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와 제자도
마 4:12-23, 주현절 셋째 주일, 2014년 1월26일
12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13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14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15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18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20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21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22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
기독교 신앙에서 예수님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분인데도 예수님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고 있는 분들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어렴풋이 알고 있거나 오해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분에 대한 간단한 정보는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고향이 나사렛이고, 출생지는 베들레헴이고, 아버지는 목수인 요셉이며 어머니는 마리아입니다. 결혼은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으며, 서른 살에 출가하기 전까지는 목수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출가 후 2,3년 동안 유대의 유랑 랍비로 활동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당시 유대 지역의 로마 총독이었던 빌라도 법정에서 심문당한 뒤 반역죄에 해당되는 징벌인 십자가 처형을 당했습니다. 이게 일반 역사가들이 말할 수 있는 예수님의 일생에 대한 간략한 내용입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한 인물에 대한 하나의 정보입니다. 이런 정보로 예수님을 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생각하셨고, 무엇을 믿었으며, 무엇을 선포했는지, 무엇에 자신의 운명을 걸었는지를 아는 게 중요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무엇’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는 모두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까 내가 무엇으로 비교할까...’(눅 13:18)라는 구절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포도원 주인, 지혜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 등등이 다 하나님 나라를 가리키는 비유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교회에서는 보통 천당(天堂)이라는 말로도 사용됩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구호가 이를 대변합니다. 천당은 오해의 소지가 많은 단어입니다. 하늘 천, 집 당이라는 한자로 표기되니 하늘의 어떤 공간으로 유추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한 공간을 하나님 나라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복음서에 천당과 비슷한 의미의 천국이라는 말은 나옵니다. 오늘 설교 본문 마 4:17절은 이렇습니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여기서 천국은 헬라어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의 번역입니다. 바실레이아는 나라, 우라논은 하늘을 뜻하는 ‘우라노스’라는 명사의 2격 변화입니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이 천국(天國)으로 번역될 수 있긴 하나 자칫하면 천당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병행구인 막 1:15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는 헬라어 ‘바실레이아 투 데우’의 번역입니다. 마가복음은 마태복음이 사용한 우라노스가 아니라 데우를 사용했습니다. 이를 마태복음처럼 한자로 표기하면 신국(神國)이라고 해야 됩니다. 마태복음의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을 마가복음처럼 순 우리말로 표기하면 하늘 나라로 번역해야 합니다. 마태복음의 천국과 마가복음의 하나님의 나라는 전달되는 뉘앙스가 다릅니다. 우리말 성경이 번역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나 일관성이 떨어지는 건 분명합니다. 어쨌든지 신약언어인 헬라어로만 본다면 천국과 하나님 나라는 똑같은 의미입니다.
우리의 본문인 마 4:17절로 돌아가겠습니다. ‘이때부터 ...’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다고 합니다. 이때는 12,13절이 전하고 있듯이 요한이 체포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 마을인 가버나움에서 살기 시작하셨을 때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출가하고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뒤에 즉시 활동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당시는 세례 요한이 이미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면서 역동적으로 활동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부도덕한 삶에서 돌아서라고 외치면서 자신에게 몰려오는 이들을 향해서 ‘독사의 자식들아!’ 하고 독설을 날렸습니다. 예수님도 세례 요한의 메시지로 세상이 새로워지기를 기대하셨을 겁니다. 이런 기대와 달리 당대의 선지자요 의인이었던 세례 요한은 헤롯 정권에 의해서 체포당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도 위기감을 느끼셨을까요? 요한의 소식을 들은 예수님은 일단 예루살렘과는 거리가 먼 변방 갈릴리 지역으로 피하셨습니다. 그리고 가버나움에 정착하셨습니다. 가버나움에 잠간 머문 게 아니라 아예 자리를 잡고 사신 겁니다. ‘가버나움에 사시니...’ 그때부터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여기서 몇 가지 궁금증이 생깁니다. 예수님이 소명을 받았으면 즉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할 것이지 요한이 체포당할 때까지 기다리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요한이 체포당하지 않았으면 예수님이 활동하지 않으셨을까요? 세례 요한이 예수님과 똑같이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다면 요한이 예수님의 선구자였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활동이 실패한 것으로 보고 전혀 새로운 방식과 차원에서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신 걸까요? 세례요한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와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실제로 똑같은 것일까요, 아니면 다른 것일까요? 이 모든 궁금증을 이 자리에서 다 풀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오늘 본문 말씀에 가까이 가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통해서 위 질문에 대한 간접적인 대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을 이해하려면 두 가지 개념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 나라는 천당 이미지처럼 일정한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 즉 그의 다스림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있는 곳이라면 거기가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알려면 하나님의 다스림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예수님은 비유로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포도원 주인의 비유에 따르면 한 시간 일한 사람이나 열 시간 일한 사람이나 똑같이 일당인 한 데나리온을 받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다스림입니다. 오늘 본문 23절이 말하듯이 치유와 축귀 등도 하나님의 다스림입니다. 인간 해방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다스림은 하나님만이 행할 수 있는 것을 가리킨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헤롯 정권이나 로마 제국이나, 율법 종교라 할 수 있는 유대교가 이뤄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예컨대 세계 창조 사건을 보십시오. 그것은 하나님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 엄청난 사건만이 아니라 우리 일상에도 하나님만 할 수 있는 일들이 가득합니다. 그게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그걸 아는 것만큼 기독교 영성의 세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는 힘이 곧 하나님의 다스림입니다.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우리 영혼의 심연이 기쁨과 평화로 가득 채워지는 일 역시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팔복 가운데서 가난한 사람, 우는 사람 등에게 복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게 가능한 이유는 하나님이 거기에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십시오. 저주받은 자리에서도 구원의 빛이 나옵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세상의 정치와 권력이 제공하는 편리한 삶의 조건에 농락당하지 않습니다.
둘째, 하나님 나라는 우리 앞에 가까이 왔습니다. ‘가까이’ 왔다는 말은 하나님의 다스림이 이미 온 것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여전히 기다려야 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미 왔으나 기다려야 한다는 게 말이 될까요? 그런 하나님 나라를 우리가 이해하고 경험할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 죽음을 생각해보십시오. 살아있는 사람에게 죽음은 미래의 사건이지만 동시에 오늘의 사건이기도 합니다. 지금 이렇게 숨 쉬고 먹고 마시고 사람들과 만나는 삶은 죽음과 연속적이라는 말씀입니다.
죽음이 불편한 주제라면 좀더 일상적인 예를 들어볼까요? 저의 취미생활은 테니스입니다. 군목 입대를 수개월 앞둔 1979년 가을부터, 그러니까 만으로 26살부터 테니스 라켓을 들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35년 동안 꾸준히 그 운동을 했습니다. 기도 시간보다 훨씬 많습니다. 어디 가도 테니스에 관한한 꿀릴 게 없습니다. 테니스 이야기만 나오면 은근히 교만해집니다. 35년 전의 내가 테니스 실력이 짱짱한 오늘의 나를 봤다면 엄청나게 부러워했을 겁니다. 35년이라는 세월의 차이를 두고 두 사람의 저가 있습니다. 이 둘은 다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똑같습니다. 하나로 이어져 있습니다. 35년 전의 저에게 지금의 저는 미래이면서 현재이기도 합니다. 이걸 가리켜 가까이 왔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가까이 온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는 사람은 지금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능력에 기대서 살아야 하며, 동시에 그 나라의 완성을 여전히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서 긴장이 있습니다. 35년 전 저의 테니스 실력은 형편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노력해도 실력이 늘지 않는다고 포기하거나, 또는 그런 정도의 실력으로 만족하고 말았다면 오늘의 제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기독교 신앙도 이와 비슷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 여기에 비밀한 방식으로 개입되었다는 사실을 눈여겨볼 줄 알아야 하고, 그 나라가 완성될 날을 인내심을 갖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긴장 가운데서 구도와 수행의 길을 꾸준히 가는 사람은 영적으로 높은 수준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런 설명으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손에 넣듯이 이해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이것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것은 인격과 상관없고 학력과도 상관없습니다. 이것은 단지 합리적인 사고방식으로가 아니라 영적인 인식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한 가지 태도를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메타노이아’, 즉 회심입니다. 이 메타노이아는 어렸을 때 남의 과수원에 들어가서 복숭아를 따먹은 것이나 거짓말한 것을 뉘우치는 정도를 말하는 게 아니라 삶의 방향 자체를 바꾸는 것을 가리킵니다. 방향을 바꾸기가 어렵습니다. 관성의 법칙은 영적인 세계에서도 통용됩니다. 한쪽으로 방향이 일단 잡히면 중간에 방향을 돌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특히 속도가 빠르거나 무게가 많이 나갈 때 방향 전환은 더 어렵습니다. 현대인들의 삶이 너무 빠르고, 소유도 많기에 삶의 방향을 바꾸기가 더 힘든 것 같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크면 잘못을 바로잡기가 힘듭니다. 방향을 바꾸려면 일단 속도를 늦추고 무게를 줄어야 합니다. 그리고 반복해서 방향을 조정해나가야 합니다. 단숨에 돌이킬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한번 선포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다시 선포되어야 합니다. 반복해서 증언되어야 합니다. 이런 일을 맡은 사람들이 제자들이며, 그 제자들의 사명을 이어가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정신없이 달리는 운전자들을 향해서 속도를 늦추고 유턴(U-tern) 하라고 큰길가에 서서 끊임없이 손 신호를 보내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우리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이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기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선포에 이어서 오늘 본문 18절 이하에서 제자들을 부르신 사건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해변을 지나시다가 배를 타고 고기를 잡던 사람들을 부르셨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 형제입니다. 19절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이 말씀은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에게 한 것이지만 야고보와 요한을 비롯하여 모든 제자들에게도 똑같이 해당됩니다. 고기를 잡는 일이 아니라 사람을 낚는 일을 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까지 해당됩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이 당장 그물과 가족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나선 것처럼 묘사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앞에서 예수님이 가버나움에서 사셨다고 설명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들을 가버나움에서 여러 번 만났을 겁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세례 요한이 체포당했다는 이야기도 했겠지요. 지금 우리가 교회를 어떻게 꾸려가야 하는지 서로 이야기하듯이 말입니다. 이제 예수님을 중심으로 자신들이 나서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야겠다는 결단을 하고 예수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거룩한 소명을 받은 겁니다. 그게 제자도, 즉 제자의 길입니다.
지금까지의 설명은 신학적인 것이어서 우리의 삶과 직접 연관되지 않는다고 느끼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삶의 현장은 하나님 나라, 그의 다스림, 이미 왔으나 여전히 기다려야 할 하나님의 능력과는 별로 상관없이 굴러가는 듯이 보입니다. 이 세상은 치열하다 못해 살벌하기까지 합니다. 경제적인 빈곤에 빠진 이들, 난치병으로 고생하는 이들, 실업자, 파업하는 노조, 부도 직전에 기업가들은 다른 데 신경을 쓸 여유가 없습니다. 거꾸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도 사실은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 결혼을 앞둔 사람들, 좋은 대학교에 합격한 이들, 연봉이 높은 직장에 들어간 이들, 사업이 번창하는 이들은 그들 나름으로 삶에 쫓겨서 하나님 나라를 생각할 틈이 없습니다. 그런 일들을 감당하고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삶이 무겁습니다. 그게 우리의 실존입니다. 당연히 그런 일상은 소중합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일상을 소홀하게 대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거기에만 휘둘려서 일상을 감싸고 있는, 또는 일상에 이미 가까이 온 하나님 나라에 눈을 돌리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인 일상이 우리의 영혼을 질식시킬 수 있다는 게 우리 인생의 역설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의 설교는 여기서 더 나갈 수가 없습니다. 더 나가는 것은 성령의 고유한 일에 대한 월권입니다. 테니스공을 라켓으로 칠 때 힘을 빼라고만 말할 수 있지, 그래서 틈틈이 힘이 들어간 것을 레슨 하듯이 짚을 수만 있지 억지로 힘을 빼게 해줄 수는 없는 거와 같습니다. 나머지 문제는 여러분 스스로가 해결해야 합니다. 그냥 고기를 잡는 일에만 머물고 싶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그 일만 성실하게 잘 감당해도 하나님께서 기특하게 여기실 겁니다. 그러나 “나를 따라오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영혼의 깊이에서 새롭게 듣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에 눈이 확 뜨일 겁니다. 눈을 뜬 사람은 자기가 보는 것을 따라나서지 않을 수 없겠지요. 그게 제자의 길, 즉 제자도(道)입니다. 그 길을 우리 함께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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