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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와 그리스도인

mms://wm-001.cafe24.com/dbia/070708.mp3하나님 나라와 그리스도인
2007.07.08. 누가 9:51-57

머리 둘 곳
저는 간혹 예수님이 오늘 한국에서 목회를 하신다면 그 결과가 어떨까 하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는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시고, 불치병도 고치시고, 심지어는 오병이어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기적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바리새인들의 허위의식을 꿰뚫으시고, 그의 사랑은 세리와 죄인들까지 품으셨습니다. 모든 면에서 완벽한 교회 지도자의 모습을 갖추셨습니다. 소위 말해서 ‘능력의 종’이었습니다. 이런 분이 목회를 한다면 당연히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모여들겠지요. 그게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러나 복음서가 보도하고 있는 예수님의 삶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예수님의 목회가 별로 성공적이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 그런지 보실까요?
단적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했다는 사실은 바로 예수님의 목회가 실패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 하는 절규를 내뱉으면서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몇몇 사람을 제외하면 아무도 예수님의 죽음을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 처형은 누가 보더라도 가장 저주스런 죽음이었는데, 누가 거기에 주목하겠습니까? 십자가 처형에서만이 아니라 공생애 중에서도 예수님에 관해서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습니다. 간혹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 적이 있지만 그들은 그저 호기심으로만 예수님을 찾은 것입니다. 그 호기심이 없어지면 그들은 썰물처럼 사라질 사람들이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주변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도 바로 이 사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이제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길을 떠나시려고 했습니다. 이 여행 기록이 누가복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아주 큽니다. 오늘 본문이 시작하는 9:51절부터 19:27절까지입니다. 북쪽 갈릴리에서 남쪽 예루살렘으로 여행하려면, 서울에서 대구에 오려면 충청도를 거쳐야 하듯이 사마리아를 거쳐야만 했습니다. 대충 3일 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미리 선발대로 보내서 사마리아의 형편을 알아보았습니다. 사마리아는 유대와 사이가 나빴기 때문에 미리 분위기를 파악하는 게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신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아무리 큰 능력을 행하고 귀한 가르침을 주었다고 하더라도 사마리아인들의 지역감정을 극복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진심으로 따르는 사람들이 없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상황이 오죽 심각했으면 누가복음 기자가 58절에서 예수님이 자조 섞인 한탄을 하셨다고 보도하겠습니까?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 예수님은 자신의 처지를 여우나 새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절대고독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외로워하셨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 말씀은 외로움에 지친 어떤 한 남자의 자기연민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그리워서 내뱉은 하소연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깊은 경지에 이른 사람은 사람이 없을수록 더 편안합니다. 예수님의 외로움은 인간적인 게 아니라 영적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머리 둘 곳조차 없다는 말씀이 언제 나왔는지를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예수님에게 “저는 선생님께서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57절) 하고 말했을 때였습니다. 얼마나 감격스런 고백입니까? 이런 정도의 고백을 들으면 성공한 지도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말이 비어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빈말입니다. “믿습니다!” 하고 힘을 주지만 실제로는 무엇을 믿는지도 모르는 것처럼 이 사람은 아무 것도 모른 채 “따라가겠습니다.” 하고 큰소리쳤습니다. 그런 빈말은 울림이 크면 클수록 공허만 깊어집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머리 둘 곳조차 없다고 말씀하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

빈말
누가복음 기자는 그 말이 왜 빈 것인지 59-62절에서 두 사람의 경우를 예로 들어서 설명합니다. 첫째, 예수님이 한 사람에게 “나를 따라오너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선생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 장례를 치르게 해주십시오.” 이 사람의 대답은 합리적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싶지만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으니까 먼저 장례를 치르겠다는 것입니다. 이 대답만으로는 그 상황이 어떤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인지 아니면 죽음이 임박한 것인지, 또는 언젠가는 돌아가실 것이라는 예측인지, 정확하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라고 하더라도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사람이 당장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즉 그는 입으로만 따른다고 말했을 뿐이지 실제로는 그럴 마음이 별로 없었습니다.
이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신 예수님은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 나라의 소식을 전하여라.” 장례는 살아있는 사람이 죽은 자를 땅에 묻는 일인데, 어찌 죽은 자들에게 맡겨두라고 하셨을까요? 사람은 살아있다고 하나 결국은 죽을 운명입니다. 시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누구나 죽을 자이며, 이미 죽은 자인지도 모릅니다. 또는 하나님 나라에 속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리 살아있다고 하나 이미 죽은 사람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소식을 전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여러분은 전도하라는 뜻이로구나 하고 생각하실 겁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가거나 아니면 최소한 예수 믿지 않는 이웃을 교회로 데리고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하겠지요. 그것은 이 말씀을 좁은 의미로만 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곧 하나님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나라’이며, ‘통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를 전하라는 말은 곧 하나님을 전하라는 말과 똑같습니다. 하나님, 혹은 하나님의 통치, 또는 하나님의 나라는 물건이나 수학공식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꼭 짚어서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하나님의 나라를 비유로만 설명하셨습니다. 탕자의 비유, 가라지의 비유, 포도원 주인의 비유, 값비싼 진주를 발견한 장사꾼 등이 그것입니다. 이런 비유가 말하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계산과 구도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생명사건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하나님의 나라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이 자기의 생각대로 움직이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기도 많이 한 사람이나 착한 사람에게 복을 더 내려주시고, 게으른 사람이나 나쁜 사람에게 벌을 내려주시기를 기대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혀 다르게 전하셨습니다. 예컨대 하루에 열 시간 일한 사람이나 한 시간 일한 사람이나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일당으로 주는 포도원 주인의 행동을 하나님 나라와 연결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킨 바리새인이나 지키지 못한 세리들이나 별로 차이가 없다고 설명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런 것과 전혀 차원이 다른 온전한 기쁨이며, 평화이고, 희망이며 사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을 위해서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안식일이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이나 성전을 허물라는 말씀은 모두 유대인들이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했던 율법과 종교체계의 상대화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우리에게 일어난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에 들 리가 없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니 그것을 따르기도 싫은 거지요. 아무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 하지 않았으며, 예수님을 따르기도 원치 않았습니다. 그냥 겉으로만 따르는 척 했을 뿐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예수님은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기고 하나님 나라를 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네 마음대로 조작하고 다룰 생각을 하지 말라는 아주 강력한 도전의 말씀이었습니다.
둘째, 61절에 또 다른 종류의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저는 선생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집에 가서 식구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게 해주십시오.” 언제일지 모르는 아버지의 장례를 핑계 삼아 예수님의 말씀을 회피하려했던 앞 제자의 주장보다는 조금 더 설득력이 있는 주장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출가해야 하는데, 그렇다면 식구들과 작별 인사라도 나누어야 하는 건 당연합니다. 만약 제가 예수님의 입장이라고 한다면 잘 생각했네, 가족들과 인사 잘 나누고, 준비 단단히 한 다음에 나를 따라오게, 했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좀 당혹스럽습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 예수님의 이런 말씀은 너무 심해보입니다.
복음서의 다른 구절에 보면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면 가족을 비롯해서 모든 걸 버려야한다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이런 말씀을 문자의 차원에서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기독교가 자칫 가족 해체주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가족과 친구를 비롯한 가까운 인간관계를 거부하거나 훼손시키지 않습니다. 본문의 상황은 그것을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쟁기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잘 생각해보십시오. 쟁기를 든 사람은 앞을 보아야 쟁기질을 바르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마음이 다른 데로 쏠려있기 때문에 자꾸 뒤를 돌아봅니다. 가족들에게 인사를 나누겠다는 이 사람의 주장은 핑계일 뿐입니다. 그에게는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마음이 아예 없었다고 보는 게 옳습니다. 학기말 시험을 준비하겠다고 도서관에 들어간 학생이 친구와 인터넷 채팅을 하겠다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조금 냉정하게 보면, 예수님 앞에서 핑계를 댄 이 사람들은 이상한 게 아니라 아주 정상적인 사람입니다. 그들에게 믿음이 없어서 그런 핑계를 대는 게 아닙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와 우리의 현실 사이에는 우리가 쉽게 건널 수 없는 단절이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잘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아예 생각하기도 싫어하고 생각할 줄도 모릅니다. 저는 바로 앞에서는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비유가 그 당시 사람들에게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들의 경우와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제가 고등학생인 제 막내딸에게 창조와 종말을 생각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합시다. 어떻게 듣겠습니까? 그 아이에게 이런 말은 현실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 관심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 열심히 나오고 있잖아요, 사회봉사 열심히 하잖아요, 하고 대답하겠지요. 예, 좋은 일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와 일치하는 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 스스로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생명사건입니다. 거기에 우리가 전적으로 의존하면서 살아가고 있나요? 그게 가능한가요? 누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나요? 그것이 우리에게 현실로 느껴지나요? 교회에 나온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나라를 실질적으로 경험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대개는 그 내용도 잘 모른 채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빈말만 합니다. 이런 점에서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 당시나 오늘이나 똑같습니다.

키리에 엘레이송!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도 외면 받고 있는 이 상황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엄격하게 말한다면 사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별로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떠들어도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테니까요. 노아 홍수 때도 사람들은 노아의 외침에 귀를 막았습니다. 그들이 이상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홍수 사건이 그들에게 현실로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당장 눈앞의 현실에만, 손과 발로 확인할 수 있는 현실에만 마음을 고정시키기 마련입니다. 물론 우리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우리는 이런 상황을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과 구별됩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게 아니라 소돔 성에 열 명의 의인이 필요했던 것처럼 소수의 사람들만으로도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들을 보십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예민한 영성으로 기다리는 소수의 사람들로 남아야 합니다.
우리의 마지막 질문은 어떻게 영성이 예민한 사람들로 남을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왕도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시인이 되려면 좋은 시를 많이 읽고 쓰고, 더 나아가 삶의 깊이를 생각해야 하듯이, 하나님 나라를 감지할 수 있는 영성의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깊이 있게 공부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상을 정확하게 보려고 노력해야겠지요. 진리와 생명의 영이신 성령의 도움에 의지해야겠지요. 우리가 비록 소수라 하더라도 영성이 예민한 사람들로 남아 있는 한, 머리 둘 곳조차 없다 한탄하신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소수의 제자들을 통해서 역사에 살아남았듯이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하나님이 이 세상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키리에 엘레이송!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아멘.
누가복음 9:5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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