 레기온이라는 악령에 사로잡힐 때마다 정신을 놓게 되었습니다. 옷을 벗고 공동묘지로 달려갔습니다. 사람들이 쇠사슬로 묶었지만 그는 쇠사슬까지 끊고 광야의 공동묘지로 달아났습니다. 그도 원하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의 영혼이 악한 영에 지배받은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자신의 가장 깊은 내면의 세계를 인정한 유일한 분을 만난 것입니다. 거라사 지역에 내로라하는 선생들이 많았지만 아무도 이 사람의 정신세계를 이해하지도, 인정하지도 않았습니다. 단순히 치료를 받아야 할 대상으로, 쇠사슬로 묶어놓아야 할 불쌍한 대상으로만 여겼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통해서 이 사람의 무의식에서 작동되던 피해망상은 치료되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자기를 학대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이제야 판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보다 더 놀라운 일은 없습니다. 그는 구원받은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일을 그는 거라사 곳곳에 다니면서 전했습니다. 거라사의 골칫덩어리로 간주되던 이 사람이 이제는 진리의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우리 자신에게 물어봅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큰 일을 행하셨을까요? 그런 경험이 우리에게 있을까요? 그런 경험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우리는 더러운 군대 귀신으로부터 해방되었나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그렇기를 바랍니다. 혹시 여전히 레기온에게 지배받는 것은 아닐까요? 그걸 제가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 스스로도 판단하기 쉽지 않을 겁니다. 일반적인 관점으로만 말하면 지금 현대인들은 일종의 신자유주의라는 귀신에게 지배를 받습니다. 이것을 귀신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생명을 근본에서 파괴할 뿐만 아니라 개인이 거부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특히 남북분단 체제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든 남북한 주민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군대 귀신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60년 이상 분단된 체제를 평화 체제로 바꿔보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은 더러운 귀신의 작용이 아니고는 해명이 안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벌거벗고 공동묘지에서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귀신의 사로잡힘에서 자유와 해방으로 끌어주실 수 있습니다. 이미 여러분은 그런 세계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전해야 합니다. 그것을 삶으로 살아야 합니다. 매일 전도지를 돌리거나 메가폰을 들고 큰 길에서 외치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처한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평화를 외치십시오. 다른 사람들이 불편하게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전해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성령강림절 후 넷째 주일, 6월20일)

누가복음 8:2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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