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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해체된 확신, 더 깊은 신뢰 (욥 42:1–6 / 고후 1:1-9)

2025년 1월 25일 예배영상 https://www.youtube.com/live/13FN8bZJCXA?si=fiMLcfeKDsSutqW2

 

▣ 들어가는 말

-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라는 오해

우리는 흔히 신앙을 이렇게 말합니다. “의심하지 않는 믿음” “흔들리지 않는 확신” “설명할 수 있는 신앙” TV 광고 문구가 생각나는군요.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 시○○ 침대~” 그러나 인간의 삶은 그렇게 단단하지 않습니다. 삶이 흔들릴 때, 신앙도 함께 흔들립니다. 성경 속의 신앙인들은 대부분 흔들렸고, 말을 잃었고, 자기 확신이 무너진 절망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다시 만납니다. 신앙은 단단해질수록 건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때로는 부서지고 흔들릴 때 더 진실해지는 것 같습니다.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이렇게 말합니다. “해답을 찾으려 하지 말고, 질문을 사랑하십시오. 언젠가, 해답 속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해답을 소유하는 일이 아니라, 끊임없는 질문 안에 머무는 것 아닐까요.

아프리카 현대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치누아 아체베의 작품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는 “오콩코는 아홉 마을과 그 너머까지도 잘 알려져 있었다. 그는 자신의 두 손으로 건실한 업적을 쌓고 명예를 일궈 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이 이야기는 19세기 말 나이지리아의 한 부족 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주인공 오콩코의 아버지는 가난했고 빚을 갚지 않고 음악과 말을 좋아하는 마을에서 ‘약한 남자’로 조롱받던 사람이었습니다. 오콩코는 그런 아버지와 닮지 않기 위해 평생을 노력합니다. 강해야 하고, 흔들리지 않아야 하며, 감정과 연민은 나약함의 모습이니 드러내지 말아야 하고 철저하게 전통을 지키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마을에 서구 제국주의와 선교사들이 들어오면서 그들의 전통과 마을은 서서히 무너져 내리지요. 그 속에서 오콩코는 강해야 한다는 확신, 전통은 변하지 말아야 한다는 확신, 흔들리면 곧 패배라는 확신으로 자신과 공동체를 지탱하려 합니다. 그러나 세계가 변하는 순간, 그 확신은 그를 지켜 주지 못합니다. 그 확신이 무너질 때, 오콩코의 삶도 함께 무너집니다. 결국 오콩코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지요.

이 소설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분명합니다. “확신이 무너질 때, 우리는 무엇을 붙드는가?” 오콩코가 붙들었던 것은 확신이었지, 신뢰는 아니었습니다. 확신은 내가 쥐고 있는 것이지만, 신뢰는 나를 맡기는 것입니다. 확신은 흔들림을 거부하지만, 신뢰는 흔들림 속에서도 관계를 놓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콩코는 끝까지 확신을 지키려 했고, 그 결과 그는 더 이상 세계와 대화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신앙에서도 비슷한 장면을 마주합니다. 우리는 종종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말하지만, 성경이 증언하는 믿음은 언제나 확신의 붕괴를 통과한 신뢰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목적지를 알지 못한 채 떠났고, 시편의 시인은 확신 대신 탄식을 드렸으며, 십자가 앞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확신과 기존의 이해가 완전히 무너져 내린 자리에서 다시 관계로 초대받지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 21:15)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는 말합니다. 무너져야 할 것은 신앙이 아니라, 신앙을 붙들고 있다고 착각했던 확신일 수 있다고. 그리고 그 자리에 비로소 남는 것은, 설명할 수 없어도 맡길 수 있는 더 깊은 신뢰라고 말입니다. 오늘 우리 역시, 내가 그리도 애쓰며 지켜 온 신앙과 삶이 집착과 확신인지, 아니면 진정한 신뢰인지 물어야 하지 않을까요.

 

▣ 신명기 신학을 넘어

- 인과응보의 신학

욥기는 단지 “의인이 왜 고난받는가?”라는 질문을 다루는 것이 아닙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리고 신앙의 토대가 무엇인가를 묻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일관되게 설명 가능한 하나님을 전제합니다. 고난은 죄의 결과이며 축복은 의로움에 대한 하나님의 대가라는 것이지요. 이 도식은 신명기의 인과응보 신학의 도식입니다. 이 신명기 신학이 틀린 것이 아니라, 이것만이 절대화될 때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신명기는 왕정 후기–포로기 전후의 위기 상황을 배경으로 형성·편집되었습니다. 이 시기 이스라엘은 다음의 질문 앞에 서 있었습니다. “우리는 왜 땅(조국)을 잃었는가?” “여호와는 패배한 신인가?” “우리 민족(공동체)은 어떻게 다시 살아남을 수 있는가?” 이에 대한 신명기 신학의 응답은 분명합니다. 믿고 순종하면 생명을 얻고 번영하게 되지만, 믿지 않고 불순종하면 저주받고 멸망하게 된다. 이 구조는 단순한 도덕 공식이 아니라, 역사적 재난을 신앙적 언어로 해석하게 해 주었고 혼란 속에서 공동체의 윤리적 기준을 재정립했으며 “우리는 여전히 선택된 백성이다”라는 긍정적 정체성을 갖도록 했습니다. 개인이 아닌 공동체 유지를 위한 신학이었지요. 다시 말해서 신명기 신학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와 역사적 배경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입니다. 의로운 자가 고난받는 현실. 악인이 번성하는 경험. 설명되지 않는 재난과 고통… 이때 인과응보는 더 이상 설명이 아니라 폭력이 되고 말지요. 고난받는 이에게 이렇게 말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너의 고통은 죄의 결과다” “네가 죄를 지었을 것이다.” 얼마나 잔인한 말입니까. 자신과 타인에 대한 끔찍한 폭력과 혐오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욥기가 등장한 것입니다.

 

- 시대의 변화와 신학의 대응

욥기는 신명기 신학에 대한 철저한 고뇌와 갈등, 성장을 그리고 있습니다. 신명기 신학을 확신하고 있는, 그 전통에 철저히 뿌리내리고 있는 이들의 입을 빌립니다. 욥의 이유 없는 고난에 대해 욥의 친구들(정통 신명기 신학자들) 엘리바스, 빌닷, 소발의 논리는 일관됩니다. ‘하나님은 공의롭다.’ ‘고난은 죄의 결과다.’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들의 신학 자체는 틀리지 않습니다. 다만, 현실, 시대정신을 설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상황을 강조하기 위해, 욥기는 의도적으로 욥에 관해 특정한 조건을 부여합니다. “흠 없고 정직하다.” 신명기 신학으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극단적인 예를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고난은 도덕적 행위와 무관하다. 하나님도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특별한 의도나 의미가 있는 게 아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을 자신의 사고의 틀 속에 가둘 수 없다. 이것은 새로운 교리를 추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삶에 대한 신학의 관점이 바뀌는 놀라운 사건인 겁니다.

 

- 무너진 확신의 자리에서…

포로기 이전과 직후의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왜 우리가 망했는가?” 여기에 신명기 신학은 답합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로기 이후의 질문은 달라집니다. “우리는 이미 회개했고 돌아왔는데, 왜 여전히 고난받는가?” “율법을 지키는데도 왜 삶은 회복되지 않는가?” “의롭게 살아도 왜 삶은 무너지는가?” 이 질문들 앞에서 인과응보 신학은 위로가 아니라 오히려 깊은 상처가 된 것이지요. 신앙의 언어가 얼마나 끔찍한 폭력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런 배경에서 욥은 말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 이 고백은 신앙이 축적된 결과라기보다, 오히려 무너진 이후에야 가능해진 언어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확장되었다거나 불분명하던 확신이 더 분명해졌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설명하고 정당화할 수 있다고 믿었던 모든 신앙적, 신학적 확신과 신념이 완전히 무너져내린 자리에서, 더 이상 개념으로 붙들 수 없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욥은 고난의 이유를 알게 된 것이 아니라, 이유를 요구하던 자기 인식의 구조, 틀이 해체되는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욥기는 예언서가 아니라 지혜문학입니다. 이는 중요한 역사적 신호입니다. 예언서가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를 묻는다면, 지혜문학은 “이 현실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습니다. 포로 이후 이스라엘은 더 이상 ‘역사적 승리’로 하나님을 증명할 수 없었고

일상의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사유하고 경험해야 했습니다. 욥기는 소위 승리자, 엘리트, 성공의 신앙이 아니라 패배한 자, 대다수 시민의 신앙, 성취라는 기준에서 벗어난 신앙의 언어, 신학입니다.

『시지포스 신화』에서 알베르 카뮈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세계 앞에서도 인간은 살아가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계 역시 부조리의 세계입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한 채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을, 신앙을 떠나지 않습니다. 설명이 무너진 자리에서, 관계는 오히려 더 깊어집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42:6) 이 회개는 도덕적 잘못에 대한 참회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설명할 수 있다고 여겼던 자기 확신을 철회하는 고백입니다. 설명되지 않는 하나님 앞에서 욥은 처음으로 하나님을 ‘대상’이 아니라 ‘현존’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만나고 경험합니다. 이 회개는 죄책의 언어가 아니라, 방향 전환의 언어이며, 하나님을 소유하려 했던 신앙에서 하나님 앞에 머무는 신앙으로의 이동을 뜻합니다. 설명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공허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욥은 더 이상 하나님에 대해 말할 수 없게 되었기에, 비로소 하나님 앞에 침묵 속에 서는 존재가 됩니다. 이 침묵은 포기가 아니라 신뢰이며, 신앙의 실패가 아니라 더 깊은 신앙의 문턱입니다. 무너진 확신의 자리는 신앙이 끝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을 붙들려는 욕망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붙들리는 삶이 시작되는 자리입니다.

 

▣ 하나님만 의지하다!

- 고난의 의미

오늘 본문의 고린도후서는 바울의 가장 개인적이고, 동시에 가장 방어적인 서신입니다. 고린도 교회 일부는 “약하다”, “말이 시원치 않다”, “고난받는 사도는 진짜가 아니다”라고 평가하며, 바울의 사도직을 의심했습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는 시대 정신을 반영한 능력과 성공, 카리스마가 중심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의 고난은 단지 개인의 불행이 아니라, 그의 사도로서의 정당성 자체를 부정당하는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이는 욥기의 “의인이 왜 고난받는가?”라는 질문과 닮아있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신명기 신학으로 욥의 고난에 문제를 제기합니다. 너의 말처럼, 너가 의롭다면, 죄가 없다면, 너의 고난은 무엇이냐? 하나님은 의인에게 복을, 악인에게 벌을 내리시는 분이 아니냐. 너가 죄가 없다는 주장은 곧 하나님을 모욕하는 행위다. 너는 죄인이다.

마찬가지로 고린도 교회는 바울을 향해 질문합니다. 당신이 진짜 예수의 제자 사도라면, 어떻게 당신의 삶이 그리도 비루할 수 있는가. 당신은 진짜가 아님이 틀림없다. 당신은 가짜다. 당신이 진짜 사도라면, 능력과 성공과 기적을 보여달라.

 

-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 1:9)라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이 고백을 아시아, 곧 에베소 사역 중 겪은 극심한 위기 이후에 남깁니다. 그는 단순한 박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라고 표현할 만큼 사역의 실패와 죽음의 공포를 동시에 경험합니다. 그는 육체적 위협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말 나를 부르신 것이 맞는가’라는 근본적인 의문에까지 이른 상태에 다다릅니다.

이 상황에서 바울은 자신의 고난을 변명하지 않습니다. “이 고난이 결국 성공으로 이어질 것이다”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고난의 의미를 이렇게 재정의합니다. 이 고난은 하나님을 더 잘 믿게 만든 훈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더 이상 의지할 수 없게 만든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을 ‘도와주시는 분’으로 신뢰하게 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이미 자신은 끝났고, 더 이상 회복할 힘도, 설명할 언어도 남아 있지 않은 자리에서, 하나님만이 유일한 근거가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그 어떤 것으로도, 자기 사도직의 정당성이나 자신이 전하는 믿음의 확실한 근거를 보여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 순간에 그는 깨닫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철저히 실패한 자로 죽어간 예수를 되살린 것은 오직 하나님뿐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의 실패, 그의 연약함, 그의 고난… 그 모든 것은, 자신이 실패자임을 패배자임을 드러내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할 그 어떤 확신도 없습니다. 결국 그가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밖에 없음을 깨닫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바울의 신앙이며, 이는 강해진 신앙이 아니라 모든 것이 무너진 이후에야 가능해진 신앙의 고백, 그의 신학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넘어 진정으로 그분을 신뢰하게 된 이의 언어입니다. “귀로만 듣던 주를 이제 눈으로 뵈옵나이다.” 욥의 고백과 같지 않습니까.

 

▣ 나가는 말

- 우리 존재의 기반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고후 1:8)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힘에 겹도록’은 단순히 많이 힘들었다는 표현이 아니라, 감당의 한계를 넘어선 상태, 인간적 계산과 통제 자체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지점을 가리킵니다. 이어지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1:9)라는 표현에서 ‘사형 선고’는 실제 판결이라기보다, 자기 존재에 대한 최종적인 절망적 인식을 뜻합니다. 이는 죽음의 위협만이 아니라, 사도로서의 사명 이해, 영적 능력, 사역의 의미에 대한 자기 확신이 모두 끝났다는 자각이지요.

“나에게는 평온도 없고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다만 불안만이 있구나”(욥 3:26) 모든 것을 잃고 고통과 절망 속에 있는 욥의 모습도 같습니다. 바울과 욥은 똑같이 더 이상 자신의 믿음, 헌신, 소명, 삶의 의미… 그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는 지경에 이릅니다.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져 내린 것이지요. 자신을 지탱하고 있던 근거, 토대가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이 철저한 해체의 자리에서 바울은 고난의 목적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1:9) 여기서 ‘의지하다’는 단순한 신뢰 감정이 아니라, 존재의 기반을 어디에 두고 사는가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도와주는 분’으로 의지하게 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지탱하던 모든 기반이 사라진 이후에야 하나님만이 유일한 근거가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하나님만 의지합니다” 이 고백은 신앙을 능력이나 확신의 문제로 오해하는 모든 태도에 대한 반박이며, 신앙이란 하나님을 붙잡는 인간의 힘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께 붙잡힐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드러냅니다. 이 고백은 약한 자의 자기 위로가 아니라 강해지려는 신앙에 대한 급진적 비판입니다. 자기의 확신을 의지하던 신앙 자체를 해체함으로써 진실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방식을 말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가진 많은 신앙적 확신은 실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라기보다, 하나님을 다룰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을지 모릅니다. 기도하면 이렇게 응답하실 것이다. 믿으면 이런 결과가 올 것이다. 하나님은 반드시 이편에 서실 것이다. 이 확신들이 무너질 때, 우리는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수단으로 삼지 않는 신뢰가 시작됩니다. 해체된 확신은 하나님을 잃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 이상 도구로 쓰지 않게 되는 은혜입니다. 진정한 믿음, 신앙, 신과 동행한다는 것은 삶의 조건과 환경에 상관없이 그분만이 우리 존재의 기반이라는 것, 내가 아니라 그분이 나를 잡고 계신다는 신뢰로 사는 것 아닐까요. 그 평안함이 저와 여러분 안에 깃들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우리에게 기적 같은 생명과 삶을 허락하시고

우리 존재의 기반이 되어주시는 하나님,

우리의 고집과 아집, 확신을 내려놓게 하시고

오직 주님을 신뢰하게 하소서.

주님 안에서 안식을 얻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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